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H200에 엇갈린 셈법, 빗장 푼 트럼프 vs 문 걸어 잠근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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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엔비디아 H200 중국 수출 허용, 매출 25% 정부 납부 조건 중국, 데이터센터 내 외국산 칩 배제하고 2027년 자급률 82% 목표 화웨이 등 육성해 자립 선언했지만 기술 격차와 종속 우려 여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가속기 H200의 중국 수출을 조건부로 허용하면서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미국은 수출을 허용하는 대신 매출의 4분의 1을 미국 정부에 납부하도록 하는 조건을 붙여 자국 이익을 챙기겠다는 계산이지만, 정작 중국은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AI 데이터센터에서 외국산 AI 칩을 배제하라는 지침과 함께 탈(脫)엔비디아를 공식화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조차 규제 완화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등 양측의 셈법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트럼프의 실리주의, 빗장 열되 실속 챙긴다
8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엔비디아의 H200 칩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해당 매출의 25%를 미국 정부가 가져가는 방안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도입된 고강도 대중 수출 규제를 완화하되 경제적 실익은 미국이 챙기겠다는 절충안으로 풀이된다. H200은 기존 중국 전용 모델인 H20보다 성능이 월등히 높지만, 엔비디아의 최신 주력 제품인 블랙웰(Blackwell) 시리즈보다는 한 세대 뒤처진 모델이다. 블랙웰과 차세대 루빈(Rubin) 등 최신 플래그십 칩은 여전히 수출 금지 품목으로 묶여 있어, 이번 조치는 사실상 한 세대 이전급 제품에 한정된 제한적 개방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H200 수출 완화에는 미국 반도체 업계의 우려가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황 CEO는 최근 워싱턴을 찾아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중국 시장 상실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규제 완화를 설득해왔다. 다만 그는 정작 수출 길이 열리자 “중국이 성능이 제한된 칩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앞서 지난 7월 미국이 H20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을 당시 중국 기업들은 보안 우려와 자립 기조를 이유로 신규 도입을 꺼려 실질적인 매출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이미 실적 발표와 콘퍼런스콜에서 중국 매출을 사실상 ‘0’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번 합의가 회사 입장에선 일종의 ‘무상 콜옵션’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에서 한 푼도 벌지 못한다는 전제 아래서도 3분기 매출 570억 달러(약 87조7,000억원)와 4분기 매출 약 650억 달러(약 95조5,000억원) 가이던스를 제시한 만큼, 중국 판매가 재개되면 그만큼이 통째로 상단으로 더해질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이 수입을 끝내 재개하지 않더라도 기존 사업 구조와 투자 계획에는 큰 손상이 없는 만큼, 월가에서는 손실 가능성은 제한된 반면 추가 이익 여지는 열려 있는 비대칭 구도를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렇게 보수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해서 중국 시장 자체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제재 이전까지 중국은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매출의 20~25%를 차지하는 핵심 시장이었고, 수출 규제 이후에는 이 비중이 한 자릿수 중반까지 떨어졌다. 황 CEO도 8월 실적 발표와 11월 인터뷰에서 “중국 AI 칩 시장 규모를 올해 기준 약 500억 달러(약 73조4,000억원)로 본다”며, 향후 몇 년간 연 50% 수준의 성장을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회사의 공식 전망에서는 중국 매출을 0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거대한 시장을 눈앞에 두고도 일단은 포기한 채 사업을 설계해 온 만큼, H200 수출 재개가 실제 주문과 투자 집행으로 이어질 경우 그 파급력은 단순한 분기 실적을 넘어 엔비디아의 중장기 성장 시나리오까지 흔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정치권의 반발이라는 변수도 있다. 공화당 피트 리킷츠 상원의원과 민주당 크리스 쿤스 의원은 최근 초당적으로 ‘세이프 칩스(SAFE CHIPS)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상무부가 중국·러시아·이란·북한 등에 현재 허용된 수준보다 성능이 높은 AI 칩 수출 허가를 30개월 동안 일괄적으로 거부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의 추가 규제 완화에 입법부가 견제 장치를 걸어두겠다는 뜻이다. H200 수출 허용이 발표됐지만, 의회 논쟁 결과에 따라 이번 합의가 단기 이벤트에 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동시에 제기되는 배경이다.
한편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우회·밀수 시도는 이미 현실이 됐다. 미국 법무부는 8일 ‘오퍼레이션 게이트키퍼(Operation Gatekeeper)’ 작전을 통해 H100·H200 등 고성능 GPU를 중국 등으로 빼돌리려 한 밀수 네트워크를 적발하고, 5,000만 달러(약 734억6,000만원) 이상 규모의 칩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FBI와 국토안보수사국(HSI)에 따르면 이들은 홍콩·중국 법인을 내세운 페이퍼컴퍼니와 허위 선적 서류를 동원해 제재를 피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출 허용과 금지를 둘러싼 미국의 논쟁과 별개로, 현장에서는 이미 통제와 단속의 밀고당기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의 승부수, 국가 예산 투입처엔 국산 칩 의무화
문제는 중국의 시계가 이미 엔비디아 없는 미래로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로이터통신은 11월 초 중국 정부가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신규 AI 데이터센터에 외국산 AI 칩 사용을 금지하고, 기존 센터에서도 엔비디아 제품을 단계적으로 퇴출하라는 가이드라인을 하달했다고 전했다. 사실상 국가 인프라 시장에서 엔비디아를 배제하고 국산 기술로 대체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중국이 미국산 칩을 경계하는 이유는 자립 기조뿐만이 아니다. 사이버보안 당국과 관영 매체들은 H20 등 ‘다운그레이드’ 미국산 AI 칩에 백도어나 원격 차단 기능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엔비디아는 이를 전면 부인했지만, 전략 경쟁국의 칩으로 국가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안전한가를 둘러싼 중국 내부의 불신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런 불신이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데이터센터에는 외국산 칩을 쓰지 말라”는 강한 형태의 지침으로 제도화된 셈이다.
자립 목표도 구체적이다. 모건스탠리는 중국의 AI용 GPU 자급률이 지난해 34% 수준에서 2027년에는 82%까지 급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지방정부 역시 2027년까지 데이터센터용 AI 칩 자급률 70~100% 달성을 목표로 내걸고 국유기업과 빅테크에 국산 칩 우선 구매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판 엔비디아’로 불리는 캠브리콘(Cambricon)이 최대 수혜주로 떠올랐다. 캠브리콘은 2026년 AI 가속기 생산 목표를 약 50만 개로 잡았다. 이는 2025년 예상 생산량인 14만 2,000개의 3배가 넘는 규모로, 엔비디아의 빈자리를 국산 물량으로 채우겠다는 전략이다. 최신 칩 시위안(Siyuan) 590과 690은 엔비디아 A100 성능의 80% 안팎 수준을 구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러한 자립 드라이브가 반드시 효율적인 투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방정부와 국유기업은 중앙정부가 제시한 자급률 목표를 맞추기 위해 단기간에 설비와 물량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쉽다. 그 결과 실제 수요와 무관하게 프로젝트가 남발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수율과 성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목표 달성에만 매달리는 전형적인 계획경제식 과잉 투자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술 격차라는 현실, 불편한 동거 장기화되나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여전하다.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은 중국 반도체 산업이 대규모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미세공정 장비와 설계 역량에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관영 매체의 발표와 달리 실제 생산 수율과 수익성은 낮고, 과잉 투자에 따른 부실 우려가 제기되는 등 내실이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장비 조달 문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AI 칩 제조에 필수적인 웨이퍼, 포토레지스트 등 핵심 소재와 노광기, 식각 장비는 여전히 미국, 일본, 네덜란드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미국의 장비 수출 통제가 계속되는 한, 중국이 독자적으로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에서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제약 속에서도 중국 기업들은 성능과 공정 격차를 줄이기 위해 자체 AI 칩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대표 주자는 화웨이다.
화웨이는 최신 AI 칩 어센드(Ascend) 910C를 앞세워 엔비디아 추격에 나서고 있다. 업계 추정에 따르면 910C는 FP16 기준 약 800 테라플롭스(TFLOPS), 메모리 대역폭 3.2TB/s 수준으로, 엔비디아 H100 대비 60~80% 정도의 성능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7나노 공정 기반 생산 수율은 여전히 40% 안팎에 그쳐, TSMC 4나노 공정에서 양산되는 H100·H200과는 공정·원가 측면에서 큰 격차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캠브리콘의 시위안 590·690도 비슷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시위안 590은 엔비디아 A100의 80% 수준 성능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중국 파운드리 SMIC의 관련 공정 수율은 아직 20% 안팎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능은 상당 부분 따라붙었지만, 대규모 상용화를 뒷받침할 제조 역량은 여전히 좁은 목(bottleneck)이라는 의미다.
AI 칩 성능 격차도 여전히 무시하기 어렵다. IEEE 스펙트럼 등 기술 매체들은 중국산 AI 칩들이 엔비디아 H100이나 B200급과는 성능 차이가 크고, 소프트웨어 생태계인 쿠다(CUDA)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개별 칩의 연산 속도는 따라잡을지 몰라도, 데이터센터 전체의 전력 효율과 네트워크 최적화를 포함한 시스템 성능에서는 격차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술 격차와 자립 의지 사이의 괴리는 이중 구조의 고착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공공·보안 영역은 국산 칩이, 글로벌 경쟁이 필요한 최첨단 서비스·연구 분야는 엔비디아 칩이 담당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국산화 속도와 미국의 규제 강도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노광기·식각 장비 수요가 출렁이는 만큼, 한국·일본·네덜란드 업체들은 호황과 리스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중국 AI 기업들이 겉으로는 탈엔비디아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H200을 비롯한 미국산 칩을 찾는 이중적인 행보를 당분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