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예산이 있어야 ‘연방 정부 노릇’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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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사실상 ‘느슨한 동맹’ 중앙정부 예산 부족이 주원인 ‘연방세’ 도입과 ‘조건부 예산편성’ 필수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이하 EU)은 입으로는 연방(federation)을 외치지만 예산은 ‘느슨한 동맹’(confederation) 구조에 의존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2021~2027년 기간 EU의 예산은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 이하 GNI)의 1.14%에 지나지 않고, 팬데믹 복구 기금을 합쳐도 1.5% 정도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방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23%에 이르는데 이 차이가 유럽의 무능한 위기 대응 역량을 설명해 준다.

EU 정부 예산, ‘턱없이 부족’
실제로 유로존 위기(eurozone crisis)부터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EU의 대응 방식은 한결같았다. 거창한 목표 제시와 끝도 없는 협상, 어쩔 수 없는 막판 타협이 그것이다. 위기 시마다 ‘차세대 EU’(NextGenerationEU, 팬데믹 복구를 위한 EU 금융 상품), 우크라이나 지원 프로그램(Ukraine Facility), 특별 에너지 보조금 등의 임시방편이 만들어지고 누가 돈을 낼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다툼이 이어졌다. 문제를 요약하면 EU가 연방으로서의 방편도 없으면서 연방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EU 예산의 대부분은 회원국 간 자금 분담에 의존한다. 올해 예산도 65%가 GNI를 기준으로 한 분담금, 16%는 부가가치세 갹출로 채워졌다. 관세 및 플라스틱 폐기물에 대한 부과금 등 진정한 EU 정부 예산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라기보다는 청산 거래소(clearinghouse)에 가깝다. 돈이 들고난 후에는 부담자와 수혜자를 놓고 끊임없는 토론이 이어진다.
위기 극복 예산은 ‘임시방편’
팬데믹 기간 조성된 복구 기금은 힘이 실렸을 때 EU가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과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8천억 유로(약 1,328조원)를 빌려 각국의 복구 계획을 지원한 것은 EU 자체의 경제 안정 역량을 보여준 것이지만, 한시적인 부채를 통한 자금조달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재정 기반은 될 수 없다. 상환 기일은 곧 다가올 것이고 새로운 위기는 또 다른 협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주: 마스트리흐트 조약상 구조(좌측), 2008년 이후 구조(우측), *당초 마스트리흐트 조약상의 공공 재정 분배는 원칙을 기반으로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2008년 유로존 위기 이후 예외적 지원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줌
유럽이 국방과 에너지, 산업 정책을 전략적으로 주도하는 중앙정부를 원한다면 연방세(federal tax)는 필수적이다. 그게 아니라면 연방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중앙정부를 향한 길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정치다. 부유한 회원국들은 영원히 가난한 나라를 지원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주: 2022년까지 공공 재정 분배 기준(좌측), 2027년 이후 구조 제안(우측), *2022년까지 위기 극복을 위한 예외적 지원이 주를 이뤘으나, 2027년 이후부터 조건부 예산 편성과 안정적 예산 확보를 통해 규칙을 강화하고 개혁 및 투자를 늘리며 위기 예방에 주력함을 나타냄
EU 차원 목표와 예산편성 ‘일치시켜야’
그렇다면 해결책은 EU 차원의 재정 지출을, 합의되고 평가 가능한 목표와 연결하는 ‘조건부 예산 편성’(conditional budgeting)밖에 없다. 탈탄소화, 공급망 강화, 에너지 통합과 같은 유럽의 공동 목표를 명확한 일정과 평가 지표를 더해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호한 분담금 형식을 투명한 계약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누가 수혜자인가를 놓고 다투기보다 EU가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토론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양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조정되면 EU 재정 운영에 제기되는 의혹 대신 협력이 일어날 것이다.
굳이 미국 연방제를 흉내 내지 않아도 EU 정부가 GNI의 0.5~1%만 과세할 수 있다면 재량 지출 여력(discretionary spending power)도 두세 배쯤 커질 수 있다. 이 정도 예산으로도 국가 간 전력망과 국방 인프라, 친환경 기술, 산업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모두 개별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유럽연합 집행 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이미 자체 수입 방안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는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 ETS) 및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 기업 예산 분담(Corporate Resource for Europe, CORE, 유럽 시장 통합으로 인한 수혜 대기업의 분담금) 등으로 인한 수입이 포함돼 있다. 이를 통해 연간 200억 유로(약 33조원)의 예산을 확충하면 연방세와 함께 전략적 의사결정을 실행할 여력이 확보된다.
‘연방 정부 역할’ 하려면 ‘연방 예산 있어야’
EU 차원의 과세가 회원국들의 자주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자주권은 위기 때마다 지도자들이 임시변통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더 약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위한 500억 유로(약 83조원)를 조달하기 위해, 또는 동결 자산을 해제하기 위해 벌어진 혼란은 EU 예산이 각국의 동의에 의존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여실히 보여줬다. 베푸는 국가와 수혜를 입는 국가가 고정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장애물이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투명성이다. 조건과 규칙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을 통해 유럽 차원의 합의된 목표와 지역 발전을 조화시킬 수 있다.
유럽의 산업 침체도 문제에 긴급성을 더한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독일의 제조업 불황은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등으로 영향이 번지고 있다. 각국이 경기 회복에 골몰하면서 단일 시장 전망마저 훼손될 판이다. 연방세와 조건부 예산 편성을 통한 EU 차원의 조치만이 공정한 경쟁을 유지하는 가운데 친환경 및 디지털 전환을 이끌 수 있다.
탈탄소화와 국방력 증대, 인공지능(AI) 경쟁, 연합의 확장까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지금처럼 EU가 ‘연방 흉내’에 머물러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다. 회원국들은 유럽의 비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원하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Let’s Stop Pretending: The EU Needs an EU Federal Tax or It Should Drop the Federal Act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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