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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에인트호번시 당국, 네덜란드 내 사업 확장 LOI 체결
“반이민 정책에 인력 확보 어려워" 해외 이전 시사한 ASML
네덜란드 정부 3.7조원 투입해 인프라 정비 약속하며 진정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기업인 네덜란드의 ASML이 해외에 본사를 이전하려던 방침에서 한발 물러나 자국 내 대규모 시설 확장에 나선다. 앞서 대형 글로벌 기업의 해외 이전 악몽이 있는 네덜란드 정부의 긴급 지원책에 방향을 튼 것이다.
ASML, 자국에 대규모 시설 확장
2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ASML은 이날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남부의 에인트호번시 당국과 사업 확장에 관련한 의향서(LOI)에 서명했다. 의향서는 도시 북쪽 공항 부근의 저개발 지역에 2만여 명의 ASML 신규 직원 수용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ASML은 이번 성명에서 회사의 핵심적인 활동을 에인트호번의 기존 현장과 가까이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ASML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 2030년까지 생산 능력을 2배로 늘린다고 발표한 상태다. ASML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로저 다센은 “ASML은 현재 본사가 있는 기존 위치와 가능한 한 가깝게 네덜란드의 핵심 활동을 유지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는 인재, 기반 시설, 주택 및 긍정적인 투자 환경의 가용성을 일반적인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보고 있으며 정부가 발표한 인프라 개선 조치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미키 아드란센스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은 "이번 LOI 체결은 우리의 사업 환경에 대한 믿음과 내각이 반도체 부문에 전념한 지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화답했다.
반(反)이민 정책 나오자, ASML CEO "네덜란드 떠날 것" 엄포
네덜란드 정부가 이같은 조치를 내놓은 건 ASML이 최근 정부 정책을 이유로 거점 이전을 공개적으로 시사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ASML의 엑소더스 발단은 지난해 인종주의 극우 정치인 헤이르트 빌더르스(자유당) 주도로 의회를 통과한 '반(反)이민 정책'이었다. 네덜란드 본사 직원 2만3,000명 가운데 40%가 외국인인 ASML로선 인재 확보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거대한 암초를 만난 셈이다.
이에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네덜란드가 국경문을 닫고 우리가 이민자나 외국인 학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도 "(대신) 우리는 글로벌 기업인 만큼 회사가 성장할 수 있고 우리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베닝크 CEO는 또 "사업을 확장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여기서 사업하는 걸 선호하지만 인재를 확보할 수 없다면 동유럽이나 아시아, 미국에 (거점을 세워) 그들을 데려오도록 하겠다"고 역설했다.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실리콘 클러스터에 거점을 신설하는 움직임도 이와 무관치 않다. ASML은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공장을 짓고 있는 홋카이도 치토세시 인근에 연내 기술 지원 거점을 건립할 예정이다. ASML은 홋카이도 거점에 직원 50명을 두고 라피더스 공장 설립을 지원하며, 완공 후에는 EUV 노광장비를 제공하고 보수 및 점검에 협력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공장을 신설 중인 일본 구마모토에도 기술 지원 거점을 확장했다.
또한 ASML은 삼성전자와 손잡고 1조원(약 7억2,500만 달러)을 들여 국내에 첨단 반도체 미세 공정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 시설도 짓는다. 앞서 ASML은 2025년까지 총 2,400억원을 투자해 경기도 화성시에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인 '뉴 캠퍼스'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뉴 캠퍼스에는 EUV 노광장비 관련 부품 등의 재(再)제조센터와 첨단기술을 전수할 트레이닝 센터, 체험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아울러 ASML은 SK하이닉스와 'EUV용 수소 가스 재활용 기술 개발 MOU(업무협약)'를 체결하기도 했다.
ASML 엑소더스 막아라, 네덜란드 정부 '베토벤 작전'으로 봉합
ASML이 반이민 정책에 따른 고급 인력 확보 어려움 등을 이유로 해외 이전·확장 등을 적극 검토하자 마크 루테 총리가 이전을 막기 위해 지난달 초 ASML 고위관계자들과 회동을 가지기도 했으나,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달 말 이른바 '베토벤 작전(Operatie Beethoven)'으로 불리는 당근책을 제시하며 가까스로 문제를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ASML이 이번 본사 확장 의향서에 서명한 배경에도 베토벤 작전이 주효한 것으로 분석된다.
베토벤 작전은 물류·교육·교통·전력망·인력 양성 등 AMSL에 필요한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개선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먼저 네덜란드 정부는 에인트호번의 도로·버스·기차 등 교통 관련 인프라에 10억 유로(약 1조5,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또 이미 계획된 4만5,000채 외에 2만 채의 주택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이어 기술 인력 양성에 2030년까지 4억5,000만 유로(6,500억원)를 지출하고, 이후에는 매년 8,000만 유로를 투자한다. 이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제 혜택도 예고했다. 네덜란드 내각은 당시 성명에서 "이러한 조처를 통해 ASML이 지속해 투자하고 법상, 회계상 그리고 실제로 본사를 네덜란드에 계속 유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면서까지 ASML을 자국에 붙잡아두려 하는 이유는 본사를 이전할 경우 네덜란드 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업으로, 대당 2,000억원을 상회함에도 출하 가능한 장비 수가 연 40~50대 수준이라 품귀현상을 빚기도 한다. ASML이 반도체 업계의 ‘수퍼 을(乙)’로 불리는 이유다.
또한 ASML은 네덜란드 경제를 이끄는 핵심 기업일 뿐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좌우하는 대표 반도체 장비 업체이자, 덴마크 노보노디스크, 프랑스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뒤를 이어 유럽 시가총액 3위 기업이기도 하다. 아울러 ASML의 지난해 총매출은 276억 유로(약 40조5,000억원)로,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의 약 2.4%를 차지하며, 한 해 동안 낸 세금만 25억7,300만 유로(약 3조7,800억원)에 달한다.
정부가 베토벤 작전을 통해 투입하는 돈보다 ASML의 1년 세금이 더 많은 셈이다. 더욱이 네덜란드 정부는 앞서 석유 공룡 기업 셸과 다국적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가 세제 혜택 등을 이유로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에 둥지를 튼 전례가 있는 만큼 ASML의 엑소더스를 막기 위해 더욱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