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위협, 스스로 대항해야" 美 압박 속 유럽 국방 예산 급증, 재정 위기 가속화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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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비 지출 급속도로 확대하는 유럽 국가들 재정 건전성 악화·성장 정체 속 경제 안보 '빨간불' 美 "유럽에 나토 유럽동맹 최고사령관직 넘기길 희망"

유럽 국가들이 국방비 지출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리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 방위 체계 내 미국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축소된 가운데, 국방·안보 분야 투자를 확대하며 본격적으로 안보 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자체 국방력 강화 압박을 가하고 있는 만큼, 이 같은 흐름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의 국방력 강화 움직임
23일(현지시각) CNN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잠재 공격에 대비해 국방 예산을 급증시키고 병력 확충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올해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유럽(러시아 포함) 국방비 지출은 6,930억 달러(1,020조원)로 2023년 대비 17% 증가했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규모다. 이 중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의 지출액은 4,540억 달러(약 668조원)로 전년 대비 약 20% 늘어났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도 지속되고 있다. 유럽방위청(EDA)은 지난 9월 발표한 연례 보고서에서 2025년 EU 국방비가 2024년(3,430억 유로)보다 10% 증가한 3,810억 유로(약 647조4,75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러시아 국방 예산의 3배, 중국의 1.5배를 넘어서는 규모이자,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당시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유럽은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기록적인 국방비를 쓰고 있으며,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이 이 같은 행보를 보이는 배경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변한 국제 정세가 자리한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했고, 올해도 국방·안보 분야에 국가 전체 지출의 41%를 쏟아부을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유럽 방위 부담을 유럽으로 전가하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면서 유럽 각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NATO 탈퇴 가능성을 거론하며 유럽에 자체 방위력 확대를 요구 중이다.

위태로운 유럽 재정 상황
문제는 이 같은 대규모 지출이 유럽의 경제 안보를 위협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유럽의 재정 여력은 이미 한계에 봉착한 상태다. 2024년 4분기 국가부채는 유로존 기준 GDP의 87.4%, EU 전체 기준 80.7%에 달한다. 특히 그리스(153.6%), 이탈리아(135.3%), 프랑스(113%)는 심각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추가 조치가 없을 경우 2040년 유럽의 평균 부채비율이 130%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한다. 향후 25년간 사회보장·국방·기후 대응에 GDP의 5.75%에 해당하는 추가 지출이 필요한데,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이 같은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미래 성장 전망 역시 어둡다. 유럽이 첨단 산업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탓이다. 2024년 글로벌 인공지능(AI) 벤처캐피털(VC) 투자에서 유럽의 몫은 단 6%에 불과했고, 미국은 61%를 차지했다. 맥킨지 앤 컴퍼니와 브뤼겔 연구소에 따르면 유럽의 연구개발(R&D) 집약도는 GDP의 2.1%로 미국(3.45%), 한국(4.96%)에 크게 뒤진다.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8~12%에 머물러 있고, 배터리 생산의 85%는 중국이 장악했다. 맥킨지는 유럽이 기술 경쟁력 확보에 실패할 경우 2030년까지 연간 500억~1조 유로(약 85조~1,700조원) 규모의 가치를 잃게 될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가운데 국방비 확대에 대한 지지 여론도 점차 식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공개된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7%가 자국의 국방비 증액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이는 전년도 74%에서 7%P 하락한 수치다. 재정 압박과 물가 상승이 국민 여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구체적으로 폴란드·덴마크·핀란드 등 러시아와 인접하거나 군사적 경계가 높은 국가에서는 여전히 80% 이상이 국방비 증액에 찬성했지만,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 남유럽권에서는 찬성률이 50%대 중반으로 떨어졌다.
美, 재차 유럽에 '국방 자립' 종용
이 같은 리스크에도 불구, 유럽의 국방비 증액 행보는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관련 압박이 거세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매슈 휘태커 NATO 주재 미국 대사는 최근 베를린 안보 회의에서 NATO 유럽동맹 최고사령관직(SACEUR)을 장기적으로는 유럽, 특히 독일에 넘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SACEUR은 NATO의 모든 군사작전을 총괄하는 핵심 직책으로, 창설 이후 75년 동안 미군 장성이 독점적으로 맡아 온 자리다.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 지휘권을 유럽 국가에 이양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간헐적으로 제기됐지만, 최근 미국이 알렉서스 그린케위치 중장을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하면서 관련 논의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휘태커 대사가 재차 이양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휘태커 대사가 독일을 콕 집어 지목한 것은 독일이 유럽의 국방 강화를 주도하는 국가기 때문이다. 독일은 작년 무기 구입에 500억 유로(약 82조원)를 쏟아부은 데 이어 3,770유로(약 621조원)를 추가 지출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2011년 폐지한 징병제를 되살리는 병역 제도 개편도 논의 중이다. 현재 18만2,000명인 연방군 병력을 2035년 26만 명으로 늘린다는 것이 정부의 목표다. 국방비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도 이미 마련됐다. 독일은 지난 3월 기본법(헌법)을 개정해 국방비에 부채 한도 예외를 적용하고, 사실상 무제한으로 관련 예산을 쓸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휘태커 대사의 발언에 유럽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NATO 독일 대표 볼프강 빈 장군은 “독일이 더 많은 책임을 맡을 의지는 있지만, SACEUR는 미국의 중심적 역할”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에 휘태커 대사는 이후 X(옛 트위터)를 통해 "내 메시지는 동맹국들이 헤이그 정상회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국방에 투자하고 산업 협력을 강화하고 회복탄력성을 구축하며 결속력을 보호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