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조 오일머니 중동, AI 투자 본격화에도 ‘소버린 AI’는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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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 H100 기준 AI 인프라 UAE·사우디, 중국 크게 앞질러 중동 AI 굴기, 투자형 성장에 머물 것

중동이 오일머니를 앞세워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의 새로운 전선을 열기 위해 분전하고 있다. 석유 이후의 성장 엔진을 AI 인프라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은 데이터센터, AI 반도체, 전력 인프라에 수천억 달러 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미국과 중국 중심의 기술 질서에 균열을 내는 ‘제3의 축’으로 부상하기 위해 전력하고 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구동할 인재와 생태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중동의 AI 굴기는 투자형 성장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 세계 AI 인프라 분포, 중동 국가 2·3위 안착
14일 미국 데이터센터 서비스 기업 TRG가 2025년 전 세계 AI 인프라 분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위를 차지한 국가는 미국으로, 엔비디아 H100급 AI 칩 3,970만 개 수준에 해당하는 연산 능력을 가진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의 뒤를 이은 곳은 UAE(2,310만 개 수준)와 사우디(720만 개 수준)였다. 전력 용량 기준으로도 UAE는 6,400메가와트(㎿), 사우디는 2,400㎿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가동 중이다. 중국(40만 개 수준·289㎿)을 크게 앞설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주요국보다도 10배 이상 많다.
이는 걸프 산유국들이 에너지 의존형 경제에서 AI 기반 지식경제로의 전환에 수천억 달러 규모의 베팅을 단행한 결과다. 사우디는 지난해 400억 달러(약 54조원) 규모의 AI 전용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데이터센터·AI 기업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했다. 국부펀드(PIF) 산하 AI 기업 휴메인(HUMAIN)은 미국 퀄컴과 손잡고 첨단 AI 데이터센터를 공동 구축하고 있다. 구글클라우드 역시 PIF와 손잡고 100억 달러 규모 글로벌 AI 허브를 사우디에 설립한다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UAE는 2017년 세계 최초로 AI 장관직을 신설하고 ‘국가 AI 전략 2031’을 출범시켰다. 정부 산하 AI 기업 G42는 오픈AI, 엔비디아와 협력해 초대형 데이터센터 단지를 세우는 ‘스타게이트 UAE’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기가와트(GW)급 클러스터에서 출발해 5GW 규모로 확장될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단지다.
미 AI 기업에 막대한 투자 단행
중동식 AI 드라이브는 에너지 의존형 경제에서 AI 기반 지식경제로 전환하려는 국가 전략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미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과감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미국 AI 스타트업 앤스로픽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앤스로픽은 130억 달러(약 18조원)를 새로 조달하며 기업가치를 1,830억 달러(약 247조원)로 끌어올렸는데, 해당 라운드에는 카타르 투자청(QIA)이 주요 투자자로 포함됐다. 당시 모하메드 알 하르단 QIA 기술·미디어·통신 담당 책임자는 앤스로픽의 기업용 AI·코딩 자동화 역량을 높이 평가하며 “앤스로픽은 기업 시장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 밝혔다.
앤스로픽은 그동안 중동 자금 유치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7월 사내 메일을 통해 “중동 투자는 독재자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나쁜 사람이 이득을 봐선 안 된다는 원칙만으로는 회사를 운영하기 어렵다”며 오일 머니 유치가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미 경쟁사들도 중동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UAE의 MGX는 오픈AI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투자했고, 일론 머스크의 xAI는 QIA와 MGX는 물론, 사우디의 킹덤 홀딩스로부터 자금을 유치했다.
카타르는 앞으로 10년간 미국에서만 5,000억 달러(약 700조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올해와 내년 기술 분야에서 최대 25건의 거래를 계획 중이며, 투자 대상은 반도체·데이터센터·소프트웨어 등으로 광범위하다. 카타르는 미디어 영역에서도 AI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모하메드 알 하르단 QIA 기술·미디어·통신 담당 책임자는 “음악과 사진,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이 가장 흥미로운 분야”라며 할리우드 제작사 노스 로드(North Road Company)와 연계한 투자를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AI 제3 스택' 구축 포부
업계는 중동의 이 같은 움직임이 미·중 양강 체제의 대립 구도 속에서 AI 제3 스택을 구축하려는 포부가 깔려있다고 분석한다. 현재 미국은 AI 등 최첨단 미래 기술을 둘러싸고 중국과 치열한 기술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상무부가 중국 수출금지 품목에 엔비디아와 AMD의 저사양 AI 반도체까지 확대 적용했으며 5월에는 화웨이에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일부 기업의 수출 면허를 취소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5월 중동 순방을 계기로 AI 외교를 가속화한 것도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천문학적인 돈을 약속한 오일 머니 국가에 최첨단 엔비디아 AI칩으로 보답하는 등 미국이 자국의 AI 기술력을 외교와 통상에 적극 활용했다. 이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발판으로 ‘AI 강국’ 도약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중동국가들의 구상과 맞물리며 대규모 투자로 이어졌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향후 4년간 6,000억 달러(약 850조원)를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UAE도 10년에 걸쳐 1조4,000억 달러(약 1,840조원) 투자를 약속했다. 아부다비 국부펀드 무바달라는 최근 인텔의 자회사 알테라 지분을 인수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와 15억 달러(약 2조1,400억원) 규모의 AI 동반 관계를 체결하는 등 미국 기업과의 협력을 늘렸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동이 AI 패권 전쟁의 새로운 축으로 부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기술 인프라는 빠르게 확충되고 있지만, 이를 운용할 핵심 인재와 연구 생태계는 여전히 부재하기 때문이다. 초대형 데이터센터와 오일머니가 구축한 물리적 규모가 막대해도, 지식과 기술이 내재화되지 않는 한 중동의 AI 굴기는 자본이 만든 외형적 팽창에 그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