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한미 관세협상 ‘돌파구’ 찾나, 미국 “원화로 투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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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억弗 투자 방식 이견 속 분산 집행 등 대체 방안 논의 APEC 전 최종 서명 가능성↑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2주 앞두고 한미 무역협상 최종 타결이 가시화하고 있다. 최대 쟁점인 3,500억 달러(약 497조원) 투자액 조달 방식을 놓고선 ‘원화’를 활용한 대미 투자 카드가 급부상한 모양새다. 미국 재무부와 한국은행이 맺는 통화 스와프로 투자액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외환보유고 급감 우려를 피하기 위한 절충책이지만, 실질적으로 원화를 담보로 달러를 운용하는 구조라 장기적으로는 환율 불안과 재정 부담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금 선불' 놓고 이견, 협상 막판조율
17일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정부는 대미 투자 펀드 실행 시 발생할 수 있는 한국 측의 외환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화를 기반으로 한 대미 투자 펀드 방식을 미국 측과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10일 발표한 9월 말 외환보유액은 4,220억2,000만 달러(약 599조4,000억원)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처럼 3,500억 달러를 선불(up front)로 미국에 지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는 미국 측과 통화스와프의 조달 규모와 방식에 대한 세부 협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16일 한미 협상 총괄을 위해 미국 출장에 나선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협상 전망과 관련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김 실장과 동행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한국의) 외환시장 등과 관련해 양국의 오해와 간극이 많이 좁혀졌다”고 설명했다. 이보다 앞서 15일 출국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각각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회동한다. 한국 협상단은 미국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을 방문해 대미 투자 펀드와 관련한 양해각서(MOU)의 최종 문구를 조율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양국은 한목소리로 경주 APEC 정상회의를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의 실질적 목표 시점으로 내걸었다. 베선트 장관은 15일(이하 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서 추가 무역 합의 발표를 볼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한국으로 이동해 APEC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 자리에서 정상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김 실장도 “(협상) 데드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정상이 만나는 계기가 그렇게 자주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APEC이 실질적으로 큰 목표”라고 했다. 정부 소식통은 “금융적 베이스에 대한 양측 공감대가 마련되면 후속 협상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짚었다.
대미 원화 투자, 외환시장 악영향 우려
현재 논의 중인 '원화 계좌 투자' 방식은 한국 정부가 먼저 제안한 통화스와프에 대해 미국이 내놓은 대안이다. 통화스와프는 양국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미리 정한 환율로 맞바꾸는 방식인 반면, 원화 계좌 투자는 한국 정부가 미국에 원화 계좌를 개설하고 투자 규모만큼 원화를 입금하면, 미국이 그 금액에 해당하는 달러를 마련해 투자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구조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우회로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베선트 장관도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화 계좌 투자의 핵심은 원화를 내고 외환안정화기금(ESF)에서 조달한 달러를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등 대미 투자에 활용해 한국 외환시장에 가해질 수 있는 달러 유출로 인한 충격을 줄이는 것이다. 미국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9일 아르헨티나와 200억 달러(약 28조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당시 스와프 체결 방식은 양국 중앙은행 간의 협약이 아닌 아르헨티나 중앙은행과 미국 재무부 간의 협약이었으며 미국 측은 아르헨티나의 페소화를 직접 구매하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다만 우리나라가 3,500억 달러 전액을 원화 스와프로 투자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미 재무부가 공개한 올해 2월 기준 ESF의 자산 총액은 2,108억 달러(약 299조원)였다. 한국도 아르헨티나처럼 백억 달러 단위를 얻어내는 데 그친다면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양국이 전격 합의해도 걸림돌은 남는다. 수백조원 규모의 대미 원화 투자는 국내 외환시장과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 투자를 달러로 하면 달러 수요가 증가해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원달러 환율이 상승할 수 있다.
원화로 해도 원화 유출에 따른 약세 흐름이 나타나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261조원(8월 기준)으로 집계된 국가채무도 불어날 수밖에 없다. 497조원은 내년 정부 예산안 728조원의 68.3%에 이른다. 일각에선 달러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하는 방식도 거론되지만 이 역시 국가부채를 활용한 자금 조달 방식이어서 한계가 있다.
물론 협상 결과를 단언하긴 이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이 통화 스와프를 제시했지만 그건 무제한이었고, 미국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스와프가 체결되더라도 필요조건일 뿐이다. 충분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재무부와의 통화 스와프에 큰 의미를 두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무제한이든 유제한이든 진전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日 "실제 투자액, 5,500억 달러의 1~2%에 불과"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한미 양국이 대미 투자펀드 중 현금 비중에 관해 접점을 일부 찾았다는 관측도 나온다. 구체적 비중은 알려져지 않았지만 당초 우리 정부가 생각했던 5% 수준보다는 다소 늘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외환보유액 대비 투자액을 일본과 맞출 가능성도 있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의 84%고, 일본이 투자하기로 한 5,500억 달러(약 780조원)는 외환보유액 대비 42%다. 일본 수준으로 조정하면 대략 1,700억~1,800억 달러(약 241조~255조원)로 계산된다.
게다가 일본 역시 5,500억 달러 가운데 실제 투자(actual investment)는 1~2%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대출 및 대출 보증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미일 양측은 지난 7월 22일 무역 협상을 타결해 자동차 관세를 낮추기로 했으나 이후 세부 내용을 두고 해석 차이를 보였다. 그러던 중 지난달 4일 일본이 미국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이어 러트닉 장관과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이 양해각서에 서명하면서 양측 무역 협상의 문서화가 이뤄졌다.
문서화된 미일 간 무역 협정은 일본에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 많았다. 미국 허드슨연구소가 공개한 양해각서의 세부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트럼프 정부 임기 내에 5500억 달러를 배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과거에는) 우리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잘하고 있다"면서 유럽연합(EU)과 일본, 한국 등에서 받는 투자금액에 대해 "그것은 선불"이라고 말하며 논란을 키웠다.
하지만 외신들은 이에 대해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이 "(미일 간에) 어떠한 불일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짚으며, 실제 미일 양측이 체결한 양해각서에도 선불이라는 표현은 없었고 '수시로' 금액을 지불한다고 명시돼 있었다고 보도했다.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양국이 체결한 양해각서를 두고 "조약도 아니고 법적 구속력도 없다. 이는 양측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를 명시한 행정적인 문서며, 우리는 양측이 모두 이러한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일본 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미 일본으로부터 대미 투자금을 선불로 받았으니 한국 역시 투자금 3,500억 달러를 전액 선불로 내놓으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균열은 한미 관세 협상에도 큰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