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이동장벽 허물자 ‘머니무브’ 확산, 증권사 중심으로 시장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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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이전 시행 1년 영향 분석 증권사, 다각화 운용으로 원리금 보장형 수익률 우위 은행권, 실적배당상품 강화·디지털 혁신으로 맞대응

최근 퇴직연금 '머니무브'가 활발해지면서 은행권과 증권사 간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실물이전 서비스로 금융사 이동이 자유로워진 가운데 증권사가 높은 수익률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며 전통적 강자인 은행권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이는 단순한 계좌 이동이 아닌 안정 위주의 관리에서 능동적 운용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신호로 평가된다.
DB·DC형서 각 4,000억원 이탈
22일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 따르면 작년 10월 말 실물이전 제도가 시작된 이후 올해 9월 말까지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에서 각각 4,471억원, 4,010억원이 순유출되면서 총 8,481억원이 증권사와 보험사 등으로 이동했다. 개인형 퇴직연금(IRP)에서도 약 1년간 6,720억원이 빠져나갔다. 총 1조5,000억원이 넘는 퇴직연금 자금이 5대 은행에서 증권사와 보험사 등으로 간 것이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이란 기존에 보유한 퇴직연금계좌를 해지·매도 없이 타 금융사로 이전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증권사로, 증권사에서 보험사 등으로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를 옮기려면 과거에는 기존 상품 가입을 해지해야만 했다. 이럴 경우 복리 혜택 등이 사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 같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작년 10월 31일자로 실물이전 제도가 도입됐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금융사로 계좌를 이동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기존 퇴직연금 시장의 60%를 차지하던 은행에서 증권사로 넘어가는 움직임이 가장 크게 포착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 전체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약 445조원이다. 이 중 은행권이 235조원(52.9%), 증권사가 112조원(25.3%)을 차지하고 있다. DB형의 경우 회사가 직원들 퇴직금을 관리하는 방식이어서 기업과 금융사 간 협상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지만, 개인이 운용하는 DC형과 IRP의 경우 이동 수요가 더 크게 발생한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은행-증권사 경계 희석
실제 수익률을 봐도 은행은 증권사에 밀리고 있다. 금융감독원 연금포털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DB형·DC형·IRP의 원리금보장형은 증권사가 은행권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증권사의 IRP 보장형 1년 평균 수익률은 3.87%로 은행권(3.03%) 대비 0.84%포인트 높았다. DC 보장형 수익률도 증권사 3.7%, 은행권 3.12%로 증권사 우위가 뚜렷하다. DB 보장형은 증권사가 3.71%로 은행권의 3.26%보다 약 0.45%포인트 높았다.
이는 증권사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공격적이고 다각화된 자산운용을 통해 운용 효율성을 높인 데 기인한다. 반면 은행권은 예금·채권 중심의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유지해 안정성은 확보했으나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즉 증권사는 자산배분과 운용 역량 강화를 통해 수익률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원리금 비보장형 상품에서는 은행권이 증권사를 근소하게 앞섰다. '위험자산 투자는 증권사에서, 안전한 투자는 은행에서'라는 통념을 벗어난 결과다. 은행권의 DC 비보장형 1년 평균 수익률은 7.0%로 증권사 6.34%를 0.66%포인트 앞섰다. DB 비보장형은 은행(6.1%)이 증권사(5.95%)보다 0.15%포인트 높았다.
IRP 비보장형도 은행권이 6.4%로 증권사 6.31%를 소폭 상회했다. 이는 올해 증권사 고위험 상품들의 일시적 부진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증권사는 주로 고위험·고수익 테마형 상장지수펀드(ETF)와 해외 주식형 상품에 투자하는 반면, 은행권은 안정성을 강조하면서도 타깃데이트펀드(TDF) 같은 장기 성장형 상품을 중심으로 비보장형 상품 수익률을 높였다.
은행권은 전통적으로 원리금 보장형 상품과 대면 상담 채널에 강점이 있다. 예금·보험 등 상품군이 주를 이루며 안정성과 고객 신뢰라는 부분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최근 은행권은 TDF와 맞춤형 포트폴리오 등 장기 투자 상품을 잇달아 출시하고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등 자동화 솔루션을 강화하고 있다. 전국 영업점과 대면·비대면 연계 서비스 등 채널 경쟁력도 지속적으로 확대 중이다.

'짠물 수수료'에 증권사 인력 처우 제자리
퇴직연금 시장의 확장은 증권업계에도 새로운 기회를 열었지만, 사업자 간 수수료율 경쟁이 치킨게임으로 치달으면서 정작 내부 담당 인력의 처우는 제자리걸음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담당자는 "현물이전 제도 도입 후 퇴직연금이 소위 말해 '큰 장'이 섰지만, 정작 내부 인력의 처우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며 "퇴직연금 사업이 아직까지는 '돈 버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도 당장 큰 폭으로 처우를 개선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 퇴직연금 사업의 저조한 수익성은 무료에 가까운 수수료율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퇴직연금 사업은 기본적으로 퇴직연금 계좌의 운용 관리와 자산 관리 수수료를 통해 수익이 발생하는데, 증권사의 경우 수수료율이 은행 등 타 사업자보다도 낮아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 금감원 통합연금포털에 의하면 운용관리와 자산관리 수수료를 합산한 증권사의 IRP 수수료율은 0~0.29% 수준에 불과하다.
수수료를 아예 수취하지 않는 곳도 있다. 삼성증권은 2021년부터 비대면으로 IRP 계좌를 개설할 경우 운용관리·자산관리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후 다른 증권사들도 비슷한 정책을 내놓으면서 IRP에선 사실상 수수료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특정 증권사가 수수료 무료를 선언한 상황에서 다른 증권사들이 수수료를 받기란 쉽지 않다"며 "은행은 그나마 적게라도 수수료를 수취하고 있지만, 증권사에서는 IRP를 통해 수익을 내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시장 규모가 430조원에서 장차 1,000조원 수준으로 확대되더라도, 지금의 수수료 체제 하에서 증권사가 거둘 수 있는 실질적인 수익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금융권 고위 임원은 "퇴직연금을 둘러싸고 증권사들 사이에 경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부서처럼 인력 영입을 위해 '오버페이'를 감수하는 일은 사실상 없다"며 "향후 시장이 안정화하면 부가서비스 등을 통한 수익 개선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