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산업 ‘캐즘’ 넘어 ‘암흑기’로, 전방 수요 감소에 배터리도 치명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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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전기차 ‘시장 재조정’ 단계 진입 미국·중국 보조금 축소에 전기차 수요 위축 배터리 산업 공급 과잉 직면, 투자 조정 불가피

그간 역대급 특수를 누렸던 전기차 시장이 시계 제로 상황에 빠졌다. 미국의 세액공제 폐지와 중국의 보조금 축소가 맞물리면서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은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을 넘어 암흑기에 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도 성장을 이어갈 것이란 전망에 생산능력을 크게 확충한 배터리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전기차 판매 급감과 배터리 공급 과잉이 현실화한 가운데, 전기차 산업 전반이 둔화 국면에서 조정 국면으로 급격히 전환되는 양상이다.
美 보조금 중단 여파 가시화, 미국 판매량 반토막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달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법(OBBBA·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전기차 세액공제가 폐지된 이후, 시장 전반에서 그 여파가 가시화되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 모빌리티 자료를 보면 10월 미국에서 판매된 전기차는 6만4,000대로, 전월 15만 대에서 절반 이상 급감했다.
구체적으로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 8월과 9월 두 달간 미국에서 친환경차 판매를 확대하며 역대 월간 및 분기 최다 판매 실적을 갈아치웠지만, 10월 들어 전기차 판매 부진이 두드러지며 성장세가 주춤했다. 이는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앞두고 소비자들의 '막차 수요'가 몰린 데다, 완성차업계가 재고 소진을 위해 대규모 할인 등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같은 기간 포드의 전기차 판매도 전년 동월 대비 25% 감소했다. 모델별로는 머스탱 마하-E 크로스오버가 12%,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이 17% 줄었다. 토요타의 경우 전기차 모델인 ‘BZ’ 판매량이 18대에 그쳤다. 이는 전년 동월의 1,401대와 전달의 61대에서 대폭 급감한 수치다.
아직 실적 발표를 하지 않은 테슬라도 판매량에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 9월까지 미국 시장 내 테슬라 전기차 판매량은 17만9,525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 늘었지만, 4분기에는 판매량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미국 자동차 정보업체 에드먼즈의 제시카 콜드웰 인사이트 책임자는 “보조금이 사라지면서 시장이 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안착하고 있다”며 “10월은 인센티브 중심의 구매가 아니라 전기차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 기반한 시장 재조정의 시작점”이라고 평가했다.

中 전기차 지원 철폐, 전기차 성장에 브레이크
전기차 시장 재조정의 조짐은 중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국 최고 정책 입안자들은 2026~2030년 5개년 개발 계획 중 전략 산업 목록에서 전기차를 제외했는데, 이는 1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이를 두고 분석가들은 사실상 전기차 산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일찌감치 전기차 세상이 올 것이라 판단하고 자국 전기차 업체에 세제 등 혜택을 몰아줬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2009년부터 2024년까지 전기차 산업에 투입한 보조금 규모는 2,310억 달러(약 320조원)에 달한다. ‘2060년 탄소 중립’ 등 정부의 장기 정책 방향성도 전기차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을 도왔다. 그간 중국 정부는 전기차 비중을 2025년 20%, 2030년 40%, 2035년 50%로 설정하고 과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지원도 대폭 늘렸다. 중국 정부는 내수 진작을 위한 이구환신(以舊換新, 낡은 제품을 새것으로 교체 지원) 정책의 일환으로 전기차에 2만 위안(약 400만원), 내연차에 1만5,000위안(약 300만원)의 구매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량 등 신에너지 자동차를 대상으로 구매세와 소비세를 감면하는 세제 혜택도 제공된다. 이에 따라 지난 몇 년간 중국 내 전기차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기차 제조 업체들이 500여 개나 난립하며 내수 소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산과잉이 빚어졌다. 올 들어 169개까지 줄었지만 여전히 이 중 93개의 시장점유율이 0.1%에도 못 미친다. 이에 중국은 전략 산업에서 전기차를 제외하는 것과 더불어 내년 1월부터는 신에너지차 구매세를 전액 면제에서 50% 감면으로 변경하고, 차량당 최대 감면 금액도 2만 위안에서 1만 위안(약 200만원)으로 줄이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중국 경제 매체 이차이는 “보조금이 점차 감소함에 따라 올해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내년에 더욱 잔인한 경쟁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터리 공급 능력 ‘수요 2배’, 신사업 발굴 절실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보조금 축소가 배터리업계에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란 점이다.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한·중·일 배터리 기업이 계획대로 공장을 완공하면 내년 글로벌 총 생산능력은 실제 배터리 수요의 두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배터리 기업은 전기차 시장 성장률을 연 평균 30~40%로 잡았지만 현실에선 10%대에 머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기차 판매가 증가하지 않는데 배터리 공급량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건 업계에 재앙이다. 이 같은 공급 과잉 시장에선 경쟁사 물량을 빼앗는 것 외에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중국이 그렇다. 이미 전기차 핵심 시장인 유럽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 물량을 야금야금 가져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오랜 기간 공급해 온 고객사들이 중국 회사로 납품처를 바꾸고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중국보다 한 발 빨리 유럽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기업은 폼팩터를 다양화하고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비중을 높이는 전략으로 고객사 되찾기에 나서고 있다. 효율이 높은 지름 46㎜ 원통형 배터리와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를 빠르게 상용화하려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전기차 수요 둔화 앞에선 무력하다.
이에 수요처 발굴이 절실해진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로 눈을 돌리고 있다. 사실상 전기차 시장이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해 태양광 분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최근 미국에선 인공지능(AI) 붐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태양광 발전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 태양광 발전은 날씨 등에 따라 에너지 공급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이를 저장하는 ESS가 반드시 따라붙어야 한다. 미국에서 ESS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한국 3사와 일본 파나소닉 정도다.
미국 태양광산업협회에 따르면 미국 ESS 누적 설치량은 2030년 최대 700기가와트시(GWh)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설치된 ESS는 83GWh로, 앞으로 5년간 매년 100GWh가 넘는 ESS가 생긴다는 얘기다. 반면 전기차의 경우 내년 미국 신차 판매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 미만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배터리 수요량으로 따지면 연간 100~200GWh에 그친다. 250GWh인 미국 공장 생산 규모를 내년까지 약 600GWh로 늘리는 국내 배터리 3사는 결국 생산능력의 절반 이상이 공회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배터리 산업이 전기차 팽창의 시대를 마감하고 재편 국면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단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