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8년의 신약 격차, 지식 이동을 설계한 국가가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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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는 연구 협력의 확대와 인력 기반 재편 시장 자금과 혁신 네트워크가 만든 기술 가속 구조 스필오버 설계가 좌우하는 신약 접근성의 속도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약이 세계 최초로 출시된 뒤 저소득 국가까지 도달하려면 평균 8년이 걸린다. 상위 중간소득 국가는 4.5년, 고소득 국가는 2.7년이면 도입된다. 시간 차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연구·데이터·기술은 국경을 빠르게 넘어간다. 보스턴에서 공개된 연구 초고가 방갈로르의 임상시험 설계를 바꾸고, 런던의 대학원생이 라고스의 분석 코드를 개선하는 장면도 흔하다. 지식은 국가 간 이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이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저소득 국가가 얻는 ‘공짜 점심’으로 볼 것인지, 각국의 연구 파이프라인을 확장하는 동력으로 볼 것인지 판단이 갈린다. 관점이 바뀌어야 정책도 달라진다. 8년의 간극을 줄이려면 지식 이동을 제약할지, 아니면 설계할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스필오버, 연구의 숨은 기반
바이오텍 지식 스필오버(spillover, 한 조직의 지식·기술이 다른 곳으로 확산돼 영향을 미치는 현상)가 중요한 이유는 연구가 보이지 않는 연결망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국가별 연구가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구조는 다르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학술 논문 중 27%가 다국적 공동저자에 의해 작성됐고, 이는 10년 전 22%에서 꾸준히 증가한 수치다.
미국은 이러한 의존도가 특히 크다. 2021년 미국 과학·공학 박사 인력의 약 45%가 해외 출생자였고, 2024/25년 미국 대학의 국제 학생 등록자는 약 120만 명에 이르렀다. 연구 인력 기반 자체가 국제 협력 위에서 구축된 셈이다. 이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협력이 줄어들면 국내 연구 역량도 즉시 약화된다. 스필오버는 외부로 빠져나가는 손실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기반이다.

주: 201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 신약 승인 증가세가 두드러지며, 미국 승인 속도를 넘어서는 흐름이 확인됐다.
시장 규모와 혁신 기반의 결합
시장 규모와 혁신 기반이 결합할수록 스필오버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제약 산업은 특히 시장 자금이 연구개발 속도를 좌우하는 대표적 분야다. 2024년 북미는 전 세계 제약 매출의 약 55%를 차지했고, 2019~2023년 출시된 의약품 매출의 약 67%가 미국에서 발생했다. 연구개발을 떠받치는 핵심 자금이 북미에 집중돼 있는 셈이다.
기술 혁신의 지리적 구조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2023년 전 세계 특허 부여의 약 70%가 아시아에서 나왔고, 그중 중국이 46%를 차지했다. 연구와 생산의 중심이 넓어질수록 국가 간 협력의 필요성도 커진다. 실제로 3만4,964개 특허 패밀리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국제 공동 발명 특허가 그렇지 않은 특허보다 향후 인용도가 평균 15%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스필오버는 단순한 지식 이동을 넘어 기술 발견(discovery)의 속도를 앞당기는 촉매로 작동한다. 시장 자금과 글로벌 연구망이 맞물리면서 각국의 연구 전략 역시 폐쇄형 모델에서 개방형 협력 모델로 이동하고 있다.

주: 미국의 임상시험 비중은 전 단계에서 완만하게 하락하며 R&D 활동의 글로벌 확산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약 접근성 격차가 던지는 정책 신호
시장과 연구 기반은 확대되고 있지만, 신약 접근성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저소득 국가는 신약 도입까지 평균 8년, 하위 중간소득 국가는 평균 7년을 기다린다. 초기 출시가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는 구조가 이어진 결과다. 이 지연은 글로벌 보건 체계 전반의 대표적 병목으로 남아 있다.
다만 이 간극을 선진국의 부담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식 확산 속도가 빨라질수록 병목이 더 빨리 해소된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공개 프로토콜, 공동 임상, 데이터 공유는 학습 시간을 단축해 ‘사용 가능 시점(time-to-use)’을 앞당기는 데 기여한다.
국제 학생의 역할도 이러한 흐름을 강화한다. 2024~25년 미국에서 국제 학생이 창출한 경제 효과는 약 430억 달러(약 6조원), 유지한 일자리는 35만6,000개에 달했다. 이 기반은 연구실 운영과 대학원 과정의 연속성을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다. 결국 접근성 격차를 줄이려면 지식 이동을 제한하는 정책이 아니라, 확산을 촉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신약이 더 빨리 도달하려면 지식이 더 멀리, 더 촘촘하게 퍼져야 한다.
공정한 보상 체계와 개방형 협력의 설계
결국 스필오버를 어떻게 다룰지가 핵심으로 떠오른다. 억제 중심 접근은 자국 연구와 산업의 속도까지 늦춘 사례가 수차례 확인됐다. 세금으로 만든 지식이 해외로 흘러가는 듯 보이더라도, 협력을 끊었을 때 발생하는 손실이 더 크게 나타난다는 점은 일관된 경험이다. 따라서 지식의 흐름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실행 장치가 뒤따라야 한다. 첫째, 공공 연구지원에는 ‘상호 접근’ 조항을 넣어 전임상 프로토콜을 활용하는 중·저소득국 연구팀이 후속 임상이나 생산 단계에 자동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미국과 유럽의 전환연구(바이오 제조·계산 신약설계 등)에는 ‘스필오버 성과 지표’를 도입해 외부 연구팀 활용도·재현 속도·공동 특허 수를 평가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셋째, 보증형 상금계약이나 성과연동 선구매약정(AMC) 같은 성과 기반 보상 체계를 적용하면 국경을 넘는 협력이 유지되면서도 납세자 이익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넷째, 연구 보안은 국적이 아닌 프로젝트 위험도를 중심으로 조정해 불필요한 협력 위축을 피해야 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스필오버는 줄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구 체계를 움직이는 핵심 자산이다. 이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국가별 연구 속도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스필오버를 설계하는 국가의 경쟁력
8년에 달하는 신약 대기 시간은 글로벌 보건 체계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국제 공동연구는 특허와 논문의 질을 끌어올렸고, 국제 인력은 연구실 운영의 지속성과 학습 속도를 높였다. 혁신을 보상하는 시장 역시 신약 개발의 주기를 단축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동해 왔다. 이런 흐름을 감안하면 주요 혁신국은 이제 스필오버를 비용이 아니라 전략적 투자로 보아야 한다.
원칙은 명확하다. 이번 달에 발표된 방법이 내년 임상시험 기간을 단축시킨다면 그 규칙은 유지돼야 한다. 반대로 연구 속도를 늦추거나 협력의 회전율을 떨어뜨린다면 즉시 개편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8년의 접근성 격차를 줄이는 국가는 지식 이동을 막는 곳이 아니다. 지식이 더 빠르고 넓게 확산되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국가다. 그 능력이 곧 신약 개발 속도와 보건 경쟁력을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Stop Calling It a Free Lunch: Why Biotech Spillovers Make Everyone Safer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