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미셸 바르니에 총리 불신임 가결 최소 내년까진 여소야대 정국 불안한 정국에 경제 위기설 부상
프랑스 하원이 미셸 바르니에 정부에 대해 불신임안을 가결하면서 정국이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내각 붕괴는 1962년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정부 이후 62년 만으로, 큰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마저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대혼란이 예상된다.
마크롱, 남은 임기 국정동력 잃어
5일(이하 현지시간)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전날 미셸 바르니에(Michel Barnier) 프랑스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경제·금융위기론이 터져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프랑스 경제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고, 워싱턴포스트(WP)는 "투자자들이 불안해하며 정치위기가 금융위기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 분열의 가늠자로 여겨지는 프랑스·독일 10년 만기 국채금리 차이(스프레드)도 치솟고 있다. 지난주 프랑스·독일 국채 스프레드는 0.9%포인트까지 올랐다. 4일 오후 10시 기준으로 프랑스 국채금리(2.90%)와 독일 국채금리(2.08%) 차이는 0.82%포인트다.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유로존 위기 이후로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정치적 교착 상태가 악화할 것"이라며 "국가 신용등급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프랑스는 정부 붕괴로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며 신용등급 강등을 우려했다.
예산안도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바르니에 정부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해소하려 했지만 동력을 잃게 될 처지다. 바르니에 총리는 대기업·고소득자를 상대로 193억 유로(약 29조원) 증세를 추진하려다 실패했다. 내년 증세 규모는 600억 유로(약 89조원)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 매체 르몽드는 "다음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12월 31일 이전에 하원·상원에서 예산안을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주목되는 것은 마크롱 대통령의 거취다. 불신임안 통과를 주도한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극우 국민연합(RN) 등에서는 벌써 마크롱 대통령도 동반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 임기는 2027년 3월까지지만 이미 '레임덕'에 빠졌다는 분석이 팽배하다.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승부수로 던진 조기 총선에서 구사일생해 극우 정당의 의회 1당 장악을 막아냈으나, 낙점한 총리가 역사상 최단명 총리로 기록되며 3개월 만에 물러나는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우파 총리 반대'시위 열리기도
바르니에 정부는 시작부터 불안했다. 지난 6월 의회 해산 이후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범여권은 168석을 얻는 데 그쳐 국회 재적 의원(577명)의 과반수(289석)를 확보하지 못했다. 좌파 정당들이 뭉친 NFP가 182석으로 1위,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있는 RN과 그 연대 세력은 143석으로 3위를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통상 의회 1당 출신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는 관례를 깨고 범여권과 그나마 결이 비슷한 우파 공화당 출신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했다. 정부 불신임 위기가 불거진 것도 이때부터다. 바르니에 총리는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 이래 최고령 총리(73세)로 정통 우파 공화당원이다. 세 차례 장관을 지냈고, 유럽연합(EU)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논의할 때 협상 책임자였다. 이번 인사와 관련해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적 교착상태에 빠진 의회를 정상화할 인물로 불신임 가능성이 가장 적은 베테랑 정치인을 낙점했다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
이에 여론도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바르니에 총리 취임식 이틀 뒤 파리를 비롯한 전국 150곳에서 바르니에 총리 임명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LFI와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해당 시위에는 약 11만 명이 참여했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바르니에 총리 임명은 좌파 연합에 가장 많은 표를 몰아준 유권자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도둑맞은 선거’, ‘마크롱의 권력 장악’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며 “마크롱 퇴진”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은 바르니에 총리를 '변장한 극우'라고 칭하며 “마크롱이 통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선택한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말했다. 바르니에 총리 임명 직후부터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 선거 결과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고 연일 비판 수위를 높여온 장뤼크 멜랑숑 LFI 대표도 파리 시위에 참석해 “민주주의는 이겼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예술일 뿐만 아니라,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라며 시위대를 향해 “긴 싸움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韓·佛 대통령은 닮은 꼴?
전문가들은 바르니에 총리가 물러남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이 내년 6월 새로운 총선을 실시할 수 있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프랑스의 정치적 교착 상태는 쉽게 해결되긴 어려워 보인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상황을 두고 AFP통신 등 외신은 윤석열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의 유사점을 조명하기도 했다.
AFP에 따르면 둘 다 최고학부인 서울대 법대와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으며 자유주의를 국정이념으로 내세웠고, 모두 고급 공무원(검사, 재무부 관료) 출신이다. 윤 대통령이 야권에서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마크롱 역시 “주피터”(거만하다는 뜻)란 별칭으로 불린다. 군경력이 없음에도 애국주의를 강조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정치적 수렁에 빠지게 된 계기 역시 비슷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임명한 바르니에 총리는 예산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자, 프랑스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했다. 해당 조항은 ‘긴급한 상황’에서 국무회의 승인을 받은 법안을 총리가 의회 투표를 거치지 않고 통과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다. 프랑스에선 이 같은 헌법 권한을 통해 입법한 사례가 90여 건에 달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여당이 다수당일 때였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제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직시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도달했다”며 비장한 수사를 동원했으나, 결국 의회 없는 정치는 실패한다는 사실만 재차 방증했다. 실제로 프랑스 헌법에서 ‘의회 패싱’을 명문화한 이 조항에는 대가가 따른다. 총리 불신임이 가결되면 애초 입법하려던 법안도 무산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돌발적인 계엄령 정국을 전하는 프랑스 매체의 기사에도 프랑스 정국과 유사성이 엿보인다. 르몽드는 “윤 대통령이 속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예산안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중에 벌어진 일”이라며 예산안을 계엄선포 배경으로 지목했다. 르몽드는 또 “야당은 윤 대통령이 제안한 677조원 규모의 예산안에서 약 4조1,000억원(28억 달러)을 삭감하며, 대통령실, 검찰, 경찰, 감사원의 활동 예산을 잘라냈다”고 했다. AFP 역시 예산안 삭감을 비중 있게 보도하며 “윤 대통령의 계엄령은 정치적·정책적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절망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