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 150조 펀드가 반복할 ‘관치의 그림자’에 기대보단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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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총동원 체제 예고
‘국민 주머니’ 여는 방식의 모순
투자 효율성 논쟁 재점화 조짐

정부가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내세워 미래 전략 산업 육성에 나섰지만, 시장의 평가는 냉담하다. 자금의 절반을 국민과 연기금, 시중은행에서 끌어오는 구조 속에서 금융권의 출자 부담이 가중되고, 실제 운용은 국책 인프라 사업 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큰 탓이다. 나아가 과거 뉴딜펀드나 코퍼레이트파트너십펀드 사례처럼 공적 자금이 민간 자본의 투자 판단을 잠식하는 문제와 규제·인력·거버넌스 공백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전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커지는 모습이다.
국민참여 뉴딜펀드 실패 상흔
17일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서울 산업은행 별관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 사무국 현판식 및 업무협약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 위원장은 다음 달 10일로 예정된 국민성장펀드 출범과 관련해 “‘단군이래 최대펀드’로서 자금의 물꼬를 바꾸고 혁신역량을 모아 우리 첨단산업의 대변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권에 대한 시장과 국민의 평가가 냉담한 만큼 글로벌 패권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금융권, 산업계, 지역사회 및 국민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이는 전례 없는 규모와 조직적 협업 체제를 통해 정책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앞서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150조원 규모의 초대형 정책금융 플랫폼으로 설계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핵심은 생산적 금융 전환 기조 아래 반도체·인공지능(AI)·바이오·첨단전략산업을 중심으로 국가 차원의 대규모 자본공급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다수의 금융지주가 프로젝트별 공동투자에 참여하고,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전문인력 파견·정보 교류·투자 검토 체계를 일원화하는 방식으로 기존 정책펀드와는 다른 ‘통합 집행 모델’을 만들겠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시장은 다소 차갑게 반응하는 분위기다. 불과 5년 전 거의 동일한 취지에서 추진됐던 ‘국민참여 뉴딜펀드’ 실패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탓이다. 국민참여 뉴딜펀드는 “국민 재테크 상품”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평균 수익률이 2%대에 그쳤는데, 재정이 선순위로 손실을 떠안는 구조를 고려하면 실제 체감 성과는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당시 정부가 내세웠던 미래산업 육성 명분 또한 지금 정부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같은 유사성을 이유로 시장은 이번 펀드가 이름만 바뀐 채 정책목표 중심 설계, 위험의 공적 이전, 사업 선택의 자율성 부족 같은 문제를 반복할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주를 이룬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제기한 ‘중복투자’ 경고 또한 불신 요인이다. AI 혁신펀드, 케이·바이오·백신펀드, 중소기업 모태펀드 등 기존 정책펀드와 투자 영역이 상당 부분 겹치는 만큼 민간 출자 수요가 분산되고, 각 분야에서 성과 점검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위험가중자산 여력이 한정된 시중은행 입장에서도 대규모 출자 의무가 기존 벤처캐피털 펀드 투자 여력을 잠식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금융회사들이 정부가 정한 전략산업 중심 투자에 사실상 묶이게 되면, 민간 시장의 자율적 판단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커지는 실정이다.
운용 방식·규제 완화 범위 안갯속
정부는 국민성장펀드 재원 가운데 75조원을 국민·연기금·금융사·기업 등으로부터 직접 조달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정부가 이미 728조원 규모의 초대형 예산안을 편성하고도 재정 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판단 아래 부족한 자금을 민간 부문에서 조달하겠다는 구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실제 조달 순서는 국민과 연기금, 금융권에서 자금이 먼저 끌려오는 형태에 가깝다”는 평가와 함께 “정부가 강조하는 ‘국민 참여’ 역시 실질적인 선택이라기보다 재정 여력을 보완하기 위한 필요에 가까운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실질적 부담은 연기금과 금융권, 특히 시중은행으로 집중되는 형국이다. 정부는 금융지주 전략책임자들을 소집해 국민성장펀드 참여 방안을 신속히 마련하라고 독려 중이지만, 은행들은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100조원 규모로 거론되던 펀드가 돌연 150조원으로 확대됐고, 구체적인 운용 방식이나 규제 완화 범위도 확정되지 않아 각 은행은 대응 강도를 정하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에 처했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성장펀드를 “전당포식 금융을 끊어내기 위한 전환점”으로 규정하며 금융권의 태도 변화를 강하게 압박하고 나섰다. 그는 최근 국민보고대회에서 “반도체·바이오·에너지 등 미래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과감한 투자를 끌어내겠다”고 천명하며 “은행이 담보 위주 대출과 안정적 이자수익에 매달리는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못박았다. 은행이 거둔 수익이 스스로의 역량만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아닌, 국가 공동체가 부여한 화폐 발행·중개 권한에 기반한다는 점을 재차 상기시키려는 의도다. 나아가 국민성장펀드 참여 수준이 금융권의 ‘공공성’ 평가 잣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신호 또한 노골적으로 던졌다.
당시 행사에는 다수의 기업 관계자도 참석했다.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2000년에 사업을 시작한 뒤 2009년까지는 자금을 대주겠다는 곳이 없었지만, 2009년 싱가포르 정부가 8,000억원을 투자했고 이를 계기로 JP모건이 5,000억원을 추가로 집행해 총 1조3,000억원을 유치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정도 규모로 투자를 받으면 실패하는 기업이 거의 없고, 결국 모두 성공한다”며 자본 공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서 회장의 발언은 금융권이 위험 회피 성향을 줄이고, 성장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실어줄 경우 새로운 글로벌 기업이 나올 수 있다는 정부 논리를 뒷받침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

“정책목표 달성용 자금” 우려도
문제는 서 회장이 여러 투자처로부터 확보한 대규모 자금을 기반으로 셀트리온그룹의 성장 신화를 만들던 2010년대와 현재의 시장 환경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과거 시장은 풍부한 유동성과 상대적으로 완만한 금리 여건 속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뒷받침할 자금 조달 창구가 지금보다 넓게 열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금리발 펀딩 한파는 물론 금융사별 자본 비율 등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 무수히 많아졌다. 산업계 역시 규제 강화와 핵심 인력 부족 등 문제가 누적된 상태다. 이 때문에 단순히 거액 자금을 쏟아붓는 방식만으로는 혁신 성과를 재현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주를 이룬다.
과거 정책펀드의 궤적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일례로 기업 구조조정과 인수합병 활성화를 명분으로 조성된 코퍼레이트파트너십펀드는 운용 과정에서 대기업 숙원 사업이나 계열사 지원에 자금이 흘러갔다는 비판이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또 성장사다리펀드는 벤처 생태계에 일정 부분 모험자본을 공급했음에도 위험이 큰 초기 단계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기 단계에 집중하며 민간 벤처캐피털과 경쟁하는 구도를 형성해 비난을 산 바 있다. 공적 자금이 민간 자본의 영역을 보완하기보다 구축 효과를 유발하며 자생력을 훼손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셈이다.
국민성장펀드의 초기 구체 사례로 언급되는 ‘에너지 고속도로’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해당 프로젝트는 서해안에서 시작해 남해와 동해를 잇는 U자형 해상풍력 전력망을 구축하고, 고압직류송전(HVDC) 방식으로 주요 산업단지와 연결하는 것을 골자로 내세웠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가 이미 방향이 정해진 국책 인프라 사업에 장기·저리 정책자금을 공급하는 통로로 기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아가 입지 갈등과 지자체 참여 부담 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 투입이 이뤄질 경우, 투자 효율성 논쟁이 재점화할 가능성 또한 높게 점쳤다.
이러한 이유로 시장 참여자들의 평가는 국민성장펀드 역시 기존 정책금융 기관의 역할을 키우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는 회의론으로 좁혀진다.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돈만 공급하면 다 성공한다”는 낙관이 아니라, 150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어떠한 규제 개선과 인재 육성, 위험 분담 구조 개편과 결합해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계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기업인의 성공 스토리는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사에만 소비되고, 산업 현장의 재정적 한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