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빚잔치 속 美 달러 패권 위태 “느리지만 확실히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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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신뢰 붕괴, 기축통화 체제 균열로 확산 ‘비달러 자산’으로의 탈출 가속화 세계 GDP서 美 비중 축소, 탈달러 움직임 유발

미국 통화정책의 전환 조짐이 글로벌 시장의 불안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양적긴축 종료와 유동성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달러화는 급격한 약세 압력에 직면한 상태다. 이는 단순한 환율 변동을 넘어 달러의 기축통화 위상 자체를 흔드는 변곡점으로 평가된다. 현재 미국의 경제적 위상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되는 가운데,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불어나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예측 불가능한 보호무역 조치와 자의적 금융 제재가 빈번해지면서 글로벌 신뢰가 급속히 훼손되고 있다. 달러를 국제적 안전자산으로 떠받쳐온 신뢰 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다.
‘달러 위기론’ 다시 부상
19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미국 달러화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비트코인이 결정적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최근 ‘플래시 크래시’로 불리는 급락 사태 이후 사상 최고가 12만6,000달러(약 1억7,400만원)에서 10만8,000달러(약 1억4,900만원) 아래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금값은 연초 대비 64% 상승하며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와 관련해 투자자 피터 시프는 “금이 64%, 은은 87%씩 각각 올랐다”며 “이를 보고도 달러와 금융 위기가 임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라고 밝혔다. 시프는 대표적인 금 투자 옹호론자로, 이번 상황을 ‘달러 붕괴의 전조’로 해석했다. 헤지펀드 시타델 창업자 켄 그리핀도 “투자자들이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대체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금과 암호화폐가 새로운 안전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케네스 로고프(Rogoff)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교수도 "미국 달러의 위상은 2015년에 정점을 찍은 후 계속 내려가고 있다"며 "이 흐름을 되돌리기는 이미 어려워졌고,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들은 그 속도를 급격하게 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들어 특히 급속히 불어나는 미국 부채가 초래할 심각한 문제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로고프 교수가 꼽는 문제점은 금리가 정상화(저금리 탈피)됐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 차입국인 미국이 금리 급등에 맞닥뜨리고 장기 금리가 높은 상태로 유지되면 극도로 큰 고통을 겪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부채는 2000년대 초 대비 3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어마어마한 부채’와 ‘높은 금리’의 결합은 위험하다는 게 로고프 교수의 지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달러 강세'와 정반대
이 같은 약달러 현상은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터졌을 당시에도 강세를 보였던 상황과 대조된다. 지난 금융 위기 당시 달러가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가장 큰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화청이 달러 표시 자산을 선호했던 것에 기인한다. 1970년대에 사우디가 대량으로 매입하더라도 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아 언제든 손쉽게 팔 수 있는 투자 상품은 사실상 미국 국채 뿐이라고 판단했듯이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의 투자자들도 미국 국채를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자산으로 보고 갈망했던 것이다.
실제로 기축통화의 특권적 힘은 위기에서 더 선명해진다. 위기가 심해지면, 달러 수요가 증가해 그 가치가 높아진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경기침체 등에서 미국이 저금리로 부채를 발행해 쉽게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다. 돈을 빌려 재정 적자도 메우고, 막대한 군비도 유지하면서 미국은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정반대다. 중국 위안화(CNY)를 비롯해 다변화된 통화체계가 등장하면서 달러 독점 체계가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 전략을 적극 추진하며 달러 중심의 통화체제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과거처럼 절대적이지 않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달러로의 ‘피난처’ 역할이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미국이 자국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빚잔치가 영원히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도 문제다. 한 경제 전문가는 "그들은 영원히 빚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며 "'전형적인 ‘이번엔 다르다(괜찮다)’ 사고방식이다.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아도 부채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준은 연내 양적 완화를 시사하고 있다. 지난 14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향후 수개월 내에 연준의 보유자산을 줄이는 양적긴축(QT·대차대조표 축소)을 종료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연준은 앞서 양적긴축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던 2018∼2019년 대차대조표 축소 여파로 증시가 흔들리고 다수의 투자자산이 저조한 수익률을 기록한 경험을 토대로 양적긴축 정책 변화에 신중한 접근법을 취해왔는데 이를 곧 끝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미국 신용 위기 우려에 엔화·유로화 강세
달러가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엔화와 유로화 가치는 큰폭으로 뛰고 있다. 지난 1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며 전날 종가에 비해 0.8% 상승해 6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0월 둘째 주만 해도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53엔 범위 안에서 거래됐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자민당 총재가 재정 확장과 통화 완화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에 엔화 가치는 8개월 사이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주 들어 달러의 하락압력이 강해지면서 엔화가 강세로 돌아선 모양새다. 같은 기간 유로화도 달러 약세와 프랑스 정국 불안 진정에 힘입어 1.16달러로 반등했다.
엔화·유로화 강세는 미국 신용시장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촉발 요인이 됐다. 미국의 두 지역은행인 자이언스 뱅코프(Zions Bancorp)와 웨스턴 얼라이언스 뱅코프(Western Alliance Bancorp)가 차입인과의 사기 문제를 공개하면서 신용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다. MUFG은행 애널리스트 마이클 완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 신용 시장의 자산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떠오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일부 지역은행의 급격한 매도세가 발생해 전반적인 위험 심리가 약간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신용 우려는 안전자산 선호 심리를 자극하며 엔화와 유로화 매수세로 이어졌다. HSBC의 아시아 외환 리서치 책임자 조이 츄는 보고서에서 "예상치 못한 미·중 무역 긴장의 부활"이 달러 약세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달러 매도에 나선 것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미국 신용시장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엔화와 유로화의 매수를 뒷받침할 것이란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