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비정상 궤도, 제도는 공백” 韓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 ‘안갯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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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감독체계 부재로 논의만 반복 시장은 불법거래·조작·사기성 난무 주요국 ‘디지털 달러화 레일’ 구축 한창

세계 주요국이 앞다퉈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금융망에 편입시키며 신뢰 구축에 나선 가운데, 한국은 여전히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단 비판이 제기됐다. 최근 국정감사를 계기로 제도화 논의가 재점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발행 주체와 감독 체계, 준비금 관리 등 핵심 설계는 미완성 상태다. 시장이 투기성 자금에 휘둘리며 왜곡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 등 주요 기관들은 대규모 환매나 역송금 발생 시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를 경고하고 나섰다.
발행 주체 두고 이견 좁히지 못해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르면 이달 중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초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오는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해당 초안이 핵심 질의로 오를 예정이며, 이에 따라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과 감독 체계, 발행 주체 자격을 둘러싼 논의 또한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처럼 한국이 ‘입법 검토 단계’에 머무르는 동안 주요국은 각자 완성된 규제 프레임을 앞세워 생태계 확장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미국은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통해 민간기업도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발행 시 동일한 가치의 달러나 단기국채를 100% 예치하도록 의무화했다. 발행 기관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허가를 받아야 하고, 준비금은 연준의 감독 아래 관리된다. 유럽연합(EU)은 ‘가상자산시장규제법(MiCA)’ 규제를 통해 디지털 자산을 결제용, 투자용으로 구분하고 발행 구조별로 자본 요건을 차등화했다. 일본 역시 2023년 자금결제법 개정으로 은행·신탁회사 등 금융기관만 발행을 허용했다.
반면 한국은 관련 법안이 최소 6건이나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여전히 입법 논의는 지연되는 실정이다. ‘가치안정형 디지털자산 발행법’, ‘디지털자산 기본법’ 등 각기 다른 법안이 병존하면서 감독권을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한은 중 어느 기관이 가져야 하는지조차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금융위는 민간 혁신을 허용하는 방향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한은은 통화정책 안정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이견이 해소되지 않으면 제도화 초안 공개 역시 정치적 선언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정부는 △예치금 100% 보전 △발행기관의 자본 요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의 기능 중복 등 핵심 쟁점을 두고 부처 간 협의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실무 수준의 논의조차 결론이 나지 않아 시장 불확실성은 점점 짙어지는 형국이다. 이에 업계 전문가 사이에선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가상자산을 넘어 결제 등 금융 인프라의 일부로 봐야 한다”며 “한국이 지금처럼 제도권 진입을 미루면 결제·정산 시장에서도 글로벌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통화주권보다 엄중한 현실, 투기화된 시장 구조
이런 가운데 최근 시장에선 최근 달러 스테이블코인(USDT·USDC)의 가격이 본환율을 웃도는 기형적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14일 기준 업비트와 빗썸에서 USDT는 각각 1,500원 안팎에 거래되며 당시 달러·원 환율(1,430.10원)을 훌쩍 넘어섰다. 특히 USDT는 한때 5,755원까지 치솟으며 단기 과열을 나타냈다. ‘1코인=1달러’라는 기본 전제가 깨지며 페그(가치연동, peg)가 붕괴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거래소가 제공하는 ‘코인 대여’ 서비스에선 자동 상환이 작동해 투자자들이 강제 청산을 당하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시장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시장조성자(Market Maker) 제도의 부재를 지적했다. 국내 거래소 시장 내 스테이블코인 가격 급등이 개인투자자 중심의 얇은 시장 구조와 유동성 부족에서 비롯된 만큼 제도권 수준의 시장조성 체계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시장조성자는 특정 자산의 매수·매도 호가를 지속적으로 제시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가격 급변 시 시장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논의는 역설적으로 이미 시장이 정상적 가격 형성 메커니즘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한은은 이런 시장 불안을 ‘통화주권 약화’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외환시장 통제력 약화와 불법 송금·자금세탁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반면 업계는 현행 가상자산 관련 법률이 시장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가상자산사업자가 특수관계인이 발행한 코인을 취급할 수 없게 한 조항 때문에 발행에서 유통, 결제로 이어지는 구조가 단절되고, 그 결과 실질적 수요마저 왜곡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은행의 실명계좌와 송금 규제가 경직적으로 적용되면서 글로벌 시세와 국내 가격 간 괴리가 반복되는 실정이다. 실상을 반영하지 못한 법과 제도가 문제의 출발점이자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BIS도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의 위험을 경고했다. 단기 국채 중심의 준비자산 체계가 평시에는 금리 안정 효과를 내지만, 자금 이탈이 발생할 경우 금리가 걷잡을 수 없이 뛰며 시장 충격을 키운다는 것이다. BIS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 대규모 환매나 역송금이 발생하면, 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짚으며 “제도권 편입을 위해선 준비금 100% 보전, 은행 커스터디, 시장조성자 지정, 발행 공시 의무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조언했다.

외환시장 안정성까지 교란할 위험
이처럼 한국이 시장 질서 구축 논쟁에 머무는 사이 세계 주요국은 이미 신뢰를 전제로 한 제도와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지니어스법에 이어 ‘클래리티(Clarity) 법안’을 추진해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독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고, 가상자산의 발행·거래·보관에 대한 법적 틀을 확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 EU는 MiCA 항목에 발행자 인가, 준비금 운용, 환매 절차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의 초점이 과거 ‘도입 여부’에서 ‘어떤 설계가 금융 안정과 혁신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가’ 옮겨간 것이다.
시장 인프라도 ‘신뢰의 레일’을 까는 데 집중하는 모양새다. 단기 국채와 현금성 자산에 한정된 준비금 운용 규율을 따르면서도 소비자가 언제든 환매할 수 있는 상시 창구를 마련하는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특히 글로벌 결제망 스위프트(SWIFT)는 전통 은행망과 블록체인 간 상호운용성을 실험 중이다. 은행 결제망의 하루 단위 결제(T+1)와 블록체인의 실시간 결제를 연결해 한쪽에서는 달러가 전통 은행망으로 이동하고, 다른 쪽에서는 토큰화된 자산이 블록체인에서 동시에 처리되도록 하는 구조다. 이를 통해 기존 금융과 디지털 자산 결제가 충돌하지 않고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을 구축하려는 구상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입법 지연은 단순 속도의 문제를 넘어선다. 근본적 사안으로는 ‘통화 관리 주체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라는 관점의 충돌을 꼽을 수 있다. 금융당국이 혁신 산업 진흥을 내세워 민간 참여를 유도하는 동안 한은은 통화 질서 유지를 이유로 민간 주도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꺼리고, 이들 모두 각자의 입장만 내세우면서 구체적 역할 분담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업계는 법적 공백 속에서 시범 사업만 반복하는 식이다. 이처럼 제도 설계가 늦어지는 사이 시장은 ‘무규제 상태’로 고착하고, 가격 왜곡과 불법 송금, 해외 자금 역류 같은 구조적 위험 또한 누적된다. 결국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통화정책과 산업정책을 동시에 아우르는 ‘균형 모델’을 세우는 일로 좁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