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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석유화학 ‘구조조정’ 답보 상태, 정부 개입 없으면 ‘눈치싸움’만 장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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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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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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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그 이야기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서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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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석유화학 산업, 삼중고 벼랑 끝
정부 압박에도 자구계획안 지지부진
정부 적극 나서 구조 개편 이뤄내야
롯데케미칼 여수공장 전경/사진=롯데케미칼

역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석유화학업계가 생존을 위한 제살깎기에 돌입했지만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정유사 설비와 통합 등 선택지를 두고 각사 이해관계와 계산이 복잡한 탓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 기업 간 빅딜을 제시하고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설비 통폐합과 부실 사업 정리 등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화업체들, 자구책 구체화 ‘아직’

24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에틸렌 등 범용제품 생산량을 합리적으로 줄일 방법을 찾고 있다. 이는 정부의 구조조정 요청에 따른 것으로, 정부는 지난 8월 여수산단 등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에 글로벌 과잉공급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NCC(나프타 분해시설) 생산 규모를 최대 370만 톤 감축하도록 주문하는 등 자발적인 사업 재편을 올해 연말까지 요구한 상태다. 자구안을 먼저 제출하면 이를 검토, 승인한 후 기업활력제고특별법(기활법)을 통해 각종 세제 혜택과 규제 특례를 준다는 방침이다.

이에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의 합작사 HD현대케미칼로 자사 NCC(납사분해시설) 설비를 몰아주고 HD현대케미칼을 계열사에서 떼어내는 안을 논의 중으로 알려졌다. 생산시설을 한데 모으면 시설을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고, 계열사에서 떼어내면 모기업 재무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단 판단에서다. LG화학은 여수 NCC 운영만 담당하는 합작사를 GS칼텍스와 설립하는 안 등을 논의 중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모두 업계발(發) 풍문일 뿐 아직 공식 발표에 나선 기업은 없다. LG화학은 지난 8월 관련 공시에서 “석유화학 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사업가치 제고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 관계자 역시 통폐합 관련 질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이라고 답했다. 최근 울산 지역 석유화학 3사가 석유화학단지 사업 재편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움직임이 있기도 했지만 이 역시 진전은 없는 상태다.

LG화학 여수공장 전경/사진=LG화학

각사 ‘윈-윈’ 방안 도출 난항

자구책 마련에 속도가 붙지 못하는 데는 각사의 복잡한 계산식이 깔려있다. 참여 기업이 모두 윈-윈하는 통폐합 방식을 도출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의 NCC 통합은 롯데케미칼이 설비를 넘기면 HD현대오일뱅크가 설비 가치 만큼 현금 또는 현물을 출자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는데, 이 경우 설비 가치 산정을 두고 줄다리기가 불가피하다.

LG화학과 GS칼텍스 NCC 통합 역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GS칼텍스가 자사 석유화학 생산능력 확대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GS칼텍스는 지난 2022년까지 총 2조7,000억원을 투입해 올레핀 공장을 준공한 바 있다. 여기에 각 기업이 개별적으로 NCC 설비를 처분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 이 같은 상황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 업황이 어렵다 보니 각사가 설비 매각에 나서더라도 살 곳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헐값에 넘길 수도 없지 않나”라며 “그러다 보니 노후설비는 셧다운하고, 아직 경쟁력 있는 설비는 인근 회사와 합작 등 형태로 같이 돌리는 게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각사의 그림이 달라 진척이 느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 관망자 아닌 중재자로 나서야"

이에 업계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원책이 구체화하고 더욱 적극적인 지원 약속이 있어야 구조조정 계획 마련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지적이다. 정대옥 HD현대케미칼 기획부문장은 앞선 석유화학특별법 제정 국회 토론회에서 “자산 양수도에 대한 양도 소득세·법인세 등 세제 지원과 자금 지원 및 지급 보증, 연료용 LNG를 기존 공정에도 투입가능하도록 특례 적용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생산시설 축소나 폐쇄, 사업 매각, 기업 간 통합 등 산업 구조조정은 기업 간 이해관계와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만큼 기업 자율에만 맡겨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지난해 말에도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통해 업계의 자율적 사업 재편을 촉구했지만, 업체 간 눈치 보기 양상만 지속되고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체 감축 목표량과 시한이 제시된 만큼 진일보하긴 했지만, 여전히 큰 기조는 업계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8월 정부는 원칙적인 입장만 밝히고, 구조조정을 유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당근’과 ‘채찍’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일단 업계의 노력을 지켜보되, 논의가 지지부진할 경우 기업들의 결단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일침했다. 정부가 대수술을 주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조정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10여 년 전, 비슷한 위기를 겪었던 일본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에틸렌 설비감축, 각종 규제 예외 인정 등 산업 재편의 밑그림을 제시하며,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자율에만 맡겨서는 고통 분담과 미래 준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계획은 기업별 맞춤형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가이드라인만 주고, 구체적인 청사진 제시를 뒤로 미루고 있다. 위기 극복의 책임을 사실상 기업에 떠넘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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