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업 ‘통합 드라이브’ 강화, 미 해군 수요에 북극항로까지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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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제안보 산업으로 조선업 재정의
고부가 선종 앞세워 미 해군 발주 겨냥
해상 루트 다변화, 조선업 재부상 필요성

일본이 기업 간 통합과 합병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조정하고 나서면서 기존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산업계 내부의 협력 구도에도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정책 방향은 해외 경쟁 압력이 커진 상황에서 기업 간 정보 교환과 공동 조달 범위를 넓혀 대응 속도를 높이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는 1조 엔(약 9조4,000억원) 규모의 민관 투자 계획을 마련해 조선업 설비 현대화와 생산 기반 복원을 추진하고 나섰으며, 선박 부품을 특정 중요 물자로 지정해 공급 안정성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병행 중이다.
대규모 민관 합동 프로젝트 가동
21일 닛케이아시아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자국 반독점 감시 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JFTC)의 새로운 정책 지침을 통해 조선업 분야에서 기업 간 합병을 허용할 예정이다. JFTC는 전날 경제산업성 유관 전문가 회의에서 이 같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며 연내 구체적인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해외에 유력 경쟁자가 존재해 경쟁 침해 우려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국내 과점 구조라 하더라도 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일본이 조선업을 기존 시장 경쟁 규율이 아닌 전략적 산업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시사했다.
새로운 지침에는 희토류 등 주요 원자재의 안정 조달을 위한 기업 간 공동 조달과 정보 교환 허용도 포함된다. 주요 원자재를 둘러싼 해외 의존도가 높아 공급망 차질 위험이 반복되는 만큼 관련 정보 공유가 경제안보 목적에 부합할 경우엔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다. 그간 일본 기업들은 규제 리스크를 이유로 공동 조달이나 통합 논의에 소극적이었으나, 이번 해석 전환이 실행되면 기업 행동 양식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국제 공급망 경쟁이 강화되는 시점에서의 정책 변경은 일본이 조선업 관련 정보를 폐쇄적으로 관리하던 기존 관행을 조정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변화로 평가된다.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확정한 1조 엔 규모의 민관합동 투자 계획은 공정위의 합병 허용 방침과 맞물리며 산업 재편 로드맵의 중심축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해당 투자 계획에서 일본은 △조선소 현대화 △국가 주도 조선소 설립 및 민간 임대 추진 △인재 육성 △연구개발(R&D) 강화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고, 2035년까지 선박 건조량을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체적 목표 또한 밝혔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생산기반 노후화와 인력 부족이 동시에 심화된 산업 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설비 현대화와 R&D에 집중 지원을 투입하겠다”고 설명했다.
韓·中에 빼앗긴 시장 재탈환 시도
조선업을 두고 일본이 규모의 경제 확보와 생산능력 확충에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데는 미국의 조선 수요 확대와 해군 전력 재정비라는 외부 요인이 짙게 작용했다. 세계 시장 내 경쟁력을 잃은 최근 20여 년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 확대 국면이 열리자, 다시 공급망에 편입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그간 일본 조선 업체들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친환경 선박 등 고부가가치 선종 분야에서 한국 대비 기술 경쟁력이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중국의 대량생산 체제에까지 밀려 시장 점유율이 급락한 바 있다.
영국 조선·해운 전문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의 집계에서 글로벌 조선 시장 내 일본의 점유율은 2001년 38%에서 2024년 13.1%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중국은 5.8%에서 54.7로 뛰었고, 한국은 소폭의 하락이 있었지만 28% 안팎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세계 2위를 지켰다. 일본 정부가 조선업을 경제안보 핵심 산업으로 재정의한 배경은 이처럼 불리한 위치를 재반전시키겠다는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시장 수요가 미국 해군 수요 확대와 맞물릴 경우, 일본 조선업의 재편 속도를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의 핵심에는 LNG 운반선 중심의 국가조선소 구상이 자리한다. 일본 정부는 최대 800억 엔(약 7,500억원)을 투입해 국가 주도의 대형 조선소를 설립하고, 핵심 기반 설비를 구축한 뒤 민간 조선사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일본 최대 전력회사 JERA가 최근 미국과 체결한 연간 550만 톤 규모의 장기 LNG 도입 계약과 직결된다. 늘어나는 LNG 물량을 감당하려면 대규모 신조 발주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부 투자와 민간 역량을 결합한 국가조선소 전략은 산업 재편의 중추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은 이러한 전략을 미국과의 조선산업 협력 확대와 연결하려 한다. 미국이 해군 쇄빙함, 자동차 운반선(PCTC), LNG선 등에서 대체 공급처 필요성이 커진 만큼 동맹국의 전략적 필요를 활용해 공급망 재편의 기회를 잡겠다는 속셈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대규모 투자를 기반으로 한 생산 여력 복구와 설비 교체에 한창이며, 정부·정당·업계가 동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정책 설계를 확장하고 나섰다. 나아가 그간 일본 내부에서 꾸준히 지적된 고비용 구조와 인력 축소 등 문제 역시 기업 통합 허용이나 공동기금 조성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단계적으로 해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극항로가 바꿀 일본의 전략
일본이 조선업 부활을 게을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북극항로 개척 가능성을 꼽을 수 있다. 대만해협–말라카해협–수에즈운하로 이어지는 기존 해상 루트는 지정학적 변동에 따라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구간이 많아 일본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물류 경로 다변화를 오랜 기간 고민해 왔다. 여기에 최근에는 중국이 ‘아틱 익스프레스’ 시험 운항을 통해 북극항로의 상업화 가능성을 앞당기며 일본에 일종의 경고음을 날렸다. 북극항로가 정기 운항 단계에 근접하면 일본은 물류 효율성·운송 시간 단축·에너지 조달 안정성 등을 동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북극항로 개통 시 쇄빙선, 내빙선 같은 특수 선박 수요가 증가할 것이란 전망도 일본의 판단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내빙선을 비롯한 특수 분야에서 기술적 기반을 축적해 왔는데, 이는 한국과 중국이 점유율을 넓혀 온 시장과 달리 기술 특성이 중요한 틈새 영역에서 다시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로 작동한다. 이와 함께 암모니아·메탄올 추진선, LNG 추진선 등 친환경 선박 발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북극항로 대응력과 친환경 선종 경쟁력 확보가 함께 요구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전략은 단순 생산량 확대를 넘어 특수선 수요와 친환경 선종 전환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산업 기반 재설계에 방점을 찍고 있다. 노후 도크 재배치, 블록 조립·용접·도장 공정 자동화, 인공지능(AI) 기반 최적화 기술 적용 등으로 생산성 회복과 인력난 대응을 동시에 추구하는 식이다. 여기에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미쓰이물산 등 기업 차원의 움직임도 병행되면서 북극항로를 통한 자원 수입 실증도 진행 중이다. 이는 조선업 내부의 기술 재편 흐름이 북극항로를 통해 에너지·원자재 조달 경로를 재구축하려는 실리적 이해와도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일본 조선업의 재부상을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다. 덴마크 선박금융(Danish Ship Finance)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일본 조선소들이 충분한 수주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2027년 평균 가동률은 20% 수준까지 떨어질 수 있다”며 “이는 산업 기반 유지와 숙련 인력 보존 모두에 심각한 타격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너지·자재·노무비 부담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설비투자 리드타임과 인력 공백 문제까지 동시에 누적되면서 수주 확보 실패가 장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