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없는 시대’ 성큼, 거듭된 단기 처방에 방향 잃은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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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3만4천 명 돌파
공공·민간 임대 수요 대응력 한계
‘전세 이후’ 대비책 마련 필요성 ↑

부동산 임대 시장 내 전세 기피 현상이 심화한 가운데 사기 피해 사례마저 누적되면서 제도의 기반 또한 흔들리는 모습이다. 정부는 규제 강화를 통해 시장 안정화를 도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서울시는 완화 기조를 내세우며 시장의 혼선만 부추기는 실정이다. 계속되는 공급 축소로 임대시장 공백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공공·민간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한 장기 임대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간 성과에 급급한 일시 대책이 아닌, 중장기 ‘수요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세 불안→월세 전환’ 흐름 가속
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국토부 산하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는 지난달 두 차례의 전체회의를 열어 503건의 피해를 전세사기 피해자로 최종 가결했다. 이에 따라 누적 피해자는 3만4,481건에 이르렀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경·공매 대행 △조세채권 안분 △긴급복지 지원 △저소득층 신용대출 △분할상환 및 신용정보 등록 유예 등 조치가 이뤄진다. 정부는 현재까지 1,058건의 경·공매 유예 협조 요청을 비롯해 총 4만8,798건의 실질적 조치를 시행했다. 다만 이 같은 지원책은 사후적 대응에 머물러 있어 전세 제도의 신뢰를 회복하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임대차 시장 전반에서 감지되는 전세 기피 현상이 이 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피해 사례가 누적될수록 세입자들은 전세 계약을 기피하고, 임대인들은 보증금 반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월세 전환을 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서울 전세 매물은 6월 말과 비교해 4.6% 줄어든 2만3,677건으로 집계됐다. 성북구(-39.8%)와 중랑구(-38.5%), 관악구(-30.4%) 등 중저가 밀집 지역 중심으로 매물이 빠르게 줄어든 결과다. KB부동산이 공개한 9월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2021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 154.2를 나타냈다. 전세 공급 부족 정도를 나타내는 해당 지표는 100을 초과할수록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가격은 연초 대비 1.87% 상승하며 실수요자들의 신규 계약 의지를 떨어뜨렸다. 여기에 정부의 잇따른 대출 규제와 신규 공급 부족 등이 겹치면서 전세를 ‘고위험 상품’으로 인식하는 시장 참여자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일부 세입자는 전세가 폭등에 매수로 전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면서 수요 왜곡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전세사기 피해는 개별 사건을 넘어 제도 전반의 신뢰 위기로 번지고 있으며, 근본적인 제도 개편 없이는 시장 회복이 어렵다는 인식 또한 확고해지는 양상이다.

민간 임대 5년 새 80% 공급 감소
이에 대한 해법으로는 공공임대 및 민간임대 활성화가 거론되지만, 실제 공급은 갈수록 줄어드는 형국이다. 국토부 통계 기준 2018년 33만4,685가구였던 민간 임대주택 공급은 2019년 26만5,006가구, 2020년 28만853가구로 잠시 반등했으나, 2023년에는 6만6,323가구로 급감했다. 이는 불과 5년 사이 26만8,362가구가 줄어든 수치다. 전문가들은 분양 시장 침체와 건설비 상승, 정부 규제 강화 등이 맞물리면서 민간 임대 사업 자체의 수익성이 낮아진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그럼에도 실수요자 사이에서는 민간임대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전세사기 급증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전세 대신 안정적 임대’로의 인식 전환이 가속한 것이다. 카카오페이손해보험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4명 이상은 “주변에서 전세사기 피해 사례를 접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20·30세대가 절반을 차지했다. 이는 젊은 세대일수록 전세제도를 신뢰하지 못할 가능성을 시사하며, 보다 투명한 계약 구조와 보증 체계를 갖춘 민간임대로의 유인 또한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는 공공부문 임대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국토부는 내년 공공주택 공급 예산을 올해보다 6조3,000억원 늘려 총 22조8,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특히 주택도시기금의 임대주택 융자와 출자액은 각각 14조4,584억원, 8조3,274억원으로 책정돼 올해 대비 15.9%, 182.4% 증가했으며, 다가구 매입임대 융자액 또한 6조3,788억원으로 109.5% 늘었다. 다가구 매입임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기관이 빌라를 사들여 시세보다 낮게 공급하는 유형의 확대 정책으로, 한시적 매입에 그쳤던 공공임대의 규모를 대폭 확장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나아가 정부는 공공임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민간과의 협업 구조도 모색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LH가 독점하던 공공임대 시장에 민간사업자를 참여시켜 ‘특화형 공공 임대주택’을 연 8,000가구씩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청년·고령자·1인가구 등 주거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맞춤형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로, 이재명 정부 임기 내 3만 가구 이상 공급을 목표로 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민간이 직접 기획과 운영에 참여하도록 해 입주자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겠다”고 설명했다.
장기 플랜 없는 임대정책의 한계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세 이후를 대비한 장기 임대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누적된 전세사기 피해와 시장 전반의 기피 현상이 맞물리면서 전세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는 만큼,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공급 불균형이 더 큰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다. 여기에 최근에는 정부가 규제 강화 중심의 접근을 취하는 반면, 서울시는 민간 활성화에 방점을 찍는 등 상반된 정책 기조를 보이면서 혼선을 키운다는 지적 또한 쏟아진다. 정책 불일치가 장기화하면, 전세제도 붕괴에 따른 임대시장 불안 또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란 우려에서다.
더 큰 문제는 공급부족 현상이 단기간 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토부의 ‘2025년 8월 주택통계’에서 전국 주택 착공 건수는 14만851호로 전년 동기 대비 19.1% 감소했고, 비아파트 착공은 2만862호로 9% 줄었다. 이는 전세사기 여파로 빌라 수요가 급감한 가운데 전세보증 가입 기준 강화와 대출 한도 축소 등이 맞물린 결과다. 정부가 연이은 부동산 대책을 통해 수도권 임대사업자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사실상 0%로 묶으면서 신규 임대공급을 차단하는 효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울시는 규제 완화와 금융 지원을 통해 민간임대 회복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민간임대 규제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오피스텔 인허가 절차 단축 △민간임대 부동산투자회사(리츠·REITs) 대출이자 지원 △출자 확대 등 공급을 확대 방안을 제시했다. 상대적으로 단기간 내 공급이 가능한 비아파트를 집중 지원해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돕는다는 구상이다. 이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지만, 중앙정부와의 마찰이 계속될 경우 임대사업자들의 혼란만 키울 수 있다는 비판은 떨치지 못한다.
정부 주도의 공공임대 확대 정책도 속속 그 한계가 드러난다. 현재 LH가 운영 중인 공공 임대주택 18만1,938가구 중 2.8%에 해당하는 5,154가구가 공실인데, 이 중 18.8%가 충북 지역에 집중됐다. 이는 공공임대가 단순 물량 확대에 치중하느라 지역별 입지와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양지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은 “지금은 수요 맞춤형 공급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하며 “청년·신혼부부 중심의 ‘순환형 단기임대’, 육아·자립 연계형 ‘신혼부부 맞춤형 임대’ 등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