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정치 지형 재편, 좌파 피로감 위에 ‘대미 채널 복원’ 겹치며 우파 재부상
입력
수정
기존 경제 정책 효과 미미, 피로감 누적
대외 협력 다변화 기대감이 표심 자극
“좌파 정권 압박” 트럼프 대남미 개입설

비교적 최근까지 좌파의 연쇄 집권이 이어지던 중남미에서 생활비 압박, 치안 악화, 부패 논란이 겹치며 기존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빠르게 무너진 모습이다. 볼리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 경제 정상화 요구가 커진 가운데, 좌파 정권이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파 지도자들은 대미 관계 복원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관세 조정, 협력 회복, 치안 협력 확대 등 ‘즉각 확인 가능한 결과’를 강조했고, 이는 경제 안정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며 민심의 방향을 다시 바꾸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경제 정상화 세력’에 대한 수요↑
18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중남미에서는 경제난과 범죄 대응에 미흡한 좌파 정권에 대한 실망이 보수 세력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블루 타이드(blue tide)’ 현상이 확산 중이다. 지역별 상황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생활비 압박과 범죄 증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결과라는 평가다. 블룸버그는 “볼리비아에서는 연료·달러 부족 사태가 길어지며 경제 시스템 자체가 병목 현상을 겪고 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만성적인 경제 위기가 지속되며 실질 구매력이 장기간 침식된 상태”라고 진단하며 “각기 다른 국가별 사안이지만, 유권자들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칠레의 대선 구도는 이런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16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는 급진 좌파로 분류되는 히아네트 하라 후보가 26.85%로 1위를 차지했지만, 2~5위 후보가 모두 보수·우파 성향을 보이며 향후 결선 투표에서 우파 표 결집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4위 후보 요하네스 카이세르는 패배 연설에서 “정권 교체를 위해 (2위)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9) 후보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사실상 단일화 신호를 보냈다. 카스트 후보에 우파 표가 결집될 경우, 최대 70%에 달하는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경제 요인이 선거 결과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작용하는지는 아르헨티나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집권세력은 좌파 야당을 크게 앞지르며 후반기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했다. 아르헨티나는 수년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재정 불안에 시달려 왔는데, 기존 좌파 정권이 약속한 사회정책·복지 프로그램이 실질적 경기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이 때문에 유권자들은 경제 정상화를 이끌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기울었고, 종국에는 우파 쪽으로 표심이 이동하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볼리비아에서도 지난달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중도 우파 로드리고 파스 후보가 55% 득표로 승리하며 20년간 지속된 좌파 집권을 끝냈다. 이 같은 정치 변화의 핵심에는 생활고, 치안 악화,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짙게 작용했다. 특히 집권당 후보가 1차 투표에서 3%의 득표율에 그쳤다는 점은 기존 정권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흔들렸음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 외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등에서도 치안과 생활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경 우파 지도자들이 연이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실패의 책임이 좌파 세력에 있다는 문제 의식이 보수 성향 정치인들을 다시 정권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시장 친화·대미 우호 노선 부상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남미의 정치 흐름은 명백한 ‘좌파 재부상’이었다. 2018년 멕시코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당선되며 신호탄이 울렸고, 이어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에서 연달아 진보 세력 지도자가 당선되면서 이른바 제2의 ‘핑크 타이드’가 현실화했다. 당시 민심을 지탱한 핵심 요인은 기존 우파 정부가 해결하지 못했던 불평등과 복지 공백, 원주민 권리 문제를 좌파가 더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당선은 이러한 흐름의 결정타로 평가되는데, 그는 재임 기간 민간 자본 유치와 사회안전망 확충을 동시에 추진한 경험을 바탕으로 “좌파의 경제 운영도 충분히 안정적일 수 있다”는 신뢰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 대세론은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 지도자가 약속했던 정책들이 실질적인 경기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복지 확대와 환경·인권 중심의 의제는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제 전반의 체감 성과는 미미했다. 여기에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는 좌파 지도자들이 연루된 부패 의혹이 잇따라 터지면서 중도층의 실망 또한 누적됐다. 페루의 카스티요 전 대통령 탄핵,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뇌물 수수 의혹은 핑크 타이드의 신뢰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와 같은 불안정 국면에서 새롭게 부상한 의제는 미국과의 관계 변화다. 중남미 좌파 정부는 2010년대 후반부터 미국 대신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는 기조를 유지해 왔지만, 대외 협력의 기대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반면 우파 지도자들은 대미 관계 복원을 전면에 내세우며 외교 방향을 달리 잡았다.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과의 관세 조정, 무비자 여행 재개 추진 등 가시적 성과를 도출했고, 에콰도르의 노보아 대통령 역시 마약 카르텔 대응을 명분으로 미국과 군사·정보 협력을 확대하며 정권의 안정성을 높였다.
볼리비아 우파 후보들이 17년간 단절됐던 미국과의 외교 관계 복원을 공언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이 같은 외교적 전환이 기존 좌파와 확연히 다른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신호를 내보내 유권자들에게 ‘경제 회복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강화할 것이란 기대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남미 전반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단순한 정치적 선호 이동을 넘어 좌파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틈을 파고든 우파의 전략적 반등과 대외 관계 재정비가 맞물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군사 노선에 경제 지원 병행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남미 내정에 직접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집권 이후 ‘마약 차단’을 명분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좌파 정권을 정면으로 겨냥하며 군사적 압박 수위를 빠르게 높였다. 베네수엘라 주변 카리브해에 항공모함 전단을 전개하고, 코카인 생산·유통 경로로 지목된 선박을 격침하는 작전을 승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특히 미군이 ‘마약 운반선’으로 규정한 목표물을 공격하는 과정에서는 최소 4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이 전쟁을 조작하려 한다”며 공개 반발한 것은 이러한 긴장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은 콜롬비아로도 확장됐다. 그는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을 “마약 수괴”라고 부르며 좌파 정권의 마약 단속 의지를 문제 삼았고, 미 재무부는 페트로 대통령과 가족, 측근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아울러 콜롬비아를 약 30년 만에 ‘마약 퇴치 비협력국’으로 지정하며 사실상 페트로 정부를 향한 정치적 고립 조치에 나서기도 했다. 페트로 대통령이 뉴욕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집회에 참석해 미국을 비판한 뒤 비자를 취소당한 사건 역시 두 나라가 어떤 국면에 와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좌파 정부에 대해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우파 성향 정부에는 지원 신호를 명확하게 보냈다. 이른바 ‘돈로주의(Donroe Doctrine·트럼프식 먼로주의)’로 불리는 트럼프 대통령식 남미정책은 군사력(주먹)과 경제력(지원금)을 결합해 남미 전반의 정치 지형을 우파에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특징을 갖는다. 아르헨티나에 200억 달러(약 29조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약속하고, 추가로 200억 달러 민간 기금 조성을 추진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직접 “콜롬비아와 칠레 등에서 다가오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만큼 미국의 아르헨티나 지원은 경제 협력 이상의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문제는 이 같은 지원이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한다는 점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밀레이가 총선에서 승리하면 함께하겠지만, 패배하면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언한 직후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폭락하며 시장 불안을 키운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가 보여준 군사 압박과 경제적 보상 병행 전략은 남미 각국 유권자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미국과의 협력 방식에 따라 각국의 경제·치안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며, 이 선택은 정치 지형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우파의 부상과 맞물리며 중남미의 향후 경제 회복 경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