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 문턱까지 밀린 미국 경제, 유가 125달러가 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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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상승 물가·금리 경로에 직접 연결 경기 둔화→수요 감소, 유가에 다시 영향 관세 부담 등 기존 경기 둔화 요인 상존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약 14만9,000원)를 넘어선 가운데, 향후 125달러(약 18만7,000원) 수준에 도달할 경우엔 미국 경기침체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유가 상승이 경제 성장률을 낮추고, 소비를 위축시키는 경로를 통해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다. 시장에서도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금리 인상 등 변동성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한편, 기존에 누적된 관세 부담과 공급망 충격까지 겹치며 산업 전반의 충격도 본격화할 조짐을 보인다.
기업·정책 계획 수정 압력
24일(이하 현지시각) 미 경제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의 말을 인용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125달러에 다다르면, 미국 경기침체를 유발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날 잔디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무디스 글로벌 거시경제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를 전하며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이 여전히 고조된 상황에서 이 수준의 유가는 무리한 전망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이에 연초 배럴당 50~60달러 수준을 전제로 설정된 기업과 정책 계획이 수정 압력을 받는 구간에 진입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가 전망치 수정 폭은 이미 거시지표에 직접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달 들어 무디스는 올해 유가 예상치를 이란 전쟁 이전인 2월 대비 15달러(약 2만2,000원) 상향 조정했다. 이 조정만으로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0.2%p 낮아졌다. 여기에 4월 전망에서 기준 유가를 최소 10달러(약 1만4,900원) 추가 인상할 경우, 성장률은 0.15%p 더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도 뒤따랐다. 두 차례 조정이 누적되면, 전쟁 이전 대비 성장률 하방 압력이 최대 0.35%p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유가 상승의 여파는 공급 변수와 결합해 시장의 충격을 키운다. 미국과 이란 간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국제유가는 3월 들어서만 40%가량 급등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19달러(약 17만8,000원)를 돌파하며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주요 산유국의 생산 축소까지 겹치며 공급 불안이 확대됐다. 전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장 대비 3.11% 상승한 98.71달러(약 14만7,000원)에 장을 마쳤고, 브렌트유 역시 100달러 수준에서 등락을 반복했다.
시장은 유가 상승이 경제 전반으로 전이되는 경로에 주목했다. 무디스는 유가가 10달러 상승할 때마다 미국 가계가 연간 최대 450달러(약 67만원)의 추가 지출을 부담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부담은 다시 소비 둔화, 기업 매출 감소,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는 하강 경로를 형성한다. 잔디는 “미국이 현재 자국 소비에 맞먹는 수준의 원유를 생산하더라도, 유가 상승은 미국 소비자를 더 빠르고 가혹하게 타격한다”며 “고유가가 석유 생산자들의 투자 확대를 끌어내는 속도보다 소비자 지출이 얼어붙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가 급등이 만든 역설
유가 상승이 경기 둔화를 부추기는 가운데, 그 둔화가 다시 유가 상승을 제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역순환 조짐도 포착된다. 유가 상승의 비용 부담이 소비와 투자에 직접 반영되면 즉각 수요가 위축되고, 이는 다시 가격 상승을 지지하는 동력을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유가 국면이 지속될수록 상승 흐름을 스스로 제약하는 조건이 동시에 강화되는 구조다. 지난주 미국이 이란의 원유 기지 하르그섬을 공격한 이후 이란이 이에 대응해 아랍에미리트(UAE)의 원유 시설 푸라이자를 타격하면서 공급 불안이 확대된 상황에서 수요 둔화까지 겹치면, 시장의 기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미국 경제분석국(BEA)이 발표한 지난해 4분기 GDP 잠정치는 0.7%로, 기존 추정치 1.4% 대비 절반 수준을 나타냈다. 이는 유가 상승 이전부터 경기 둔화가 진행된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추가 부담으로 작용하는 구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금융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이 금리 상승 압력을 높일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중동 분쟁 이후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4.38%까지 올라 3주 만에 0.44%p 상승했고,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물 국채 금리 역시 같은 기간 0.5%p 상승해 3.9%대에 진입했다.
통화정책 기대도 급격히 조정됐다. 23일 시카고상업거래소(CME) 페드워치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오는 10월까지 기준금리를 0.25%p 이상 인상할 확률을 31%로 반영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역시 최근 통화정책회의에서 금리 인하 지침을 철회하며 긴축 기조를 유지했고, 시장에서는 이를 유동성 축소 신호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유가 상승 → 인플레이션 확대 → 금리 상승 → 경기 둔화 → 수요 감소 → 유가 하방 압력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가 현실화되는 흐름이다.
다만 이러한 영향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월가 강세론자인 야데니 리서치의 에드 야데니는 “현재 미국 경제는 2000년대 이전에 비해 GDP 단위당 훨씬 적은 에너지만을 필요로 한다”고 짚으며 유가 상승 충격이 과거보다 제한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에너지 지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만큼 소비 충격도 완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LPL파이낸셜의 제프리 로치 연구원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상승해 연준의 금리 인하가 지연될 것”이라며 “고유가가 장기화하면 통화정책 경로 자체가 달라질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경제 버팀목 사라질 위기
엇갈린 전망 속에서 비관론이 힘을 얻는 배경에는 미국 경제 전반에 누적된 관세 충격의 여파가 자리한다. 중동 전쟁과 유가 급등 이전부터 미국 경제는 성장 둔화 흐름이 누적된 상태였고, 여기에 관세 부담이 기업 비용과 소비 가격에 반영되며 체력 저하가 진행됐다. 실제로 무디스 경기지표 모델은 이란과의 군사 충돌 이전인 2월 기준 향후 12개월 내 미국의 경기침체 확률을 49%로 제시했다. 무디스는 “지난해 말 이후 노동시장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약해졌다”고 설명했다. 작금의 유가 상승은 이미 약화한 경제 위에 추가로 얹힌 변수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 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주효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며 관련 산업이 성장세를 유지함에 따라 투자와 고용 측면에서 일정 수준의 완충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공급망 충격으로 이 축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이 제약을 받으면서 제조 기반이 압박을 받은 탓이다. 일례로 반도체 웨이퍼를 식각하는 공정에 쓰이는 필수 원료 브롬의 가격은 전쟁 발발 이후 일주일간 12.28% 상승했다.
세계무역기구(WTO)도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AI 호황의 붕괴와 이로 인한 경기 침체를 경고하고 나섰다. 로버트 스타이거 WTO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진 ‘2026년 세계 무역 전망 보고서’ 관련 브리핑에서 “에너지 가격이 올해 내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AI 붐에 타격을 줄 것”이라며 “지난해 1~3분기 북미 지역 전체 투자 성장의 약 70%를 AI 관련 상품이 차지한 만큼, 해당 산업이 위축되면 글로벌 경기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 전망 역시 점차 하방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이달 초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미국 내 경제학자의 32%가 “12개월 이내 경기 침체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또 경기 침체 가능성이 50%를 넘으려면 원유 가격이 얼마나 상승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배럴당 90달러에서 200달러까지 다양한 답변이 나왔으며, 평균은 138달러(약 20만6,000원)였다. 연말 실질 GDP 성장률 전망치는 2.1%로 1월 전망치 2.2% 대비 0.1%포인트 하향 조정됐고, 소비자물가지수(CPI)는 2.9% 상승으로 기존 2.6% 전망보다 상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