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中 기밀 제공하겠다" 스파이 논란 휩싸인 ASML, 장기화하는 美-中 패권 경쟁 속 '홍역'
입력
수정
블룸버그 저널리스트 출간 서적 "ASML, 美에 中 공장 내부 정보 제공 제안" 노광장비 기술력 제고에 난항 겪는 中, ASML 장비 역설계 시도하다 파손도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들, 美 압박 속에서도 中 매출 무시 못 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미국 측에 중국 고객사의 내부 기밀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 정부가 ASML의 중국 사업에 제약을 가하려 하자, ASML이 현지 사업 기반을 지키기 위해 정보 제공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전언이다. ASML은 이 같은 주장을 전면 부인했으나, 논란 속 부각된 중국과 ASML의 '상호 의존 관계'에 대한 시장 관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새다.
ASML, 스파이 논란 전면 부인
2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IT 전문 매체 톰스하드웨어 등 외신은 블룸버그 출신 저널리스트 디데릭 바질(Diederik Baazil)과 카간 코크(Cagan Koc)가 집필한 신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계(De belangrijkste machine ter wereld)'의 내용을 인용해 ASML의 '스파이' 논란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해당 서적은 2023년 미국과 네덜란드가 중국 수출 제한을 논의하던 시기 벌어진 일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미국과 네덜란드는 ASML의 중국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협정을 체결했으며, 해당 협정은 2024년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제재가 발효되기 전인 과도기, 즉 2023년 1월부터 9월 사이의 기간에 발생했다. 해당 기간 양국은 이른바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을 맺었다. 이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은 아니었으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외교적 약속이었다. 협정의 핵심은 ASML이 기존 계약에 따라 인도가 불가피한 소수의 DUV 장비만을 제한적으로 선적하고, 그 외의 추가적인 판매는 자발적으로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ASML은 이 신사협정을 정면으로 위반, 합의된 기간 동안 약속된 물량을 초과하는 수준의 DUV 장비를 중국에 판매했다.
이에 미국 측은 단순 ASML의 대중국 장비 판매를 규제하는 것을 넘어, 이미 중국 내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에 설치돼 가동 중인 ASML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 서비스까지 전면 차단하는 초강수를 두려 했다. 장비 공급사가 서비스를 중단하면 수천억원에 달하는 노광 장비는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상 ASML의 중국 사업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조치인 셈이다. 서적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피터 베닝크 당시 ASML 최고경영자(CEO)가 꺼내 든 카드가 정보 제공이었다고 기술했다.
저자는 “(베닝크 당시 CEO가) 중국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에 중국 공장 내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례 없는 제안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당 서적이 발간된 이후 ASML은 성명을 통해 “해당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책에서 언급된 ‘정부를 대신한 행동’ 제안은 사실과 다르며, 당사는 관련 법규와 수출 통제 규정을 준수하며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中, ASML 모방해 기술 발전 시도
시장에서는 이번 논란이 중국과 ASML의 '상호 의존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지속되는 미국의 수출 규제로 인해 노광 장비 제조 분야에서 아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미국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지난 8월 말 발표한 보고서에서 “중국의 노광 장비 기술은 65㎚(나노미터·10억분의 1m) 정도에 머무르고 있으며, 서방과는 최소 20년 격차가 난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지금까지 공개한 기술은 어디까지나 실험실 수준이며, 실제 제조 장비를 만드는 단계까지 기술이 발전하려면 최소 20년이 더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화웨이의 창업자이자 CEO인 런정페이도 지난 6월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우리의 단일 칩 생산 기술은 미국에 한 세대 뒤처져 있다”고 실토했다. 미국과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업계 최선두 주자인 ASML의 노광 장비 확보가 사실상 필수적인 셈이다.
최근에는 중국이 기술력 확보를 위해 ASML의 반도체 장비를 자체 복제(역설계)하려다 실패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국제관계·국제정치 전문 매체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의 브랜던 와이커트 국가 안보 수석 편집자는 지난달 19일(이하 현지시간) X(구 트위터)를 통해 "중국이 칩 생산에 사용하던 ASML DUV 장비가 최근 고장 나 네덜란드 회사(ASML)에 수리를 요청했다"며 "파견된 ASML 기술자들은 중국 측이 장비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파손한 것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이어 "중국 기술자들이 구형 DUV 시스템을 분해한 것은 최신 장비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우회할 방법을 찾기 위함"이라며 "구형 모델을 분해하고 재조립을 시도해 자체적으로 고급 버전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길 희망했지만, 여전히 알아내지 못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해당 사건이 중국 반도체 장비 기술력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한 시장 전문가는 "리소그래피 장비는 나노 단위의 정밀도가 필요한 만큼 단순 분해만으로는 구조를 재현하기 어렵고, 오히려 장비를 손상시킬 위험이 크다"며 "단순히 구조를 모방한다고 해서 동등한 성능이 나온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고 짚었다. 이어 "하지만 미국의 수출 규제가 계속되는 한 중국의 ASML 장비 역설계 시도 역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반도체 장비 시장 '핵심 축' 된 中
ASML 역시 중국 시장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5일 ASML이 발표한 3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해당 기간 ASML의 신규 수주액은 54억 유로(약 7조9,000억원), 매출은 75억 유로(약 12조7,300억원)로 집계됐다. 3분기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2%에 달했다. 이는 지난 분기(27%) 대비 15%P 증가한 수치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속에서도 중국 내 반도체 장비 수요가 여전히 견조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대중국 수출을 통해 대규모 이익을 확보하는 반도체 장비 업체는 비단 ASML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미국 하원 중국특별위원회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 램리서치, KLA, ASML, 도쿄일렉트론 등 글로벌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2023년 한 해 동안 중국에 판매한 반도체 장비 규모는 380억 달러(약 5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2년(229억 달러) 대비 66% 늘어난 수치이자, 해당 기업 전체 매출의 39% 수준이다. 미 상무부가 2022년 10월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의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하고, 인공지능(AI)과 슈퍼컴퓨터용 고성능 반도체를 추가 금지 품목으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거래가 이뤄진 것이다. 이들 업체의 주요 고객이 된 중국 기업 중에는 스웨이슈어 테크놀로지, 선전 펑신슈 테크놀로지, 시엔 집적회로 등 미국에서 보안 우려 대상으로 꼽히는 기업도 다수 포함됐다. 이에 미국 하원 위원회는 특정 중국 칩 제조업체에 대한 제한적 금지 조치를 넘어 동맹국들의 대중국 반도체 제조 장비 판매를 더 광범위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부에서 추가 규제와 관련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역시 속속 맞불을 놓고 있다. 일례로 지난 8월 베이징 E-타운 반도체 테크놀로지(이하 이타운)는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제출한 서류를 통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를 상대로 베이징 지식재산권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서류에 따르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는 이타운의 완전 자회사인 미국의 맷슨 직원 2명을 채용했는데, 이들은 이타운이 독점권을 보유한 플라스마 기술에 대한 접근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는 이들 2명이 발명한 기술이라며 중국 국가지식재산권국에 특허를 신청했다. 이타운 측은 해당 특허에 이타운과 맷슨이 공동 소유한 영업 비밀이 담겼다고 주장, 법원에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자사의 영업비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관련 자료를 폐기하도록 명령해 달라고 요청하며 약 1억 위안(약 192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