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작황 악화에 전쟁까지" 치솟는 글로벌 농산물 가격, 소비자물가 '후행 충격'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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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가격 상승세 가시화, 美·유럽 이상기후가 치명타 우크라이나 전쟁·이란 전쟁도 공급망 불확실성 가중 "소비자물가 충격은 나중에 온다" 내년 인플레 압력 확대

글로벌 농산물 가격이 가파른 상승 흐름을 보이고 있다. 폭염, 가뭄 등 기후 위기의 영향으로 미국·유럽 등의 곡물 생산 전망이 눈에 띄게 악화한 가운데, 흑해·호르무즈 해협 등 주요 운송로에서 전쟁으로 인한 통항 차질까지 발생하며 공급망 전반이 위태로워지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최근 부각된 곡물 가격 오름세가 내년 상반기까지 시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소비자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농산물 가격 지표 '들썩'
지난달 31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농산물 가격이 8월 한 달간 1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블룸버그가 10개 주요 농산물 가격을 추적해 산출하는 블룸버그 농업 현물지수(Bloomberg Agriculture Spot Index)는 지난달 13% 넘게 급등한 434포인트를 기록했다. 품목별로는 밀 가격 오름세가 두드러졌다. 8월 말 밀 가격은 부셸당 7.79달러(약 10만530원)까지 올라 2023년 2월 이후 약 3년 반 만에 최고치를 새로 썼다. 같은 기간 설탕과 코코아 가격도 각각 약 20% 뛰었다.
이 같은 곡물 가격 상승세는 여타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 따르면 지난달 KC 경질적색겨울밀(HRW) 선물의 월간 수익률은 13.15%, 시카고 밀은 8.49%에 달했다. 곡물·유지 종자 등을 포함하는 CME그룹 농산물지수 역시 같은 기간 2.36% 올랐으며, 연초 이후 상승률은 9.21%에 육박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식량가격지수도 지난달 기준 131.1로 전월보다 0.6%, 전년 동월보다 1.0% 뛰었다. 이 가운데 곡물가격지수는 113.8로 한 달 새 3.4% 치솟았고, 전년 동월과 비교하면 6.9% 상승했다.
가뭄으로 신음하는 美 농가
글로벌 농산물 시장의 혼란을 야기한 핵심 요인으로는 각국을 덮친 기후 위기가 꼽힌다. 우선 미국의 경우, 장기화한 가뭄이 핵심 밀 생산지인 대평원(Great Plains)을 강타하면서 작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특히 HRW의 주산지인 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콜로라도 등 중·남부 대평원에 피해가 집중되는 모습이다.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산하 국립통합가뭄정보시스템(NIDIS)이 운영하는 공식 가뭄 정보 포털 'Drought.gov'에 따르면, 오클라호마와 텍사스 북부의 농업 가뭄은 지난해 8월 시작돼 겨울과 올해 봄을 거치며 한층 심화했다. 이후 5~6월 일부 지역에 비가 내렸지만, 겨울밀의 생육·등숙 시기가 상당 부분 지난 뒤여서 수확량 회복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가뭄으로 인한 농가 피해는 각종 지표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미 농무부(USDA)가 지난 5월 말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서 생육 중이던 겨울밀 가운데 44%는 '나쁨(poor)' 또는 '매우 나쁨(very poor)' 판정을 받았다. Drought.gov는 남부 대평원에서 파종한 겨울밀 중 수확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율이 텍사스 70%, 오클라호마 47%, 캔자스 17%에 달한다고 분석했으며, 실제 수확에 성공한 밭에서도 전년 대비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텍사스에서 24%, 오클라호마에서 26%, 캔자스에서 27% 감소했다고 짚었다. 이들 지역의 기대 생산액과 실제 생산액 간 차이는 10억 달러(약 1조3,52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표1. 이상기후에 따른 미국·유럽 곡물 작황 악화
| 지역 | 기후 여건 | 주요 영향 |
|---|---|---|
| 미국 | 대평원 지역의 장기 가뭄으로 겨울밀 생육 및 등숙 차질 | 주요 생산지의 작황 악화 및 수확 포기 증가, 단위면적당 생산량 감소 |
| 유럽 | 광범위한 폭염·강수 부족 지속 | 겨울밀,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생육 악화로 생산량 전망 하향 |
유럽 수확량 전망도 '빨간불'
유럽에서도 이상기후로 인해 주요 곡물 작황이 빠르게 악화했다. 유럽연합(EU) 공동연구센터(JRC)에 따르면 올봄부터 이어진 고온·건조한 날씨는 서·중·동부 유럽의 겨울밀을 비롯한 겨울 작물의 생육을 압박했고, 6월 이후에는 피해가 옥수수 등 여름작물까지 확산했다. 특히 프랑스, 독일 남부, 이탈리아 북·중부,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서부 등에서는 고온과 강수 부족이 개화와 수정, 종실 형성을 방해하면서 알곡의 크기와 충실도가 대폭 떨어진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곡물 생산량 전망도 잇달아 하향 조정됐다. 유럽 곡물업계 단체 COCERAL은 EU 27개국과 영국의 올해 곡물 생산량 전망치를 지난 6월 2억9,550만 톤(t)에서 지난달 2억8,660만t으로 약 890만t 낮췄다. 이는 지난해 생산량 3억1,000만t보다 약 2,340만t, 7.5% 적은 수준이다. JRC 역시 지난달 24일 발표한 최신 작황 보고서에서 주요 여름작물의 단위면적당 수확량 전망을 최근 5년 평균보다 최대 14% 낮은 선에서 제시했다.
전쟁發 농산물 공급망 리스크
지정학적 요인 역시 식품 공급망을 압박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흑해·아조우해 일대 곡물 수출 설비의 97% 이상이 가동을 멈췄다고 보도한 바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해상 수출길은 사실상 완전히 막혔다는 전언이다. 실제 타라스 비소츠키 우크라이나 농업장관은 7월 22일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오데사 항만에 새로 입항한 선박이 한 척도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 역시 핵심 곡물 수출 거점 노보로시스크의 주요 터미널 운영을 대부분 중단한 상태이며, 지난달 밀 수출량은 약 180만t까지 쪼그라들었다. 이는 월간 기준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이란 전쟁 역시 전 세계 농가에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항이 사실상 중단된 탓이다. 전쟁 발발 이후인 3~5월 호르무즈 해협의 원유·석유 제품 평균 통과량은 하루 270만 배럴까지 줄었고, 국제유가 역시 한때 배럴당 100달러(약 13만8,000원)를 훌쩍 넘어서는 등 높은 수준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경유를 사용하는 트랙터·콤바인 등 농기계 운용비와 농산물 운송비가 동반 상승했고, 농가의 생산비 부담도 눈에 띄게 확대됐다. 비료 공급에도 직접적인 차질이 발생했다. IEA에 따르면 중동 지역은 전 세계 암모니아 교역량의 25% 이상, 요소 교역량의 40%가량을 담당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글로벌 비료 공급망이 급격히 경색된 이유다. 여기에 천연가스 가격까지 상승하면서 가스를 핵심 원료로 사용하는 질소 비료의 가격도 동시에 뛰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올해 비료가격지수 상승 폭은 전년 대비 3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비자물가 압박 본격화 시점은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현재의 농산물 가격 상승세보다 향후 나타날 후행 충격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곡물 시장에서는 작황 악화·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가 수확 전 선물 가격에 선제적으로 반영되며, 이후 높아진 곡물 가격이 식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데는 다시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실제 USDA 경제연구소가 밀의 가격 전달 구조를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농가 단계의 밀 가격 변동은 대부분 1개월 이내에 밀가루 도매가격에 반영됐다. 반면 밀가루 도매가격이 일반적인 선에서 상승하거나 하락했을 때, 이러한 변동이 소매 빵 가격에 상당 부분 적용되기까지는 약 2~4개월이 걸렸다.
전체 식품 물가까지 범위를 넓히면 시차는 더욱 길어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국제 식량 가격 충격의 국내 소비자물가 전가 과정을 분석한 결과, 국제 식량 가격이 오른 뒤 각국의 식품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약 10개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누적 효과가 정점에 달하는 시점은 10~12개월 뒤였다. 국제 식량 가격이 1% 뛸 경우, 약 10~12개월 뒤 국내 식품물가 상승률이 평균 0.3%포인트 높아지는 구조다. 유럽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된다. 스페인 중앙은행 연구진이 유로존의 식품·에너지 원자재 가격과 소비자 식품 가격의 관계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원자재 가격 상승 충격의 영향은 즉시 나타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돼 약 12개월 뒤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올여름 발생한 곡물 가격 충격이 내년 상반기까지 가공식품과 소비자 식품 가격을 순차적으로 밀어 올리며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가중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