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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기준금리 인하 ‘스몰 컷’ 뚜렷한 경제 회복 동력 부재 핵심 산업 역성장 해소가 먼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2.5%로 하향 조정한 가운데, 이창용 한은 총재가 자산 버블 우려를 언급하며 속도 조절을 강조했다. 한국 경제가 단순한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회복되기 어려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산업 경쟁력 약화와 투자 침체가 그 원인라는 설명이다. 이에 단기적 처방보다는 장기적 산업 구조 개편과 체질 개선이 병행돼야 한국 경제의 반등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창용 “급격한 금리 인하, 부작용 커” 경계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전날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개최하고 기준금리를 종전(2.75%)에서 0.25%p 낮춘 2.50%로 결정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통위 직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연내 우리 경제 성장세가 크게 약화할 것으로 예상돼 경기 대응을 위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했다”며 “물가 안정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성장률이 0.8%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경기 하방 압력을 완화하는 조치가 필요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경제 성장 둔화의 원인으로 글로벌 시장 불확실성을 꼽았다. 미국의 관세 정책 여파로 세계 경제가 영향권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그는 “세계 경제가 무역 갈등이 일부 완화됐지만 관세율 영향 등으로 성장세가 둔화할 것”이라며 “민간소비가 불확실성 장기화로 부진하고 건설투자는 부동산 경기 위축과 안전사고 등의 영향으로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 주요 품목도 글로벌 경쟁력 약화와 통상 여건 악화로 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부연했다.
금리 인하 폭이 0.25%p 수준으로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않는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는 “경기 부양을 위한 무리한 금리 인하는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 총재는 과거 자산 버블의 경험을 언급하며 “금리를 빠르게 낮춰 유동성을 공급하면, 경기부양보단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가격을 밀어 올리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면서 “이 경우, 코로나19 팬데믹 때 벌어졌던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국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예상한 것과 관련해선 건설 경기 부진과 소비 위축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 총재는 “건설투자의 부진이 성장률 전망을 0.4%p 낮추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고, 민간 소비 회복 지연과 수출 둔화도 각각 0.15%p, 0.2%p 하향 요인”이라며 “미국의 대중국 관세 확대 등을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내수·수출·고용 지표 모두 부진, 구조 개혁 필요성↑
이 총재가 이처럼 공식적으로 “경기 상황이 좋지 않다”고 인정한 건 단순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산업 전반에서 경기 위축이 감지되는 가운데 이를 타개할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 기업 심리지수 하락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데 따른 관측으로, 실제 최근 발표된 각종 지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전국 508개 기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 기업의 96.9%는 올해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 기업은 ‘올해 경제위기가 1997년 IMF 사태 때보다 심각(22.8%)’하거나 ‘1997년 정도는 아니지만, 올해 상당한 위기가 올 것(74.1%)’으로 내다봤다. 반면 ‘올해 경제위기가 올 것이란 우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최근의 국제 정세 불안이 우리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는 47.2%(복수응답)가 ‘환율 변동성 확대에 따른 수출 경쟁력 약화’라고 답했으며, ‘소비 심리 위축 및 내수 부진 심화(37.8%)’, ‘불확실성 확대로 인한 투자 심리 위축(26.0%)’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김재현 경총 규제개혁팀장은 “대내외 불안으로 우리 기업들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기업 투자와 고용 창출을 유도할 수 있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단기적인 유동성 공급 정책만으로는 경제가 되살아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고령화와 부동산 경기 의존, 생산성 저하 같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과거처럼 시장에 자금이 돌면 기업이 설비투자를 확대하고, 고용과 소비가 늘며 경기가 살아나는 선순환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총재가 금리 인하만으로는 경제 버팀목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적 전환과 산업 재편을 외면한다면, 단기적인 유동성 확대 정책은 수요를 자극하기보다는 시장 왜곡만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당장의 진통을 덜기 위한 처방보다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점에서 정부의 경제 정책은 ‘경기 부양’보다 ‘경제 체력의 회복’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중국 압박과 산업 재편 이중고
더 큰 문제는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정체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전통적 주력 산업들이 중국 기업의 매서운 추격을 받으면서다. 산업연구원이 지난 27일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국내 13대 주력 산업 가운데 자동차(-8.0%), 일반기계(-7.2%), 정유(-19.3%), 철강(-2.1%) 등 9개 산업의 수출이 전년 대비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따라 올 하반기 전체 수출도 지난해 전망했던 것과 달리 2.4% 줄어들 것으로 관측됐다.
이처럼 암울한 전망은 중국이 2015년 ‘중국제조(中國制造) 2025’를 천명하고 지난 10년간 국가 주도의 전략적 투자와 정책적 집중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것과 대비돼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 청사진 아래 최소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배출하며 제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전기차 판매량 1위를 차지한 비야디(BYD), 8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드론 기업 다좡이노베이션스(DJI) 등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기 위해선 단기 처방이 아니라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구조적 개편, 신성장동력에 대한 집중 투자,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개혁 등 다각적 접근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이 총재가 밝힌 ‘금리 인하 신중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산업 전환과 생산성 제고에 방점을 찍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경제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