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질서 죽어간다” EU 경종, 중국은 반미 강화·동맹은 균열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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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중심 통상·외교 정책이 배경
중국은 연일 ‘반미 메시지’ 발신
동맹 구도 유지 속 불안 요소 확대

유럽연합(EU)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규칙 기반 세계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글로벌 다자체제의 균열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행정부의 이익 우선주의와 중국의 반미 공세가 맞물리며 국제 질서의 불안정성은 날로 커지고,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불만과 긴장이 누적되는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EU의 경고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향후 국제 질서 재편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데 관측이 일치했다.
국제 질서 재편 가능성에 무게
1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최근 발간한 ‘전략적 전망 보고서 2025’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가 죽어가고 있다”며 “공급망, 이주, 무역, 인도주의적 지원, 우주, 정보 등 모든 것이 무기화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혼란과 다자간 질서의 침식이 각국의 ‘자율성’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고, 기존의 질서는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렵다는 게 이번 보고서의 핵심이다.
보고서는 EU가 디지털·금융 서비스 부문에서는 미국에, 핵심 광물 부문에서는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점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특히 광물에 대한 의존도는 유럽 전반의 경제는 물론 안보 측면에서도 차원에서도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며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EU의 전략적 자율성 확보 필요성을 강화시키는 요인인 만큼 공급망 다변화와 대외 의존 축소가 시급하다”고 짚었다. EU가 직면한 외교·경제적 불안 요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협정 사례를 간접적으로 문제 삼았다. 앞서 EU는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낮추고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자국 제조 제품에 대한 15% 관세를 수용했다. 이를 두고 유럽 내 산업계에선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쇄도했고, EU 집행위는 일방적인 협상을 옹호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실제로 프랑스 매체 ‘르 그랑 콘티넨트’ 설문조사에서는 주요 5개국 EU 시민의 60%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사임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는 EU 내부의 불만이 얼마나 누적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EU는 이처럼 규칙 기반 거버넌스가 흔들리는 상황이 매우 치명적이라고 단언했다. 그간 EU는 개방성과 다자주의를 통해 공동 무역 정책과 국제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지만, 현재와 같은 분열 상황에서는 기존 전략을 고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구체적 해법이 아닌 ‘회복력 2.0’이라는 추상적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결국 이는 EU가 68년 동안 풀지 못한 과제, 즉 일관된 글로벌 비전 확립이라는 숙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중국, 대외 발언 수위 높이며 미국 이기주의 직접 비판
이런 가운데 중국의 시진핑 국가 주석은 8일 신흥경제국 협의체인 브릭스(BRICS) 정상 화상회의에서 사실상 미국을 겨냥해 “관세 전쟁을 일으켜 국제 무역 규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와 자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권위주의 국가 정상들을 불러 모아 반(反)서방 세몰이에 나선 데 이어, 브릭스 국가를 향해서도 미국에 맞서 뭉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재차 드러낸 것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화상으로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 주석은 “세계에 패권주의, 일방주의, 보호주의가 매우 만연하고 있다”면서 “일부 국가는 잇따라 무역 전쟁과 관세 전쟁을 일으켜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고, 시장 질서를 심각하게 망가뜨렸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국가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각국과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을 사실상 겨냥한 발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이에 앞선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며 ‘반서방 연대’의 좌장을 자처했다. 북·중·러 정상이 나란히 선 것은 냉전 이후 66년 만으로,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세계가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미국 주도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이번 전승절 행사는 중국이 다자 협력체 무대와 연계해 반미 구도를 강화하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유인책 지속, 일부 동맹 이탈 가능성도
국제사회의 시선은 미국 동맹 구도의 지속 가능성에 쏠리는 형국이다. 현재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통상 압박을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틈 타 관세 분쟁 속에서 경제적 유인책을 제시하며 동맹 이탈 가능성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거듭 중이다. 이는 EU가 지적한 다자질서 약화와 맞물려 글로벌 균열 가능성을 노출시킨다.
그러나 웬란 장 앨버타대 중국연구소 소장은 최근 SCMP 기고에서 미국 동맹국들의 구조적 결속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EU·일본·한국·호주·캐나다 사이에는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안보 통합, 문화적 유대, 공유된 정체성이 존재한다”면서 “파이브아이즈(Five Eyes) 같은 첩보 동맹과 미사일방어 체계는 실질적으로 동맹국들을 미국 전략 구조에 묶어두는 기반”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EU는 6,000억 달러의 대미 투자와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며 시장 접근권을 지켜냈고, 일본과 한국 역시 대규모 투자와 군사 협력을 통해 미국과의 연대를 유지했다. 이러한 사례는 여전히 안보와 신뢰가 동맹 유지의 최우선 가치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약탈적 행위’에 불만이 쌓이더라도, 중국 주도의 새로운 블록으로의 이탈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러한 동맹 구도에도 균열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더욱 노골화되고 동맹국의 불만이 누적될 경우, 중국의 유인책이 부분적으로 공명할 여지가 있다. EU가 지적한 것처럼 ‘규칙 기반 질서’가 흔들리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가 굳어진다면, 경제와 안보 사이에서의 줄다리기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의 균형은 일시적 불안정에 불과하며, 미국의 행보에 따라 향후 국제 질서 또한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