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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설계 필수 도구 EDA 수출 중단
중국은 AI 칩 선제적 비축에 성공
무역·산업에서 협상과 압박 오가는 양국

미국이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의 대중 수출을 전면 중단시키며 기술 제재 수위를 끌어올렸다. 이에 따라 하드웨어에 국한됐던 기존 조치가 소프트웨어, 나아가 전체 생태계로 확대되며 양국의 기술 패권 경쟁도 다시 격화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칩 비축 및 효율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제재의 지속과 범위 확대 여부에 따라 장기적인 기술 자립 로드맵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中 ‘차세대 AI 칩 자체 개발’ 견제 목적
29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지난 23일 복수의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공급업체에 중국 고객사에 대한 출하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해당 서한을 받은 기업에는 케이던스(Cadence Design Systems), 시놉시스(Synopsys) 등 자국 기업은 물론 독일의 지멘스(Siemens) 등 일부 해외 기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EDA 소프트웨어는 반도체 설계 과정을 자동화하는 도구로, 첨단 칩 설계는 물론 전력 조절용 단순 부품 설계에도 폭넓게 활용된다. 이 때문에 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음에도 차세대 반도체 설계·검증에 필수적인 기술로 꼽힌다. 이번 수출 제한 통보를 받은 케이던스, 시놉시스, 지멘스 등 3개사는 중국 EDA 시장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의 기존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가 하드웨어 위주였다면, 이번 조치는 칩의 동작 원리와 설계 과정 자체를 봉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며 미국 제재를 우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 틈새마저 봉쇄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칩을 무사히 확보하더라도 이를 활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필수라는 점에서 이번 조치는 매우 효과적인 제재 수단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 상무부는 EDA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AI 학습과 고성능 연산에 특화된 기능을 중심으로 수출 제한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BIS 관계자는 “중국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수출 품목을 재검토 중”이라며 “일부 품목은 기존 수출 허가를 일시 정지하거나, 재검토가 끝날 때까지 추가적인 허가 요건을 부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AI 전략 순항 중”
미국이 규제 대상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확장한 것은 단기적 제재 차원을 넘는 전략적 전환으로 해석된다. 기존 제재가 하드웨어 반입 차단에 그쳤다면, 이제는 중국의 기술 내재화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조치가 시작된 셈이다. 이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여전히 설계와 제조 기술에서 취약한 측면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소프트웨어를 조이는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조치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중국이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의 반도체 견제를 예상하며 주요 기업들에 AI 칩을 선제적으로 비축하게 한 탓이다. 텐센트와 알리바바, 바이두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수세대에 이르는 AI 모델 개발이 가능할 만큼 충분한 칩을 확보했으며, 현재는 알고리즘 최적화와 모델 경량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칩 사용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텐센트는 비축한 칩을 이미 광고 사업과 콘텐츠 추천 시스템 같은 즉각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에 활용 중이며, 이를 통한 대규모언어모델(LLM) 훈련 또한 시작한 상태다. 리우츠핑 텐센트 총재는 올해 1분기 실적발표회가 열린 지난 14일 투자자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미국의) 규제를 완전히 준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면서 “AI 전략 또한 하나둘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반도체 칩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자원인 만큼 소프트웨어의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 비축만으로 장기적인 기술 개발을 이어가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EDA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신제품 개발과 제조 공정 전반에 필수적인 인프라로 분류된다. 이는 해당 소프트웨어 부재 시 칩의 설계 및 수정, 테스트, 양산까지의 전 과정이 지체되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축된 칩이 영구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기술 격차와 고도화된 설계 역량의 공백이 드러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된 평가다.
상호 협력 가능성 뒤엎은 미국, 불확실성↑
한편, 외교계도 이번 사안을 눈여겨보는 모양새다. 양국은 이달 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고위급 무역 회담을 갖고 90일간의 관세 유예 조치에 극적으로 합의한 바 있다. 또 상대국을 향한 고강도 규제를 완화 또는 철회하기 위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만인 13일 미국 BIS는 “화웨이 어센드 칩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의 수출 통제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수출 통제 강화를 예고했다.
양국은 이 문제로 다시 충돌했다. 지난 15일과 16일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한 중국의 통상 협상가 리청강은 “미국이 국가 안보를 과도하게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미국의 제조 역량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 조치”라고 응수했다. 이후 양국의 대화는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않고 멈춰 있는 상태다.
결국 이번 조치로 양국의 갈등 또한 다시 불붙을 전망이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이 추가로 장비·소재·전문 인력 교류까지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만큼 중국의 기술 자립 로드맵에도 상당한 차질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경쟁 구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EDA 소프트웨어 수출 중단으로 다시 불붙은 양국의 갈등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