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 재편됐다" 독일 중심으로 방위력 강화 나선 EU, 反러시아 행보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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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러-우 전쟁 계기로 자체 방위 체계 구축에 속도 군사력 강화 앞장서는 독일, 프랑스·영국과 핵 협력 전선까지 구축 역내 국가 연대·요충지 지원 등 연합 차원 움직임도 이어져

유럽연합(EU)이 독자적인 방위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 방위 체계 내 미국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축소된 가운데, 국방·안보 분야 투자를 확대하며 본격적으로 안보 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메리츠 총리가 이끄는 독일을 중심으로 역내 각국의 협력 구도 역시 눈에 띄게 공고해지는 추세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17일(현지시각) 현지 매체 아나돌루통신에 따르면, 메르츠 총리는 이날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 주최 기업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국제 정치·경제 권력의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며 "서방이 지난 80년간 경험한 질서가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수동적 대상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미래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르츠 총리가 이 같은 주장을 내놓은 배경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변한 국제 정세가 있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했고, 올해도 국방·안보 분야에 국가 전체 지출의 41%를 쏟아부을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유럽 방위 부담을 유럽으로 전가하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 가능성을 거론하며 유럽에 자체 방위력 확대를 요구 중이다.
이에 EU는 본격적으로 방위 체계 재정립에 착수했다. 지난달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입수한 EU의 '방위 준비태세 로드맵 2030(Defence Readiness Roadmap 2030)' 초안에는 "유럽은 2030년까지 적대국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어떠한 침략에도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유럽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적시됐다. EU는 이 같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무기 공동 구매 대출 프로그램 △유럽 방위산업 프로그램(EDIP) △유럽방위기금(EDF) △2027년 채택될 차기 다년도 예산(MFF) 등에 최대 8,000억 유로(약 1,320조원)를 동원할 계획이다.
역내 협력 가속화, 독일 선두에 서
현시점 EU의 방위력 강화 흐름을 이끄는 국가는 독일이다. 메르츠 총리는 EU 최대 경제국이자 최다 인구 국가인 독일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독일은 2030년까지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3.5% 수준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투입 비용을 지난해 520억 유로(약 82조원)에서 올해 624억 유로(약 98조4,000억원), 2029년 1,529억 유로(약 240조9,000억원)로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독일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3.5%까지 뛰는 것은 동서 냉전 시절인 1975년 이후 처음이다. 증액 속도 역시 프랑스, 영국 등 여타 유럽 주요국을 훌쩍 뛰어넘는다.
독일과 EU 주요국들의 방위 협력 구도 역시 뚜렷해지는 추세다. 지난 5월 메르츠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 파리에서 회담을 가진 뒤, 프랑스 르피가로에 공동기고문을 투고해 "양국 간 국방안보이사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국가 안보·방위 전략, 우크라이나 지원 조정, 전략적 국방 목표, 향후 국가 전략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양국 간의 군사 협력을 증진하겠다며 핵무장 공유 관련 논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간 메르츠 총리는 핵을 보유하지 않은 유럽 국가들이 핵보유국인 영국·프랑스와의 핵 공유를 통해 자체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7월에는 영국과 독일이 국방과 방위 산업, 이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양국이 독자적으로 맺은 첫 포괄적 국방·안보 협정이다. 협정에는 한 쪽이 무력 공격을 받을 시 군사적 수단을 포함해 상호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영국과 독일이 몸담은 나토의 집단방위 조항(제5조)과 중복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양국은 “유럽과 대서양 안보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더욱 구체화한 것”이라고 밝혔다.
핵무기 관련 협력 가능성도 시사됐다. 양국은 핵 억지력 등 안보 이슈 전반에 대해 면밀한 대화를 지속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이 독일과의 협정 체결에 앞서 프랑스와도 핵 억지 협력 확대에 합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유럽의 3대 주요 국가(E3)로 불리는 영국·독일·프랑스가 핵무기와 관련해 ‘3각 연대’를 구축하게 된 셈이다.

EU의 反러시아 연대
EU가 연합 차원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9월 폴란드가 자국 영공에 침입한 러시아 드론을 격추했을 때, EU는 해당 사태의 원인을 러시아의 '도발'로 규정하며 폴란드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명했다. 당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10기가 넘는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 그리고 유럽 영공을 무모하며 전례 없는 방식으로 침범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EU는 폴란드와 전적으로 연대하고 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메시지는 명백하며 우리의 대응도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내 각국도 잇달아 폴란드와 연대했다. 메르츠 총리는 성명에서 "러시아가 나토와 EU 회원국인 국가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고 비난했고,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가 이런 무모한 행동을 중단하길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러시아의 침략과 도발은 유럽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덴마크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그리고 모든 나토 동맹과 연대한다"고 밝혔다. 친러 성향인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마저 "최근의 드론 사건에 대해 폴란드와 전적으로 연대한다"며 "폴란드의 영토적 완전성을 침해하는 것은 용납 불가"라고 말했다.
지난 8월에는 독일·프랑스·폴란드 정상이 몰도바를 찾아 옛 소련에서 독립한 기념일을 축하하고 몰도바 친EU 세력인 '행동과 연대당(PAS)'의 선거 운동을 돕기도 했다. 인구가 240만 명에 불과한 소국인 몰도바는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지정학적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 지역을 차지한 뒤 몰도바 동부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이어지는 육로를 확보하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할 경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흑해 보급선을 차단하고, 루마니아 등 EU의 동부 전선을 압박할 수 있게 된다.
EU 입장에서도 몰도바는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국가 중 하나다. 러시아의 서진 구상을 저지하고, 우크라이나산 곡물·자원·에너지 등 물류를 우회 수입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러시아와 EU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며 몰도바 내에서는 친EU파와 친러시아파 간 정치적 갈등이 격화하는 중이다. 지난 9월 치러진 총선에서는 마이아 산두 대통령이 이끈 PAS가 친러 야권 연합 ‘애국 블록(BEP)’을 큰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