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소매결제부터 중동 자산토큰화까지” 미국의 새 무기 ‘스테이블코인’, 달러 패권 강화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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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법 기반 발행·준비자산 규율 마련 스테이블코인 수요의 미 국채 매입 및 결제망 확대로 연결 달러 유동성·준비자산 수요·금융통제력의 동시 강화

미국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결제수단으로 편입하면서 글로벌 통화질서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중남미와 동남아시아의 저축·송금 시장에 이어 중동의 기관자금과 토큰화 자산 정산 영역에서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되는 양상이다. 중동까지 핵심 시장으로 자리 잡으면 미국은 남미의 생활경제와 중동의 에너지·기관자금을 하나의 디지털 달러권에 묶게 된다. 달러의 유동성과 결제망, 준비자산 수요가 동시에 강화되는 만큼, 후발 통화가 네트워크 효과를 뒤집기는 한층 어려워지고 달러를 대체할 통화의 부상 가능성도 희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美 ‘지니어스법’ 통과로 국채 담보 스테이블코인 전면 시행 초읽기
1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대형 은행과 핀테크 기업들은 스테이블코인을 결제·송금 플랫폼의 ‘기본 통화’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존 달러화는 현금 확보와 은행계좌 개설, 환전 및 외환 송금 절차를 필요로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지갑과 가상자산 거래소를 통해 24시간 보유·이체할 수 있다.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기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망 대신, 단 몇 초 만에 국경을 넘나드는 실시간 결제 생태계가 열리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집계한 올해 4월 초 기준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3,150억 달러(약 4696,000억원)로, 이 중 달러 표시 자산이 98%를 차지했다. 지난해 온체인 거래액은 35조 달러(약 5경2,190조원)에 이르렀으나 실물경제의 지급 관련 흐름은 3,900억 달러(약 581조6,000억원)로 추정됐다. 거래 대부분이 가상자산 매매와 내부 정산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저축·송금·소매결제로 사용처가 넓어지는 지역에서는 달러가 현지 은행망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는 통로가 형성됐다. 이는 법정화폐와 환율 제도는 유지되지만 가치 저장과 결제 단위가 달러 토큰으로 이동하는 ‘스텔스 달러화’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당초 시장에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 같은 가상화폐가 달러를 대체하면 미국의 금융시장 통제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미국 정부는 지난해 7월 스테이블코인 국가혁신법(GENIUS Act·지니어스법)을 제정해 대응했다. 미·중 간 갈등으로 미국 국채 가격이 하락하던 와중에, 국채 가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달러의 외부 유출까지 방지하는 묘안을 찾아낸 것이다. 이 법은 18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르면 올 하반기, 늦어도 내년 1월 전면 시행을 앞두고 있다. 현재 미국 통화감독청(OCC),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신용협동조합감독청(NCUA) 등은 세부 규정안을 공개한 상태다. 관계기관이 공동으로 마련한 고객확인제도 규정안의 의견수렴 기한은 8월 21일이다.
새로 도입될 미 국채 담보 스테이블코인은 오직 미 국채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예치한 현금성 자산만을 담보로 하도록 법제화했다. 국가가 안전성과 신뢰성을 보증하는 셈이다. 지니어스법에 따르면 발행기관은 유통 중인 스테이블코인과 동일한 규모의 적격 준비자산을 유지해야 하며 자금세탁 방지와 고객확인, 준비자산 공시 및 신속한 상환 의무를 가진다. 이는 스위프트 통신망이 국제 정치의 무기로 활용되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전 세계 200여 개국 간 국제 송금망인 스위프트는 서구권이 이란·북한·러시아 등 적대국을 배제하면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아르헨티나 소매거래까지 확대
지니어스법이 시행되면 미국이 관리하는 달러 결제망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각국 개인과 기업의 디지털지갑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가 낮은 국가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의 법정화폐는 페소(ARS)지만, 오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자국 화폐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면서 국민들은 페소화를 보유하는 것 자체를 손해로 여기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 경제에서 달러와 페소가 공존하는 ‘비공식 이중통화 체제(Unofficial Dollarization)’로 재편됐다.
여기에 민간 달러 스테이블코인(USDT·USDC)이 실물 달러의 대체재로 급부상했다. 아르헨티나 전체 가상자산 거래 중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60~70%에 달한다. 많은 기업이 페소 대신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급여를 지급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정부 역시 세금 신고만 정확하다면 이를 묵인하는 분위기다. 비록 페소로 급여를 받더라도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즉시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환전해 비축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스테이블코인은 편의점, 식당, 마트 등 소매 결제 영역까지 장악한 상태다. 글로벌 결제 플랫폼 우빗(Oobit)의 3월 데이터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가상자산 결제 앱 이용 거래의 72%가 USDT로 이뤄졌으며, 음식료품 구매의 41%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되고 있다. 개인 지갑(메타마스크 등)에 든 스테이블코인이 비자·마스터카드 등 기존 카드사 결제망과 연동돼 실시간으로 정산되는 인프라가 구축된 결과로, 고객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지불하고 상점은 페소로 정산받는 인프라가 전국에 깔려 있다.
동남아에서도 해외송금 시장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의 사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필리핀이 대표적 예로, 해외 근로자가 송금한 USDT·USDC를 가족이 현지 전자지갑에서 수취한 뒤 페소로 환전하거나 달러성 자산으로 보유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필리핀 가상자산 사업자 코인스닷피에이치(Coins.ph)는 USDC 발행사 서클(Circle)과 제휴해 스테이블코인의 송금 활용을 확대했으며, 블록체인 기반 송금은 복수의 중개은행을 거치는 기존 절차와 환전 비용을 줄이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이 저축과 소매 결제로 확산되면 필리핀 법정통화는 페소로 유지되더라도 가계의 가치 저장과 국제거래 기준은 달러로 이동하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 국채 담보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서두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간기업이 장악한 디지털 달러의 통제권을 미국 정부가 회수하는 동시에, 전 세계적인 스테이블코인 수요를 미 국채 발행 확대로 연결해 미국의 재정적자 부담을 더는 ‘일석이조’ 전략이다.

다음 승부처는 중동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중남미와 동남아에서 선점효과를 확보한 가운데, 다음 승부처로는 중동이 지목된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기관투자 영역에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존재감을 드러낸 상태다. 아부다비 정부가 지원하는 투자회사 MGX는 지난해 세계 최대 가상자산거래소 바이낸스에 20억 달러(약 2조9,810억원)를 투자하면서 거래대금으로 달러 연동형 USD1을 사용했다. 소매 결제망에서는 디르함 토큰을 육성하고 대형 디지털자산 거래에서는 달러 토큰의 유동성을 활용한 사례다. 현지 통화와 달러가 용도에 따라 병존하더라도 기관자금의 정산 수요가 달러 토큰에 집중되면 미국 국채를 비롯한 달러 표시 준비자산의 수요도 함께 늘어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실물자산 토큰화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사우디 국가 전자청구·결제망 사다드(SADAD)의 설계를 주도했던 파이살 모나이(Faisal Monai)는 현재 실물연계자산 토큰화 기업 드롭RWA(droppRWA)를 이끌고 있다. 모나이는 지난 5월 코인데스크 인터뷰에서 "125억 달러(약 18조6,300억원) 규모의 부동산 토큰화 위임을 확보했으며, 2030년까지 에너지와 제조업을 포함한 수조달러 규모의 자산을 온체인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올해 말부터 사우디 부동산 거래에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적용하겠다는 일정도 제시했다.
중동 통화체계 자체도 달러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사우디 리얄과 UAE 디르함은 각각 달러당 3.75리얄(약 1,530원)과 3.6725디르함(약 1,490원)에 고정돼 있어 현지 통화형 토큰에도 달러의 가치 기준이 반영된다. 여기에 미국 규율을 받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기관 거래의 정산수단으로 채택되면 달러 표시 준비자산 수요와 미국의 발행사 감독권까지 중동의 디지털 결제망에 결합되게 된다.
중동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토큰화 자산의 주요 정산수단으로 선택할 경우, 남미의 생활 경제와 중동의 기관자금은 하나의 디지털 달러망에서 연결된다. 달러의 사용 범위도 가계의 저축과 해외송금에서 에너지 무역, 부동산, 실물자산 결제로 확장된다. 특히 중동의 기관 유동성까지 달러로 결집하면 후발 통화가 네트워크 효과를 뒤집는 데 필요한 비용은 급격히 커진다. 현재의 시장점유율과 규제 환경이 유지되는 한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단기간에 부상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스테이블코인발 자본 이동 우려, 아시아·유럽 통화주권 방어전
다만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세력권이 넓어질수록 각국에서는 통화주권 침해를 둘러싼 경계심도 고조되고 있다. BIS는 외화 스테이블코인이 은행과 외환당국의 중개를 거치지 않은 채 개인지갑에서 24시간 거래되면서 통화정책의 전달력을 약화하고 자본통제를 우회하는 통로로 활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기 호황기에는 달러성 자금의 유입을 증폭시키고 금융 불안기에는 대규모 자본 도피를 촉발해 현지 통화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유럽연합(EU)은 달러 토큰의 역내 침투를 규제로 억제하고 있다. 가상자산시장법(MiCA)은 유로 이외 통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의 역내 결제량이 분기 평균 기준 하루 100만 건과 2억 유로(약 1,410억원)를 동시에 초과하면 신규 발행을 중단하고 40영업일 안에 감축계획을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해 7월 집계한 유로 연동형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3억5,000만 유로(약 5,970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달러 토큰이 유럽의 지급결제 시장을 잠식하면 유로화 표시 자산의 수요와 통화정책의 자율성이 함께 약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에서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외화 이동이 외환감시 체계의 현안으로 부상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BIS 재직 당시인 지난해 8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보급돼도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지속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화 토큰을 달러 토큰으로 교환하는 시장이 24시간 가동되면 자본 도피 경로가 넓어지고 기존 외환규제가 우회될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실제 국내 5대 원화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스테이블코인 거래대금은 57조원으로, 같은 기간 가상자산 해외 이전액 56조8,000억원 가운데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26조8,700억원을 차지했다. 이 수치는 국내외 지갑 사이의 총이전액으로, 순자본유출액과 동일한 통계는 아니지만,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달러 유동성에 의존하는 정도는 확인된다.
중국은 아예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경로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통화주권 지키기에 나섰다. 중국 인민은행(PBOC)과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 등 8개 부처는 지난 2월 당국의 승인 없이 역외에서 위안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시중에서 사용되면 법정화폐의 기능을 변칙적으로 수행하게 돼 중국의 통화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중국은 특히 통화 발행권은 오직 인민은행만 가져야 한다는 확고한 기조 아래 국가 주도 디지털 화폐인 ‘디지털 위안화(e-CNY)’ 보급에만 역점을 두고 있다. 블록체인을 타고 국경 없이 흐르는 달러화 스테이블코인이 중국의 외환 방화벽을 무력화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