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조’ SK하이닉스 ADR 상장 눈앞, 월가 프리미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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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나스닥 상장 절차 마무리 수순 조달 자금, EUV·첨단 패키징 투자에 집중 ADR 구조로 미국 투자자 접근성 확대 전망

SK하이닉스가 세계 최대 자본시장인 미국 나스닥 상장을 위한 등록서 수정본을 제출하며 신청 절차를 마무리했다. 수정본에는 조달 자금의 사용처와 대규모 투자 계획, 미국 투자자 접근성을 높인 구조 등이 새롭게 담겼다. 시장에서는 이번 상장을 계기로 미국 자본시장에서의 존재감을 키우려는 전략이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ADR 형태로 신주 최대 1,779만 주 발행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각) SEC 전자공시시스템에 나스닥 상장을 위한 등록서(Form F-1) 수정본을 제출했다. 수정본에는 미국예탁주식증서(American Depositary Receipt, ADR) 발행을 통해 확보하는 자금의 사용처와 중장기 국내 투자 계획, 반독점 소송 리스크 등이 포함됐다. SK하이닉스는 조달 자금을 차세대 공정을 위한 장비 도입, 국내 생산 시설 확충, 첨단 패키징 설비 투자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AI 반도체 수요 확대에 대응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메모리 생산 역량을 키우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최근 발표한 1,100조원 규모 국내 반도체 투자 계획도 등록서에 반영됐다. 다만 SK하이닉스 측은 해당 계획이 시장 수요, 고객사 투자 일정,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인허가 및 인프라 구축 협의 등에 따라 규모와 일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 재원은 영업활동으로 확보한 현금을 우선 활용하고, 필요하면 차입이나 증자 등 외부 조달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또 중장기 투자 계획이 이번 ADR 발행 자금의 사용 목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나스닥 상장을 통한 조달 자금은 국내 생산 시설과 장비 투자에 쓰되, 1,100조원 규모 투자 계획은 별도 중장기 경영 계획으로 제시한 것이다.
ADR 발행 규모 등 기존 공모 구조는 유지됐다. SK하이닉스는 신주 최대 1,779만 주를 ADR 형태로 발행할 계획이다. 이는 발행 주식의 약 2.50%에 해당한다. 공모 규모는 최대 294억7,000만 달러(약 45조8,000억원)로 제시됐다. 다만 핵심 공모 조건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수정본에서도 공모가, ADR 발행 물량, 보통주 대비 ADR 환산 비율은 빈칸으로 남았다. 공모가는 SK하이닉스와 주관사가 직전 거래가와 시장 상황을 반영해 협의한 뒤 최종 결정한다.
위험 요인(Risk Factors)에는 미국 반독점 집단소송이 새로 추가됐다. 지난달 25일 미국 소비자 14명과 중소 PC 제조업체 3곳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을 상대로 캘리포니아 북부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은 범용 D램 가격 인상이 맥북과 아이패드 등 IT 완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등록서에서 HBM 시장 지위도 제시했다. 시장조사업체 IDC 기준으로 회사는 올해 1분기 HBM 시장에서 글로벌 점유율 56.4%로 1위를 기록했다. HBM을 포함한 전체 D램 시장에서는 점유율 29.1%로 2위에 올랐다.

조달 자금 상당분 EUV 노광장비에
통상 첫 F-1은 개요만 담는다. 상장 거래소나 공모 규모, 자금 사용처처럼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핵심 정보는 상당 부분 공란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이번 수정본은 그동안 비워뒀던 항목들을 대부분 채워 넣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SEC의 1차 심사 의견을 반영했거나, 기관투자가들과의 사전 조율을 마치고 주요 조건을 사실상 확정했다는 의미다. 어느 쪽이든 상장 절차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정 신고서는 상장 구조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SK하이닉스는 ADR을 나스닥 글로벌 셀렉트 마켓(Nasdaq Global Select Market)에 상장한다. 글로벌 셀렉트 마켓은 나스닥에서도 재무 요건과 기업 지배구조 기준이 가장 엄격한 프리미엄 시장이다. ADR은 국내 보통주를 기초자산으로 발행되며, 해외 기관투자가를 중심으로 공모가 진행된다. 주관사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씨티그룹, 골드만삭스, JP모건이 맡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자금 사용 계획이다. 기존에는 '시설투자' 정도로만 적시됐던 계획이 이번 수정본에서는 구체적인 투자 항목과 규모까지 공개됐다. 조달 자금은 국내 생산시설 증설과 첨단 패키징 설비 구축에 집중 투입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첫 번째 팹(Y1)과 청주 P&T7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이 핵심 투자 대상이며, 여기에 차세대 미세공정의 핵심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가 더해진다. 특히 EUV 스캐너 도입에만 11조9,000억원을 배정했고, 장비는 2027년 말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받을 계획이다.
이 같은 자금 배분은 회사의 전략을 그대로 보여준다. AI 메모리 경쟁의 승부처가 생산능력 자체보다 미세공정과 첨단 패키징 역량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EUV 없이는 최신 D램 공정 전환도, 차세대 제품 경쟁력 확보도 쉽지 않다. 미국 상장은 이 투자를 감당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미국 투자 접근성 확대
다만 수정 신고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상장의 의미는 공모 규모를 넘어선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 투자자들이 SK하이닉스를 보다 쉽게 사고 거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분이 ADR 구조다. SK하이닉스는 원주 0.1주를 ADR 1주로 발행한다. 원주 가격이 270만원이라면 ADR은 약 27만원 수준에서 거래되는 셈으로, 미국 시장에서 투자 문턱을 낮추기 위한 선택으로 읽힌다.
실제 원주 1주 가격을 달러로 환산하면 1,740달러 안팎인데, 원주를 쪼개지 않고 ADR 상장할 경우 SK하이닉스는 시티즌스 뱅크셰어스, 샌디스크, ASML에 이어 네 번째로 주당 가격(나스닥 기준)이 높은 증권이 된다. 이 가격대는 해외 투자자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1,000달러(약 155만원) 이상의 주식들을 초고가주(four-digit stock)로 분류하는데 이 가격대는 해외투자자 입장에서도 매수 부담이 커지는 구간"이라며 "원주를 쪼개는 방식으로 ADR을 발행하면 주당 가격을 엔비디아 주가 수준(195달러대)으로 낮춰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ADR 구조가 향후 액면분할까지 고려한 설계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SK하이닉스의 액면분할 가능성은 주가가 100만원을 돌파한 이후 계속돼 왔다. 그때마다 회사 측은 "당장 계획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ADR 상장 구조를 보면 향후 액면분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주가가 지나치게 높아진 기업들이 ADR을 상장할 때 거래 단위를 낮춘 다음 한국시장에서 원주의 액면분할을 추진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SK그룹 계열사 내에서도 비슷한 전례가 있다.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ADR 방식으로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했다. 당시 주가가 117만원 수준이었지만 원주 1주를 ADR 90주로 나눠 발행하면서 주당 16.125달러에 거래를 시작했다. 이후 시장에서는 고가주 부담을 낮추기 위한 액면분할 가능성이 꾸준히 거론됐고, 실제 회사도 액면분할을 단행했다. 이후 SK텔레콤은 지금까지도 미국 투자자 기반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년 봄 ADR 상장을 추진 중인 일본 키옥시아홀딩스도 미국 시장 진출과 함께 액면분할을 검토하고 있다. ADR 구조를 통해 해외 투자자의 거래 문턱을 낮추고, 이후 원주 거래 접근성까지 높이는 방식이다. SK하이닉스는 액면분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번 구조만 놓고 보면 투자자 저변 확대와 거래 활성화를 염두에 둔 설계라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