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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컴 밀착이 바꾼 판도, 성능 경쟁 넘어 공급 경쟁 돌입한 삼성전자 H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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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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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대량 생산 가능성으로 약점 상쇄
‘삼성전자-SK하이닉스’ 양강 체제 열려
시장 환경 따라 HBM 상대적 매력도 변화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3E 12단에서 브로드컴과의 협력을 계기로 성능과 수율 문제를 일단락시키는 모습이다. 브로드컴의 설계 중심 사업 모델과 삼성전자의 가격·공급 유연성이 맞물리면서 HBM은 한때 ‘애물단지’로 불리던 처지에서 전략 제품으로 격상됐다. 이 과정에서 시장의 초점 또한 단순한 기술 우위를 넘어 공급 시점과 물량 조절 능력으로 이동했다. 브로드컴으로 시작된 변화가 HBM 시장 전반의 가격과 공급 전략을 다시 짜는 계기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D램 성능 개선, 성능 격차 해소

16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구글의 차세대 텐서처리장치(TPU) 설계를 대행하는 브로드컴에 삼성전자의 HBM3E 12단 제품 공급 비중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애초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HBM3E 12단을 독점 공급하거나 주력 공급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삼성전자가 성능과 수율 안정화를 이루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전언이다. 현재 두 회사는 양산 제품 테스트를 진행 중이며, 성능 측면에서 거의 동일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은 차세대 개량형 7세대(TPU 7E)에 HBM3E 12단을 장착할 예정이다.

업계는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의 사업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라고 해석했다. 그간 브로드컴은 고객사가 요구하는 사양을 충족하는 수준에서 시스템온칩을 설계한 뒤 가장 합리적인 비용으로 생산을 외주화하는 모델을 유지해 왔다. 브로드컴에 재직 중인 한 엔지니어는 “우리의 기업 정체성은 구글 같은 고객사가 원하는 스펙의 칩을 가장 합리적인 비용으로 설계해 주면서 최대한 남는 장사를 하는 것”이라며 “더 싼 값에 많은 물량을 줄 수 있는 삼성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 브로드컴을 “디자인 하우스에 가까운 기업”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삼성전자 역시 HBM3E 12단에서 후발주자라는 약점을 가격과 수율, 그리고 대량 생산 여력으로 상쇄하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지난 1년간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며 HBM 시장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준 상태였지만, 이 과정에서 제품 자체의 성능 한계를 인정하고 내부 설계부터 손봤다. 특히 HBM에 적용되는 D램(D1a)을 재설계하며 성능 편차와 수율 문제를 동시에 줄이는 데 집중했고, 이 작업이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면서 브로드컴과의 협업도 가시화했다. 이로써 한때 ‘애물단지’로 분류되던 제품이 다시 핵심 라인업으로 재편입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시장 환경 역시 삼성전자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엔비디아 중앙처리장치(GPU) 가격과 운영 비용이 급등하면서 빅테크 기업들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안 투자에 더 많은 자금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브로드컴 역시 영업이익률이 70%에 달할 정도로 높은 HBM 가격을 유지해 온 SK하이닉스 대신 삼성전자를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HBM3E 제품에서 SK하이닉스보다 공급 단가를 약 20% 낮춘 것으로 알려졌으며, 평택캠퍼스 신규 라인을 포함한 생산능력 측면에서도 추가 물량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을 앞세워 신규 고객사들을 적극 유인 중이다. 

‘추격전’에서 양강 구도로

이처럼 HBM3E 12단에서 삼성전자가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가운데 차세대 HBM4 경쟁에서도 시장 구도는 빠르게 재편되는 흐름이다. HBM4는 엔비디아가 내년에 공개할 차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 ‘루빈’ 플랫폼에 적용되는 핵심 메모리로, 초기 물량부터 공급 안정성과 성능 검증이 동시에 요구되는 제품군이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가 요구한 내년 HBM4 물량 가운데 30% 이상을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삼성전자가 HBM3E에서 반복한 품질 인증 지연과 달리 HBM4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공급망 내 비중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HBM4 경쟁에서 삼성전자의 입지가 달라진 배경으로는 제품 구성과 생산 대응 방식의 변화가 꼽힌다. 삼성전자는 HBM4에서 자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4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을 적용한 로직 다이와 경쟁사 대비 한 세대 앞선 D램을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성전자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HBM3E와 달리 HBM4에서는 성능 요건을 안정적으로 충족시키며 공급 협상에서 조금씩 협상력을 갖추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가 HBM4 세대에서 기술 선택과 공정 조합을 통한 경쟁력 회복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아직은 SK하이닉스가 HBM4 선도 공급사 지위를 유지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9월 업계 최초로 HBM4 12단 양산 체제를 구축했고, 10월 엔비디아와 공급 협의를 진행한 뒤 최근 2만∼3만 장 수준의 초도 물량 공급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SK하이닉스는 내년에 엔비디아가 요청한 HBM4 물량 가운데 회사가 대응할 수 있는 최대치를 공급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마친 상태다. 다만 생산 능력의 한계로 인해 추가 물량 확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론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모습이다. 마이크론의 HBM4는 일부 재설계 과정에서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협상이 지연되는 조짐을 보인 바 있다. 로직 다이에 파운드리 공정이 아닌 자체 D램 공정을 활용하는 점이 성능을 제약한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HBM4 물량이 10% 미만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곧 HBM4 시장의 경쟁 구도가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심의 양강 체제로 압축됐음을 시사한다.

생산 물량 관리→가격 형성 직결

이런 흐름 속에서 HBM4 시장은 기술 우위보다 공급 시점과 생산 물량 조절이 가격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단계로 진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SK하이닉스의 HBM4 램프업 전략 변화다. SK하이닉스는 당초 HBM4를 내년 2월부터 양산하고 2분기 말부터 생산량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이를 수정해 양산 시점을 내년 4월께로 늦추고 생산 확대 역시 탄력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엔비디아가 HBM4 품질 테스트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는 시점에 맞춰 물량을 빠르게 늘리겠다는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시장 상황과 고객 일정에 맞춰 공급 속도를 조정하겠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SK하이닉스의 속도 조절에는 엔비디아 루빈 칩의 본격 양산 시점이 밀릴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일부 작용했는데, 이는 HBM4의 기술적 난도 상승과 맞물린다. HBM4는 이전 세대 대비 입출력단자(I/O) 수가 2배 많은 2,048개로 늘었고, 이를 제어하는 로직 다이 역시 기존 D램 공정이 아닌 파운드리 공정에서 양산되는 탓에 복잡도가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루빈 칩 제조에 필수적인 TSMC의 2.5D 패키징 기술 ‘CoWoS’마저 병목 현상을 겪으면서 공급 일정은 더 크게 흔들리는 실정이다. 기술 완성도 못지않게 공급 타이밍 관리가 수익성과 직결되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공급 전략을 둘러싼 고민은 HBM과 범용 D램 간 수익성 비교로까지 확장되는 추세다. 내년 본격 공급을 앞둔 HBM4 36기가바이트(GB) 제품의 가격은 개당 500달러 중반대로 논의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추산한 GB당 가격은 15달러 안팎이다. 반면 PC용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16기가비트(Gb) 현물 가격은 26.3달러로 GB당 약 13달러 수준까지 올라섰고, 서버용 DDR5 RDIMM 64GB는 780달러 안팎으로 GB당 약 12달러에 달한다. 한때 4~5배까지 벌어졌던 HBM과 범용 D램의 GB당 가격 격차가 크게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고난도 파운드리 공정과 첨단 패키징을 거쳐야 하는 HBM4의 제조 원가를 고려하면, 단순 출고가가 아닌 실제 이익률 측면에서는 범용 D램의 매력이 더 커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글로벌 증권사 UBS는 지난 10월 보고서를 통해 2025년 12월~2026년 2월 기준 HBM 매출총이익률을 62%, 범용 D램 이익률을 67%로 전망했다. 나아가 2026년에는 범용 D램 이익률이 70%대를 웃돌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메모리 업체들은 D램 생산 물량을 어디에 배분할지를 놓고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HBM4 공급을 준비하는 동시에 범용 D램 투자를 병행하는 방향을 택했다. 월 65만 장 안팎으로 추정되는 업계 최대 D램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HBM4에는 코어 다이 10나노 6세대(1c) D램과 베이스 다이 4나노 공정을 적용하고, 범용 D램에서는 1b 공정을 중심으로 GDDR7, LPDDR5X 등 고부가 제품 비중을 늘리는 전략이다. SK하이닉스 역시 HBM에만 집중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내년 이천캠퍼스 공정 전환을 통해 1c D램 생산 능력을 월 14만~19만 장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술 격차가 해소된 이후의 HBM 시장은 결국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어떤 비중으로 공급하느냐’가 가격과 수익을 좌우하는 국면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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