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공룡과 손잡는 제약 거물들, ‘AI 바이오’ 혁신 경쟁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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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자로’에 밀린 ‘위고비’, 오픈AI 동맹으로 승부수 로슈·일라이 릴리 등은 엔비디아 슈퍼컴퓨터 가동 AI로 급변하는 제약 산업, 바이오-AI 융합 가속화

글로벌 제약사들이 자사 데이터와 인공지능(AI) 하이퍼스케일러의 기술을 결합하는 ‘AI 동맹’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는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오픈AI의 기술을 도입했고,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다수 AI 기업들과 제휴를 체결하며 모든 신약 프로젝트에 AI를 접목하고 있다. 신약 후보물질 탐색부터 임상 설계, 생산 공정 최적화에 이르기까지 AI 활용 범위가 빠르게 넓어지면서, 제약 산업 전반의 경쟁 구도 역시 기술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노보 노디스크, 오픈AI와 전략적 제휴 합의
14일(현지시간) 노보 노디스크는 오픈AI와 파트너십을 맺고 신약 후보물질 탐색, 생산 공정 최적화, 공급망 관리, 상업 운영 전반에 AI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우선 신약 연구·개발(R&D) 부문에 시범 적용하고 이후 생산과 유통 등 다른 분야에도 접목할 계획이며, 올 연말까지 자사의 모든 부문에 적용할 예정이다.
제휴가 성사됨에 따라 노보 노디스크는 첨단 AI 역량을 적용해 복잡한 데이터셋을 분석하고, 유망한 신약 후보물질들을 식별하고, 연구에서부터 실제로 신약이 환자들에게 공급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하는 등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기술 활용 윤리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양사는 엄격한 정보 보호 체계와 운영 관리 지침을 수립하고 모든 과정에 전문가 감독이 이뤄지도록 설계해 기술 오남용 방지에 나선다.
이날 마지아르 마이크 두스트다르 노보 노디스크 최고경영자(CEO)는 “수백만 명의 비만과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신약 물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또 “AI를 도입하면서 새롭고 효율적인 업무 패턴을 검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AI가 각종 산업과 생명공학 분야를 재편하기에 이르면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 보다 오랜 기간 동안 장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노보 노디스크 측과의 협력에 힘입어 과학적 발견, 보다 스마트한 글로벌 경영 수행, 환자 치료를 위한 미래의 재편 등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협력은 노보 노디스크가 지난해 엔비디아와 맺은 ‘AI 동맹’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6월경 노보 노디스크와 신약 개발을 위한 맞춤형 AI 모델 구축 협력을 맺은 바 있다. 양사는 덴마크 국가 슈퍼컴퓨터인 ‘게피온(Gefion)’을 중심으로 첨단 컴퓨팅 기술을 접목한 의약 R&D 혁신에 나선다. 양사 협력은 노보 노디스크가 덴마크의 AI 인프라 운영 기관 DCAI와 체결한 게피온 사용 계약에 따라, 엔비디아가 기술 파트너로 참여하는 구조다. 양사는 신약 후보 물질 도출, 약물 반응 예측, 단백질 구조 시뮬레이션 등에 AI를 접목한 연구 환경을 구축하고, 생성형 AI 및 에이전틱 AI 기반의 맞춤형 워크플로를 개발할 예정이다.

비만약 선두 흔들리자 전 사업에 AI 전면 도입
노보 노디스크가 AI 활용 전략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비만치료제 시장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다. 현재 노보 노디스크는 같은 GLP-1 계열의 비만치료제 ‘마운자로’를 개발한 일라이릴리에 시장 점유율을 일부 내준 상태다. 의약품 데이터 분석 플랫폼 BRP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 1월 마운자로의 시장 점유율은 70.3%를 기록한 반면, 위고비의 점유율은 21.1%로 급락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황은 반대였다. 당뇨·비만약 부문에서만큼은 노보 노디스크가 승기를 쥐고 있었다.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는 둘 다 1923년부터 당뇨 치료용 인슐린을 판매해 왔지만, 이 분야 전문성은 노보 노디스크가 강했다. 노보 노디스크는 1978년 세계 최초로 대장균을 이용해 인간 인슐린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1985년 세계 처음으로 펜 형태의 인슐린 주사제를 출시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또 2014년에는 GLP-1 유사체 기반의 비만 치료제로는 세계 최초로 ‘삭센다’를 출시했고, 2021년 위고비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작년 말부터다.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해 12월 차세대 비만 신약 ‘카그리세마’의 임상 결과를 발표했으나, 그 결과가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주가 급락을 겪었다. 여기에 위고비가 계속해서 공급 부족 사태를 겪는 상황에서 일라이 릴리가 개발한 먹는 비만약이 임상에서 앞서가면서 노보 노디스크의 입지가 흔들렸다. 위고비는 일주일에 한 번 주사를 놓는 방식인데 반해, 일라이 릴리가 개발 중인 먹는 비만약은 알약 형태로 하루 한 번 복용한다. 먹는 약이 투약 비용도 낮을 뿐 아니라 복용 편의성도 뛰어나 비만약 수요를 대폭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BMO 캐피털 마켓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라이 릴리가 당뇨병 비만약 시장에서 노보 노디스크를 곧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업계는 일라이 릴리가 먹는 비만약 개발에서 빠르고 우수한 임상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로 개방적인 AI 전략을 꼽는다. 일라이 릴리는 최근 2~3년 사이 AI 플랫폼을 활용한 신약 프로젝트 100여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오픈AI, 크리스탈 파이(XtalPi), 제네틱 립, 아톰와이즈 같은 외부 기업들과 잇따라 제휴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임상 설계부터 실시간 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후보 약물 도출한 데 이어 먹는 신약의 경로를 찾는 것까지 AI로 빠르고 정확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AI로 신약 개발 혁신, 2035년 33조 시장 열린다
이러한 바이오와 AI의 결합은 산업 전반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달 초 AI 기업 앤스로픽은 신약 개발 플랫폼을 만드는 스타트업 코이피션트 바이오를 4억 달러(약 5,900억원)에 인수했다. 코이피션트 바이오가 개발하는 플랫폼은 신약 기회 발굴, R&D 계획 수립, 임상 규제 전략 관리 등 신약 관련 전 과정을 AI로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앤스로픽이 신약 개발 관련 플랫폼 기업을 인수한 것은 생명과학 분야를 겨냥한 맞춤형 AI 도구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풀이된다.
글로벌제약사 로슈는 지난달 엔비디아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AI 공장'을 출범시켰다. AI 공장은 초대형 슈퍼컴퓨터 플랫폼을 뜻하는 것으로, 이번 계약으로 로슈는 엔비디아의 블랙웰 그래픽 처리장치(GPU)를 3,500개 이상 보유하게 됐다. 이는 현재까지 제약업계가 공개한 것 중 가장 큰 규모로,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는 미국과 유럽 전역에 배치될 예정이다.
로슈는 R&D에 엔비디아의 바이오니모(BioNeMo) 플랫폼을 이용, 로슈의 'Lab-in-the-Loop'(AI가 가설·설계·예측을 제안하고 자동화된 실험과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피드백 받아 모델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반복형 R&D 워크플)를 강화해 로슈의 AI 모델과 연결한다. 이를 통해 대규모의 가설을 검증하고, 속도를 내 불가능했던 발견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제조 부문에서는 엔비디아의 옴니버스(Omniverse) 라이브러리로 구동되는 디지털 트윈(생산 라인의 가상 복제본)을 이용한다. 쌍둥이 가상 공장을 3D 컴퓨터 공간 속에 만들어 최적의 제조 방식을 찾는 것이다.
일라이 릴리도 올해 1월 'AI 공동 혁신 연구소' 설립을 위해 엔비디아에 10억 달러(1조4,700억원)를 투자, 지난달 1,016개의 GPU로 구성된 '릴리팟'(LillyPod) 이라는 이름의 엔비디아 슈퍼컴퓨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아스트라제네카는 엔비디아와 영국의 슈퍼컴퓨터 '케임브리지-1'을 함께 쓰며 14억 개 이상의 화합물 구조를 AI에게 학습시켰고, 암젠은 엔비디아 바이오니모를 일찍부터 도입해 인체 데이터셋을 분석하는 생성형 AI 모델 '프레이야'를 구축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 내에서 복잡한 패턴을 찾아내는 데 강점이 있다. 이 특성으로 제약 바이오 분야에서 유전체, 단백질 구조, 화합물, 임상데이터처럼 규모가 크고 복잡한 데이터를 동시에 다루면서 숨은 상관관계를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텍스트부터 화합물·단백질까지 직접 설계할 수 있게 됐다. 점차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멀티모달(Multimodal) 모델로 발전함에 따라 유전체·이미지·임상정보를 통합 분석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한국바이오협회 ‘글로벌 AI 기반 생명공학 시장의 현황 및 전망’ 브리프에 따르면, AI 기반 생명공학 시장은 2035년 227억 달러(약 33조4,5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2024년 35억 달러(약 5조1,600억원)에서 2035년까지 11년간 연평균 18.5% 성장할 것으로 관측됐다. 지역별로는 북미가 2024년 15억 달러(약 2조2,000억원)로 전체의 42.6%를 점유하며 최대 시장을 형성했고, 유럽(28.2%), 아시아태평양(22.4%)이 뒤를 이었다.
향후 가장 높은 성장률이 예상되는 지역은 아시아태평양이다. 해당 지역 시장은 2024년 8억 달러(약 1조1,800억원)에서 연평균 19.7% 성장해 2035년 57억 달러(약 8조4,000억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AI 기반 신약 개발 활성화와 정책 지원, 외국인 투자 확대, 스타트업 수 증가 등이 성장 요인으로 꼽힌다. 북미와 유럽 역시 각각 연평균 17.9%, 18.9% 성장해 2035년 92억 달러(약 13조5,600억원)와 66억 달러(약 9조7,200억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아프리카 시장은 같은 기간 9억 달러(약 1조3,200억원)와 4억 달러(약 5,900억원) 수준으로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