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직후 민생 승부수” 전기요금 감세로 출발한 英 버넘 정부, 경제·복지 체계 개편에도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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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버넘 英 신임 총리, 전기요금 VAT 폐지 나서 지방 분권·재산업화 등 경제 정책 청사진도 공개 '국가 돌봄 서비스' 비롯한 급진적 복지 정책 추진 전망

앤디 버넘 신임 영국 총리가 가정용 전기요금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를 폐지하기로 했다. 고물가와 공공요금 부담으로 가계의 생활고가 심화하는 가운데, 취임 직후 곧장 물가 대책을 내놓으며 정책 대응이 늦었다는 비판을 받은 전임 키어 스타머 정부와의 차별화에 나선 모습이다. 버넘 총리는 이와 함께 △지방 분권 △재산업화 △공공주택 확충 △보편적 돌봄 체계 구축 등을 핵심 과제로 꼽고, 영국의 장기 저성장 문제 및 복지 공백을 해소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버넘 총리의 물가 대응책
21일(현지시각) 영국 총리실은 오는 10월부터 가정용 전기요금에 적용되는 부가가치세율을 현행 5%에서 0%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치로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0.1%포인트(P) 낮아지고, 영국 가구는 연간 평균 45파운드(약 9만원)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부가가치세 폐지에 따른 재정 손실은 2026∼2027회계연도 기준 8억5,000만 파운드(약 1조6,800억원)로 예상된다. 버넘 정부는 향후 3년간 18억 파운드(약 3조5,620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었던 디지털 신분증(ID) 정책을 폐기해 재원을 충당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치솟는 물가와 이에 따른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영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2.8%로 영란은행 목표치(2.0%)를 훌쩍 웃돌았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여파로 에너지 가격과 교통비가 오르고 서비스 물가도 상승세를 지속하면서, 가계가 짊어진 물가 부담이 눈에 띄게 가중되는 모습이다. 이는 실질적인 소비 여력 약화 흐름으로 이어졌다. 지난달에는 영국 소득 상위 40∼60% 가구의 공과금 등 자동이체 미납 비율이 2021년 초(0.8%)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2%까지 치솟기도 했다.
버넘 총리는 이번 감세 조치와 관련해 "나는 국민의 숨통을 틔워주고 싶다고 했고, 취임 이틀째에 이를 발표한다"면서 "에너지 요금 세금을 깎고 국민의 호주머니에 더 많은 돈을 넣어줘 희망을 되찾기 위한 즉각적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발언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버넘은 취임 직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던 스타머 전 총리의 실수를 피해 유권자들에게 일상생활을 도울 계획이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타머 정부는 2024년 7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출범했지만, 수개월 만에 유권자들로부터 '변화가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영국개혁당에 지지율 1위를 내준 바 있다.
경제·산업 부문 정책 방향
버넘 총리는 이 밖에도 앞으로의 정책 방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다수 내놓은 상태다. 우선 새 정부는 런던 화이트홀에 집중된 주택·교통·고용·산업 정책의 결정 권한과 재원을 광역 지방 정부로 넘기고, 각 지역이 여건에 따라 자체적으로 정책을 설계하도록 할 예정이다. 이러한 기조를 뒷받침하는 조직이 맨체스터에 설치될 ‘다우닝가 10번지 북부 사무소(No 10 North)’다. 버넘 정부는 총리실, 내각사무처, 재무부, 주택부 등에 흩어진 지역 성장 기능을 새로 출범한 ‘총리·내각부’에 통합하고, 관련 인력을 맨체스터로 이전하기로 했다. 버넘 총리도 매주 최소 하루를 맨체스터에서 근무할 방침이다. 지방 분권이 개별 부처가 담당하는 주변 정책을 넘어 총리실이 직접 관리하는 핵심 경제 정책으로 격상된 셈이다.
재산업화 정책도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추진될 전망이다. 버넘 총리는 각 지역이 보유한 제조업과 첨단 산업 기반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산업 육성 목표를 설정하고, 중앙정부의 공공 조달을 활용해 영국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우선 구매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과 전문 서비스가 밀집한 런던으로부터 ‘낙수 효과’를 기대하던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산업 기반이 약화한 지역에 정부가 직접 생산 역량을 구축하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정책이 등장한 배경에는 영국 경제의 고질적인 저성장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영국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연평균 1%대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제조업 쇠퇴 지역에서는 양질의 일자리와 투자가 나날이 감소하는 중이다. 버넘 총리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지 못하면 향후 증세나 지출 삭감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울러 버넘 총리는 주택 부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공공임대주택 건설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공공주택 부족으로 인해 저소득층에 지급된 주거 급여가 민간 임대업자에게 흘러가는 악순환 구조가 고착화했다는 판단에서다. 생활 필수 서비스에 대한 공공 통제도 강화된다. 수도 부문에서는 막대한 부채로 경영난에 빠진 영국 최대 수도 회사 템스워터를 특별관리체제에 편입하는 방안이 우선 검토되고 있으며, 교통 분야에서는 버넘 총리가 맨체스터시장 재임 당시 채택했던 ‘비 네트워크(Bee Network)’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 네트워크는 민영 버스 노선을 지방 정부 산하 관리 체계에 편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모델이다. 맨체스터는 이를 통해 버스 운행 비용을 종전 민영 체제보다 킬로미터(㎞)당 약 3분의 1 낮춘 바 있다.

복지 방면 과제도 제시돼
복지 부문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정책 추진이 예고된 상태다. 버넘 총리는 취임 직후 총리실에 내린 첫 번째 지시가 거리 노숙을 종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임시 숙소를 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택 공급, 정신건강 치료, 고용 지원 등을 결합한 예방 중심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버넘 총리는 교육과정을 산업 현장의 수요에 맞게 개편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에게 직업 훈련과 정신건강 지원을 함께 제공하겠다고 공언했다. 장기 실업과 정신건강 악화가 복지 급여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고 노동 시장 참여율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정부가 주거·보건·교육 분야에 선제적으로 개입해 장기적인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예방국가’ 구상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성인 돌봄 체계의 전면 개편도 예고됐다. 현재 영국은 2만3,250파운드(약 4,600만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노인을 지방 정부의 돌봄 비용 지원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다. 상당수 고령층은 요양비를 직접 부담하고 있으며, 이를 감당하지 못해 평생 모은 자산이나 주택을 처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버넘 총리는 사회적 돌봄 문제를 임기 중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꼽고, 국가가 돌봄 비용을 부담하는 보편적 ‘국가 돌봄 서비스’ 구축을 서두르겠다고 밝혔다.
국가 돌봄 서비스의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식이 아직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버넘 총리가 보건부장관으로 재직하던 2009~2010년 제안한 이른바 ‘국가 돌봄 부담금’ 구상이 재차 주목받고 있다. 당시 버넘 총리는 기존 상속세 체계를 개편하고, 사망자의 유산에 약 10%의 정률 부담금을 부과해 돌봄 서비스를 무상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이를 ‘사망세’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설상가상으로 201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면서 해당 제안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 그러나 버넘 총리는 이후에도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지난 5월에도 “2010년 제안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재차 공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