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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평화안이 만든 착시? 푸틴은 ‘선 긋기’, 폴란드·한국은 ‘안보 재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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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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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수복 관련 강경 기조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美 방향성에 동의
미국 의존 안보 체제 불안감 확대

미국이 제시한 우크라이나 평화안이 예상 밖의 파문을 불러오고 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이미 상당 부분 조율을 마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는 해당 문건을 “질문 목록 수준”이라 평가절하하며 합의 문턱을 높였다. 이런 가운데 비공개 채널에서 전달된 내용들이 사실상 러시아의 요구에 가까웠다는 점까지 드러나면서 우방국들의 불안은 갈수록 커지는 형국이다. 이는 미국 중심 세계 질서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지면서 각국의 안보 전략 재정립을 부추길 전망이다. 

합의 ‘전제 조건’ 관철 의지

27일(이하 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정상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최근 공개한 28개 조항의 평화안에 대해 조약으로 보긴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해당 문건이 “초안조차 아닌 질문 목록 수준”이라고 말하며 미국이 내놓은 구상이 협상 틀을 제공하는 단계는 맞지만, 아직 합의의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푸틴 대통령은 해당 문건이 러시아가 요구하는 핵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간 러시아는 국제법적 영토로 간주하는 크림반도와 루한스크·도네츠크 등 돈바스 지역을 비롯해 우크라이나군이 통제 중인 일부 지역에서 철수가 이뤄져야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이 통제 지역에서 철수한다면, 우리도 전투를 멈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철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군사적 목표 달성을 이어가겠다는 기존 방침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이 제시한 평화안에 대한 합의를 위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가 다음 주 초 러시아를 방문할 계획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영토 인정 문제를 앞세워 협상의 문턱을 높이면서 유의미한 합의점을 도출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실정이다. 러시아 정치 분석가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소셜미디어(SNS) 엑스(X)에서 “현재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거나 핵심 요구를 철회할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하며 “그는 전황에 대해 어느 때보다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모든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 같은 흐름은 국제에너지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5일 시장에서는 미국이 제시한 평화안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전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국제유가가 1% 넘게 하락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1.51% 하락한 배럴당 57.95달러에 거래를 마쳤고, 런던 ICE선물거래소 2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도 1.4% 내린 배럴당 62.48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협상 진전을 인정하지 않는 기류가 드러나면서 단기 변동성은 다시 확대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렸다. 

조기 협의 정황에도 이중 메시지 발신

시장이 잠시나마 종전 가능성을 높게 점쳤던 데는 미국 측 평화안에 우크라이나가 상당 부분 동의했다는 신호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23일 공동성명을 통해 4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에는 “어떠한 향후 합의도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온전히 보장하며,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평화를 담보해야 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많은 변화가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문장은 외교적 수사를 유지했지만, 실제 조율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노력에 고마움을 전혀 표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협상 마지노선 시점을 미국의 추수감사절(27일)로 못 박으며 일정을 압박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공동 성명에서 “전쟁과 인명 피해를 끝내기 위한 미의 지속적이고 확고한 헌신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는 대목을 추가해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기도 했다.

평화 프레임워크 초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일대를 러시아에 양보하고 군 병력을 60만 명 수준으로 축소하는 방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식 가입 대신 미국과 유럽이 집단 방위 방식의 안전 보장 장치를 제공하는 구상 등이 담겼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평화안은) 26개 혹은 28개 항으로 구성됐는데, 남은 쟁점을 좁히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며 세부 조건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미국이 주도한 초안을 두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블룸버그통신이 입수한 미국과 러시아 협상 책임자들 사이의 통화는 양국의 물밑 대화가 훨씬 이른 시점부터 진행돼 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난달 14일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와 푸틴 대통령 특사인 유리 우샤코프가 나눈 5분가량의 통화에서 위트코프는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재량권을 받았다”고 강조하며 도네츠크주 전부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다른 지역과 영토를 맞바꾸는 방안을 포함한 평화안을 둘이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후 두 사람이 주고받은 구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까지 받아 28개 조항 문서 형태로 정리됐고,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통화 시점이 우크라이나의 공식 동의 이전이었다는 점은 보는 이들의 해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상당한 수준의 진전을 강조했음에도 러시아는 훨씬 앞선 시점부터 관련 문건을 전달받고 내용을 검토해 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인 탓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평화안을 “초안조차 아닌 질문 목록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한 것 역시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 환경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이처럼 공개·비공개 입장이 괴리된 푸틴 대통령의 전형적인 ‘이중 메시지’는 이번 평화 논의를 한층 더 복잡한 국면으로 끌고 가는 핵심 변수로 지목된다. 

미국 외교 신뢰도 흠집

국제사회도 이 같은 구도가 불러올 파급력에 주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한 평화안이 ‘미국이 더 이상 절대적 안보 보증자가 아닌 시대’의 신호로 읽혔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치 칼럼니스트 스튜어트 다월은 자국 공영 매체 TVP World 기고문에서 “(이번 평화안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기에 빠뜨리고 폴란드를 위협하는 계기”라고 규정하며 “폴란드는 더 이상 워싱턴 한 곳에만 기대 서 있을 수 없게 됐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새로운 세력권 질서를 논의하는 동안, 또 다른 당사국인 폴란드는 협의 테이블이 아니라 결과를 사후 통보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는 지적이다.

폴란드는 1989년 이후 이라크 파병 등으로 ‘충성스러운 동맹국’ 이미지를 쌓으며 미군 주둔과 미사일 방어체계를 얻었지만, 정작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둘러싼 핵심 협의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이른바 ‘E3’가 우크라이나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아 미국에 역제안을 건넨 것과 대비된다. 이 때문에 지난 30년간 미국의 군사력과 나토 확장을 전제로 안보 전략을 설계해 온 동유럽 최전방 국가 입장에서 이번 평화안은 ‘방 안’과 ‘방 밖’을 가르는 분기점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 전후 질서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불러일으킨다. 

한국 역시 베트남전과 이라크 재건,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을 통해 동맹 기여도를 입증해 왔지만, 미·중 경쟁과 북핵·대만해협 위기가 겹친 국면에서 향후 한반도 안보 구도가 어떻게 그려질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점검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CNN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집중 조명했다. 해당 보도는 “한국에선 북핵 능력이 고도화된 이후 미국이 자국 본토에 대한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서울을 지키겠느냐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동맹 차원의 억지력과 별개로 ‘최악의 경우를 스스로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분위기”라고 짚었다. 

이는 결국 “미국의 안보 우산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논의로 이어진다. 유럽에서 제기된 “단일 보증자의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이 동아시아에서도 더 이상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구체적인 전략 선택의 전제로 떠오르면서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의 움직임과 이번 평화안을 둘러싼 논란이 동맹국들로 하여금 미국을 절대적인 ‘보증인’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바뀌면 언제든 조건을 조정할 수 있는 행위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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