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가족이 만든 복원력, 국가가 이어야 할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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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위험을 완충하는 가족의 구조적 역할 장기 불안정 속에서 재편되는 가계 보험의 메커니즘 사적 지원을 공적 제도로 전환하는 재보험 설계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오랫동안 경제의 첫 번째 안전망이었다. 부모 세대는 위기 때마다 자녀의 생활을 지탱하며 불확실성을 흡수했다. 그러나 최근 그 기능이 달라지고 있다. 단기적 지원에 머물던 가족의 역할이 장기적 방어 체계로 변하고 있다.
이 변화는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반응이다. 고령화, 저성장, 물가 상승이 맞물리면서 가계는 불안을 일시적 사건이 아닌 일상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단기 충격에 자산을 매각해 대응했다면, 오늘의 일본과 남유럽은 장기 불안정에 대비해 저축을 늘리고 은퇴를 늦추고 있다. 사회 전체가 완만한 장기 위기 체제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결국 이 흐름은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가족이 여전히 1차 보험자라면, 국가는 어떤 방식으로 그 부담을 덜어야 하는가. 세대 간 위험을 완충할 새로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가계 보험의 작동 논리
가계는 공적 안전망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위험을 흡수한다. 2025년 노르웨이 행정 자료 기반 연구는 그 구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부모는 자녀의 소득이 일시적으로 줄면 저축을 찾거나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지원한다. 반대로 소득 감소가 길어지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다시 대비한다. 세대 간 보험은 이렇게 단기와 장기에 따라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연구진은 1997~2014년 행정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부모가 자녀의 단기 소득 감소의 약 43%, 장기 감소의 약 27%를 보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이 늘어날 때는 지원이 중단됐다. 도움의 흐름은 한 방향이었다. 성과는 나누지 않지만, 위험은 함께 감당했다.
이 구조는 공적 제도와 보완 관계를 이룬다. 실업급여나 배우자 소득이 충분하면 가족의 개입은 줄어든다. 반대로 제도가 약하면 가계의 부담이 커진다. 국가는 기본적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이후의 위험은 가족이 맡는 구조가 가장 안정적이다. 그러나 이 체계는 부모 세대의 자산과 노동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충격이 세대 전체로 번지면 가계 보험은 곧 한계에 부딪힌다. 교육 현장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부모의 소득이 줄면 조부모가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대신 부담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하지만 경기 침체가 길어질수록 가족의 지원 여력은 빠르게 줄어든다. 학기 단위의 도움은 가능하지만, 학위 전체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결국 사적 지원만으로는 교육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주: 자녀의 근로소득이 감소하면 부모의 저축이 늘어나지만, 소득이 증가할 때는 변화가 거의 없다.
일본, 장기 충격의 일상화
일본은 장기적 소득 불안에 대응하는 가족 전략이 국가 단위로 확장된 대표 사례다. 저출생과 인력난이 겹치며 부모 세대가 사실상 ‘세대 간 완충층’으로 작동하고 있다. 2023년 65~69세 취업률은 52%, 70~74세는 34%다. 고령층 중 네 명 중 한 명이 여전히 일하고 있다.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한 기업 도산은 2024년에 32% 증가했다. 2025년 4월부터는 중소기업까지 65세 계속 고용이 의무화됐다.
근로 동기는 복합적이다. 생계 보전과 더불어 일의 의미가 함께 작동한다. 메이지야스다연구소 조사에서 근로자의 43.9%가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 중 37.7%는 “연금·저축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35.7%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 변화는 교육과 기업 운영을 바꾸고 있다. 대학과 평생교육기관은 짧은 단위의 재교육 과정을 늘려 재취업을 돕고 있다. 기업들은 고령 인력을 안전 관리·품질점검·IT지원 등으로 재배치해 인력 공백을 메운다. 지역 커뮤니티 칼리지는 주 3일 근무자에 맞춘 단기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시니어의 추가 소득은 자녀 세대의 등록금·이직 비용·생활비를 보완하는 새로운 현금흐름이 된다. 한계도 분명하다. 돌봄과 일을 병행하면 생산성 저하와 건강 부담이 커진다. 유연 근무, 인체공학적 설비, 역할 분화가 갖춰지지 않으면 세대 간 분담은 불공정으로 변한다. 고령 인력이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 다음 과제다.

주: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소득 충격이 지속될수록 부모는 즉각적 지원보다 대비성 저축으로 전환한다.
유럽의 완만한 전환과 그리스의 실험
일본이 장기 충격을 일상화했다면, 유럽은 완만한 속도로 같은 압력을 따라가고 있다. 2024년 유럽연합(EU)의 고령부양비는 33.9%로 상승했다. 같은 해 노동력은 약 100만 명 줄었다. 두 지표 모두 인구 구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북유럽은 복지 제도가 안정적이지만, 남유럽은 가족 의존도가 여전히 높다. 그리스가 대표적 사례다.
그리스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24년 23.3%다. 출산율은 1.3~1.4 수준으로 세대 재생산이 어렵다. 정부는 2035년까지 출산율 제고를 위해 최대 200억 유로(약 30조 원)를 투자했다. 2025년에는 16억 유로(약 2조 4천억 원) 규모의 긴급 대책을 내놨다. 청년층의 해외 이주와 낮은 임금 구조가 이어지면서, 국가보다 가족이 생활을 지탱하는 중심축으로 남고 있다.부모는 교육비를 부담하고, 조부모는 돌봄을 맡는다.
그리스 정부는 교육제도를 중심으로 가족의 부담을 완화하려 하고 있다. 학위를 여러 단계로 나눠 이수할 수 있는 제도, 소득 연동 등록금 상환, 시험 기간 아동 돌봄 지원이 그 예다. 이 정책들은 모두 ‘가족 보험’을 제도권 안으로 옮기는 장치다. 학생 지원을 넘어 세대 간 위험을 분담하는 사회적 설계다. 그러나 핵심은 속도다. 인구 구조가 자연히 바뀌기를 기다릴 수 없다. 세대 간 위험을 조정하는 제도 설계를 앞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유럽의 가족은 이미 줄어든 자산으로 또 한 세대를 떠받쳐야 한다.
공적 재보험으로 닫는 설계
가족이 1차 보험자라면 국가는 재보험자로 작동해야 한다. 방향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교육비를 소득과 연동한다. 상환 부담을 줄이면 가계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학업 중단을 피할 수 있다. 둘째, 부모 세대의 재숙련을 강화한다. 50대 후반·60대 초반의 소득 능력을 높여 자녀 지원과 노후 준비를 동시에 달성한다. 셋째, 이민 정책과 퇴직 이후의 재취업 경로를 인력정책에 포함한다. EU가 매년 겪는 약 100만 명의 노동력 공백은 출산 장려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현장 적용도 가능하다. 학교는 돌봄·간병 일정을 고려한 시간표를 설계하고, 대학은 고령층 대상 재교육 과정을 확대한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은 시니어를 정보기술 보조나 안전 관리직으로 재배치한다. 기술 조달에선 체력 부담을 줄이는 장비를 우선 도입한다. 이런 조합이 있어야 세대 간 위험 분담이 제도적 지속성을 확보한다.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시니어 고용이 청년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험은 다르다. 노동시장이 빡빡해질수록 기업은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해 시니어 고용을 늘렸다. 가족 지원이 불평등을 확대한다는 지적도 있다. 해법은 축소가 아니라 보완이다. 소득연동 학자금·돌봄 지원·최저 소득 보장이 균형추 역할을 한다. 정교한 제도 설계는 가족의 헌신을 사회 전체의 복원력으로 전환시킨다. 미흡한 설계는 그 헌신을 지속 가능한 체계로 연결하지 못한다.
통계 속 사람의 얼굴
공장 라인과 지방 대학 강의실에서 일하는 70대의 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그 손은 자녀 세대의 불안을 대신 짊어진 세대의 선택이며, 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들이 하루를 더 일하는 이유는 생계만이 아니다. 익숙한 일터를 통해 일상을 유지하고, 가정의 안정을 지키려는 결정이다. 이런 선택이 모여 고령층 근로율을 지탱하고, 세대 간 소득 균형을 유지한다.
가족은 여전히 경제의 기초 안전망이다. 이제 국가는 그 역할을 제도 속에서 함께 나눠야 한다. 제도가 정교할수록 개인의 헌신은 사회의 복원력으로 바뀐다. 한 세대의 인내가 다음 세대의 안정으로 이어지는 구조, 그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반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Families Become a Nation’s Shock Absorber: Intergenerational Risk-Sharing in an Aging World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