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산업 보조금의 덫, 경쟁력을 잃는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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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산업 보조금, 생산성보다 기존 기업 안정에 초점 자원 재배분이 막혀 효율적 기업 성장과 경쟁력 약화 투명성 강화와 성과 연계 중심의 구조 전환 필요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3년 동아시아 주요국 정부는 대형 제조업체에 약 1,080억 달러(약 145조 원)의 산업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는 OECD가 집계한 글로벌 기업 표본 기준으로 매출의 1.3%에 해당하며, 이 가운데 시장금리보다 낮은 대출은 2020년 이후 두 배 가까이 늘어 467억 달러(약 63조 원)에 달했다. 지원금은 일부 산업과 국가에 집중돼 있어 산업구조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보조금의 규모가 아니라 그 작동 방식이다. 동아시아의 생산성은 효율적 경쟁보다 자산 확장에 의존해 왔고, 정부 주도의 지원체계가 혁신보다 안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술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 선도기업과의 격차가 벌어지며 한때 강점을 보이던 산업 경쟁력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

지원의 크기보다 배분 방식이 문제
동아시아 생산성 둔화의 근본 원인은 정부 보조금의 규모가 아니라 자금의 흐름에 있다. 2005~2015년 사이 글로벌 디지털 제조업 선도기업의 생산성은 76% 증가했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베트남은 그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자본이나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효율적인 기업으로 자원이 옮겨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존 기업에 집중된 보조금은 규모 유지는 가능하게 하지만 품질 개선과 혁신은 가로막는다.
연구 결과는 이러한 ‘자원 오배분’의 대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동남아를 대상으로 한 분석에 따르면 자원 재배분만으로도 인도네시아는 80% 이상,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20~30%의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 보조금 대출, 규제 특례, 불투명한 조달 절차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비효율적인 기업에 자원이 몰리는 구조를 고착시킨다.
중국의 산업별 정책을 분석한 연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산업 보조금이 생산성이 낮은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유지시키며 산업 내 생산성 격차를 확대시키고 있다. 성장의 촉매였던 보조금이 이제는 경쟁을 약화시키는 족쇄로 바뀐 것이다.

주: 연도(X축), 지수(Y축)/베트남(VNM), 인도네시아(IDN), 중국(CHN), 말레이시아(MYS), 필리핀(PHL)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
OECD의 국제 기업 통계(MAGIC)에 따르면 2023년 동아시아 산업 보조금 규모는 기업 매출의 평균 1.3%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지원은 태양광·반도체·조선·철강 등 일부 산업에 집중돼 있으며, 중국 기업의 보조금 규모는 다른 국가의 4~8배에 달한다. 특히 2020년 이후 급증한 저리 대출은 시장 규율을 약화시키며 산업 보조금이 생산성 향상보다 재무 안정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업 간 격차도 크다. 주요 제조업체의 절반 이상이 매년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평균 지원 비율은 매출의 0.6~0.7% 수준이다. 그러나 일부 국유기업은 매출의 15% 이상을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이런 격차는 입찰 경쟁을 왜곡하고 신규 진입을 막으며 기술 확산을 더디게 만든다. OECD 분석은 중국 기업의 시장점유율 확대와 보조금 간의 뚜렷한 상관관계를 확인했고,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생산성 성장은 기업 간 자원 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 효율적인 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에 머물러 있다”라고 분석했다. 결국 보조금은 신생 기업의 성장을 막고 기존 기업의 지위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투명성 결여도 문제다. WTO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 정부의 산업 보조금 규모와 대상이 불투명해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2022년 상장 중국기업의 99% 이상이 보조금을 받았으며, 대부분이 직접 지원금·세제 감면·저리 대출을 중복 적용받았다. 지원이 광범위하고 복합적이어서 정책 효과를 측정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주: 베트남의 서비스 자유화는 서비스 및 하류 제조업 부문 모두에서 생산성을 높였으며, 선도기업의 개선 폭이 가장 컸다.
왜곡의 고리
산업 보조금은 신용, 경쟁, 인력 세 영역에서 시장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신용 부문에서는 ‘좀비기업’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저리 대출이 부실기업의 손실을 떠안으며 시장의 위험 신호를 무력화한다. IMF 분석에 따르면 이들 기업은 수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지만, 낮은 금리 덕분에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건전한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며, 인력과 설비가 비효율적으로 고착된다.
경쟁 구조의 왜곡도 크다. 국유기업은 토지·자금·조달 기회에서 우대를 받아 생산성이 낮아도 규모를 유지한다. 베트남 사례 연구에서는 이런 특혜가 자본 오배분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됐다. 투자 규모는 커졌지만, 효율은 낮고, 민간 선도기업의 혁신 속도와 디지털 전환은 더뎠다.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생산성 부진은 평균의 문제가 아니라 선도기업의 성장 정체에 있다”라고 분석했다.
인적자본의 약화도 이어진다. 지원이 기존 기업에 집중되면서 경영 역량 강화나 기술 인력 양성에는 투자가 부족하다. 보조금이 생존을 보장하는 구조 속에서 기업은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외국 기업으로부터의 기술 확산 효과도 약화되고 있다. 따라서 보조금은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기업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
생산성 중심으로 바꿔야
산업 보조금의 방향은 단순한 감축이 아니라 구조의 전환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과와 경쟁, 역량을 중심으로 한 지원 체계의 재구성이다. 투명성이 그 출발점이다. 모든 보조금과 세제 감면, 저리 대출은 기업 단위로 등록하고 조건과 만료 시점을 공개해야 한다. 정부는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프로그램을 정리하고, 감독 기관은 시장 왜곡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지원 방식도 성과 기반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기한 지원 대신 일정 기간 뒤 평가를 통해 자금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저리 대출을 ‘성과 연동형 혁신 자금’으로 전환해 수출 확대나 에너지 효율 개선, 디지털 전환 등의 목표 달성에 따라 지원 규모를 조정할 수 있다.
시장 규율 역시 강화돼야 한다. 부실기업이 보조금으로 연명하지 못하도록 파산 절차를 엄격히 적용하고, 보조금을 활용한 기업 인수는 효율 개선이 입증될 때만 허용해야 한다. 특히 국유기업이 많은 산업에서는 조달 절차를 투명화하고 차입비용을 시장 수준에 맞춰야 한다.
마지막으로 역량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 보조금의 일부를 경영 교육, 기술 훈련, 데이터 활용 등 기업의 학습 능력 강화에 배정하고, 대학·기술 기관과 연계한 현장형 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 지원이 단순한 비용 보전이 아니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때 산업 보조금은 ‘평균적인 기업’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선도기업’을 키우는 성장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보조금의 방향을 다시 세워야
동아시아 산업 보조금의 핵심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구조다. 지금의 체계는 생산성 향상보다 기존 기업의 안정을 우선하며, 경쟁보다 보호에 머물러 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성장 동력이 약화되고 자원 재배분의 흐름이 막혀 있다.
해법은 분명하다. 모든 지원을 성과와 연결하고, 효과를 검증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비효율적인 기업이 보조금으로 생존하지 못하도록 퇴출 기준을 마련하고, 자금의 일부를 경영 역량과 기술·인력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보조금은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니라 구조 개혁의 수단이어야 한다. 방향이 바뀔 때, 산업 보조금은 평균적인 기업을 떠받치는 장치가 아니라 선도기업의 성장을 이끄는 정책으로 거듭날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Industrial Subsidies in East Asia Hold Back the Best Firm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