이재명 “관세 협상, 이익 없이 합의도 없어” 국익 관철 의지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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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양보 않겠단 의지 드러내
스위스식 맞대응 단기 충격 불가피
일본은 ‘투자-관세 합의’ 모델 선택

이재명 대통령이 대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좋으면 사인하겠지만, 불리한 합의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강조하며 ‘노딜’ 전략을 재확인했다. 우리보다 앞서 관세 협상을 마무리한 일본은 대규모 투자와 맞바꿔 자동차 관세 15%를 확정 지은 바 있으며, 스위스는 39%의 고율 관세에도 맞불 전략을 택한 상황이다. 상반된 두 모델 사이 선택을 앞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국익을 해치는 합의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이어질 후속 협상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합의성·공정성 원칙 준수”
11일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미 관세협상 결과를 명문화하지 않았다’는 일각의 지적에 “최소한 합리적인 사인을 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며 ”좋으면 사인해야 되는데 우리에게 이익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느냐“고 반문했다. 단순히 서면 합의서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비난하는 행위를 멈춰달란 당부도 덧붙였다.
앞서 우리 정부는 지난 7월 말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했다. 상호관세는 유럽연합(EU), 일본과 같은 수준의 15%로 최종확정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고, 쌀과 소고기 추가 개방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동차 분야의 경우 그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무관세 프리미엄’이 깨지면서 EU·일본산과 동일한 관세를 적용받게 됐다. 아울러 관세를 15%로 조정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이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직접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했고, 양국의 관계 발전을 둘러싼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때도 서면 형태의 합의 문건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보다 앞서 협상을 마친 EU와 일본에 대한 팩트시트(fact sheet·협상 구체 사항을 담은 문서)를 간략하게나마 발표한 것과 상반된다. 대통령실은 “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얘기가 잘 된 회담”이라고 전하며 “경제통상 안정화, 동맹 현대화, 새 협력 분야 개척 등 3대 목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이를 두고 야권은 비판의 날을 세웠다. 박성훈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규모는 우리 국내총생산(GDP) 대비 20.4%에 달한다”며 “일본(13.1%), EU(6.9%)보다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쌀·쇠고기 추가 개방은 없었다지만, 미국의 주장은 다르다”면서 정부의 협상 발표와 실제 내용 사이 괴리를 지적했다. 명문화된 합의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회담의 성패를 논할 수 없다는 게 야권 전반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단순히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다’는 사실 전달을 넘어, 불리한 합의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그는 후속 협상 경과에 대해 “완결된 게 아닌 데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약간 부적절하고 어렵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이면 합의도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합의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무리한 요구에 강경 대응 나선 스위스
미국의 초고율 관세 압박 속에서 각국의 대응은 극명히 엇갈린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대응 방식을 택한 곳으로는 스위스를 꼽을 수 있다. 8월 초 트럼프 대통령은 스위스산 제품에 기존 31%보다 더 높은 39%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대통령이 직접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발언을 ‘도덕적 훈계’로 받아들이면서 협상이 결렬된 데 따른 결과다. 미국은 지난해 스위스와의 무역에서 385억 달러(약 54조원)의 적자를 떠안은 바 있다.
스위스의 주력 수출품은 시계와 정밀 기계, 제약품 등으로 관세 인상 직후 제조업 전반에 위기가 감지됐다. 이에 주요 제약사들은 즉각 전략을 수정하고 나섰다. 로슈와 노바티스가 대표적 예로, 이들 두 회사는 각각 500억 달러(약 70조원), 230억 달러(약 32조원) 규모의 미국 내 투자를 발표했고, 기존 대미 수출을 모두 현지 생산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향후 1년 반 안에 의약품 관세를 150~25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경고한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여타 부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와 상반된 풍경이 연출됐다. 고율 관세가 적용된 스위스 명품 시계와 유럽산 사치품을 둘러싸고 미국 내 밀수가 급증한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내 다수의 부유층과 인플루언서들이 밀반입에 가담하고 있으며, 특히 스위스 시계는 높은 관세를 피하는 것은 물론 밀수를 통해 35% 이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고가 사치품은 불법성이 명확하지 않아 세관 단속에서도 적발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이 소비자들의 행동까지 왜곡시키며 시장 질서를 흔들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스위스 정부의 ‘맞불 카드’에도 힘을 싣는다. 스위스는 미국 측이 요구하는 2,000억 프랑(약 2,500만 달러·348조원) 투자와 법인세율 조정, 국방비 지출 확대 등이 국가 재정과 기업 경쟁력에 장기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버티기’를 택했다. 그러나 기업의 미국 이전이 점차 본격화하는 만큼 해당 전략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국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할 경우 단기적 충격과 시장 왜곡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사례는 대미 협상 전략의 득실을 가늠할 중요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일본은 단기 안정에 중점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일본은 이달 5일 5,500억 달러(약 765조7,000억원) 규모의 투자 운용을 미국에 전부 위임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그 대가로 자동차 관세 15%를 문서로 확정받았다. 미국은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제조, 핵심광물, 조선 등 우선 투자 분야를 명시했으며, 투자위원회가 안건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최종 선정하도록 설계를 고정했다. 그러면서 행정명령이 관보에 게재된 뒤 7일 내 적용 지시가 가능하다는 문구까지 포함해 빠른 실무 이행의 의지를 드러냈다.
앞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투자 세부 계획과 자금 배분 메커니즘을 요구하며 협상 문서화를 유보한 바 있다. 이는 상호관세 15%라는 외곽선만 먼저 맞춘 뒤, 자동차 관세 인하 등을 지렛대 삼아 투자 약속의 규모와 운용권한까지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 일본이 수용한 안에는 미 상무장관의 상시 모니터링, 이행 정지 시 관세 및 관련 조치의 재도입 권한 등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또 미국 측의 자본 요청이 있을 때 일본이 자금을 송금하고, 선택된 프로젝트는 미국 내에서 집행되며, 수익의 대부분이 미국 납세자에게 귀속된다는 점까지 공표됐다. 자동차 관세 15%의 ‘즉시성’은 이러한 통제 장치를 수용한 결과인 셈이다.
일본은 단기적으로 자동차 관세 불안정 요인를 제거함으로써 미국 시장 내 가격 변수와 재고 리스크를 낮추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를 통해 동시에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조선, 핵심광물 같은 전략 산업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 기회 또한 열릴 것이란 관측에서다. 이 같은 시나리오에선 대규모 투자자금의 집행이 미국 내 설비 확충에 집중되더라도 일본 기업의 공급망 협력과 발주 연계 등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는 게 일본 정부의 기대다.
이러한 일본의 대응 모델은 단기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전략과 대비된다. 다만 투자 운용의 자율성이 극히 제한되고, 수익의 대부분이 미국에 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효율성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에 한국 정부 역시 스위스식 버티기 기조와 일본식 ‘투자-관세 패키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양상이다. 전자의 경우 자국 산업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지만 재정적·정책적 부담이 크고, 후자의 경우 관세 격차에 따른 판매·마진 조정이 불가피하다. 결국 한국의 선택지는 두 가지 모델 사이 균형점을 찾는 데 따라 정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