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철강 산업, 고부가 전환 희망마저 전기료 부담에 ‘그림의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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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 지정 ‘고부가’ 전환 등 경쟁력 강화 필수지만 ‘반쪽짜리’ 철강 지원책에 업계 한숨

중국발 공급과잉과 양적 확대에만 편중된 산업 전략으로 인해 국내 주요 철강벨트가 빠르게 침식되고 있다. 한때 제조업의 메카로 불린 포항, 광양은 산업 경쟁력 악화로 일자리가 줄어들며 유령도시가 될 처지다. 정부는 이들 제조업 심장부를 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잇달아 지정하고 산업 고도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정작 철강사들의 부담 완화 대책은 빠져 있어 실효성 대한 의문이 뒤따른다.
2년간 긴급경영안정자금·고용안정 등 지원
20일 산업통상부는 산업위기대응심의위원회를 열어 광양을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했다. 광양은 수십 년간 철강을 기반으로 산업을 발전시켜 온 곳으로 충남 당진, 경북 포항과 함께 국내 3대 철강 도시로 불린다. 올 들어 5월과 8월에 석유화학산업 위기로 전남 여수와 충남 서산이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선정된 바 있다. 철강산업 위기로는 8월 포항에 이어 광양이 두 번째다.
산업부에 따르면 광양은 2027년 11월 19일까지 2년간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된다. 우선 광양 소재 기업들은 긴급경영안정자금과 지방투자촉진보조금 우대 등 강화된 지원을 받는다. 긴급경영안정자금은 지역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일시적인 경영 애로를 겪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정책자금이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은 10억원 한도 내에서 5년간 3.71%의 금리로 자금을 지원한다. 또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7,000만원 한도 내에서 5년간 2.68%의 금리로 자금을 지원한다. 이 밖에 중소기업에는 만기 연장과 상환 유예 등 금융 혜택이 제공된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은 협력업체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우대 보증 지원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또한 지방에 공장을 신증설하거나 본사를 이전하는 기업을 상대로 입지 보조금(토지 매입비), 설비투자 보조금(기계·장비 투자 비용) 등을 현금으로 지원하는 지방투자촉진보조금을 확대된다. 대기업이 광양 지역에 설비 투자를 하면 기존에 4~9%였던 보조금 비율이 최대 12%까지 올라간다. 중견기업은 입지 보조금이 종전 5~25%에서 30%로, 설비투자 보조금이 6~12%에서 20%로 인상된다. 중소기업의 경우 입지 보조금은 9~40%에서 50%로, 설비투자 보조금은 8~15%에서 25%로 확대된다.
철강과 그 전후방을 영위하고 있는 중소·중견기업에 대해서는 이차보전 지원에도 나선다. 이차보전이란 차주가 지불해야 하는 이자의 일부를 대신 지급해주는 제도다. 정부는 이차보전 한도를 기업당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늘렸다. 아울러 인력 양성 등 맞춤형 지원도 병행할 예정이며, 이와 함께 지역이 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R&D), 경영자문, 고용안정 등 각종 지원사업에 대해서도 내년 이후 예산에 적극 반영해 나갈 방침이다.

양적 확장에만 집중한 산업 전략, 한계 봉착
광양이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된 데는 중국발 철강 과잉 공급이 영향을 미쳤다. 1억4,000만 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중국은 부동산과 건설 경기 침체로 철강 생산량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한국, 일본 등 주변국으로 저가 밀어내기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조선업에 주로 사용되는 후판(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열연강판)뿐 아니라 자동차·철근 등 제조업 전반에 널리 쓰이는 열연강판, 컬러강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국내로 대거 유입됐다. 이 여파로 포스코는 지난해 포항 1제강 공장과 1선재 공장을 폐쇄했고, 현대제철도 지난 6월 포항 2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2019년 7,141만 톤에 달했던 국내 조강 생산량은 지난해 6,365만 톤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주요 공장들이 생산량을 줄이고 문을 닫으면서 포항과 광양 지역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희망퇴직 등으로 직원들이 떠나며 기자재 업체를 비롯해 숙박업, 요식업 등 공장에 기대 사업을 하던 소상공인들이 모두 위기에 처했다. 특히 광양의 경우 포스코가 국내 최대 규모 단일 공장인 광양제철소를 운영하는 곳으로, 사실상 ‘포스코의 도시’로도 불린다. 광양 인구 10분의 1 이상이 포스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포스코가 생산한 철강재를 가공하거나 철판, 철근을 유통하는 기업도 200곳에 달한다.
중국발 과잉공급에 더해 지나친 선도기업 중심의 시장 구조도 철강 위기를 가속했다. 선도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철강 산업의 양적 성장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질적 고도화에는 방해가 됐다. 이는 현시점 한국 철강 선도기업의 경쟁력 악화와 산업 후퇴로 나타나고 있다. 철강사 간 경쟁구도가 더 왜곡돼 철강 산업 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선도기업들의 행보를 견제하며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한국 정부는 시장경제 논리에 빠져 강력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철강사 전기료 부담 가중
최근 정부가 발표한 철강산업 지원책에 대해서도 업계의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달 4일 정부는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발표하고 고로를 전기로 및 수소환원제철 설비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다탄소 업종인 철강업의 친환경 전환에 힘쓰겠다는 구상이다. 2030년까지 연산 30만 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실증 기술을 개발하고 2035년까지 실증 규모를 250만 톤으로 늘린다는 방침으로, 이를 통해 2050년 고로 11기(포스코 8기, 현대제철 3기)를 수소환원제철 15기로 전환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는 고부가·저탄소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소환원제철 상용화를 강조할 뿐, 구체적 비용 보전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전기요금 감면, 산업용 요율 조정, 피크요금 완화 등 실질적인 전력비 부담 경감 방안 역시 빠졌다. 전기로 철을 가공하는 기업들에 있어 전기요금 인상은 치명적이다. 전기로에 쓰이는 주원료인 철 스크랩과 저탄소 철강 원료 HBI(Hot Briquetted Iron)는 철광석보다 비싸고 전기 요금도 많이 든다. 그런데 철강업계의 대용량 산업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h)당 182.7원으로 2022년 1분기 105.5원 대비 3년 만에 73.2% 상승했다. 포스코의 경우 자가발전으로 일정 부분 전력을 충당하고 있지만 영세 업체들은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전기로를 중심으로 한 중견 제강사들의 부담은 더 크다. 동국제강, 세아제강, 대한제강 등 전기로 기업들은 전기요금이 원가의 절반을 차지한다. 국내에서 전기로 비율(76.05%)이 가장 높은 동국제강의 경우 지난해 전기료 납부액만 2,998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100억원 넘게 늘었다. 이에 동국제강은 전기요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상대적으로 전기요금이 싼 야간에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조업시간을 줄이거나 휴업을 결정한 중소 제강사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조업시간을 줄이는 것은 형편이 나은 편"이라며 "월급을 절반 수준으로 깎고 교육을 보내는 회사도 있고 폐업을 하는 곳도 많다"고 밝혔다. 이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철강업 비중이 큰 포항, 광양 등은 이미 폐업하는 업체가 줄을 잇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렇다 보니 업계에선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 거세다. 주요 수요처인 건설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면서 팔 곳이 사라졌다는 하소연도 이어진다. 한때 국내 시장을 잠식하던 중국산 철근조차도 갈 곳을 잃은 상태다. 유통단가가 최소 마진조차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떨어지자 중국 업체들조차 이젠 한국 대신 다른 시장을 찾아 나서고 있다. 5년 후는커녕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실정이다. 한 철강사 고위 간부는 "전기로를 늘리겠다는 정책 방향은 타당하지만 전기요금 지원 없이 가능할 리 없다"며 "결국 '탄소 줄이자'면서 조업을 멈추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