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조 엔 쏟아도 역부족” 40년 만에 최저로 추락한 엔화, 구조적 엔저에 정책 카드도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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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2월 ‘플라자합의’ 이후 최저 BOJ 금리 인상에도 엔화 약세 못 막아 투기 세력, 9년 만에 최대 규모 배팅 구조적 요인 겹치며 엔화 추가 약세 우려

미국 달러화 대비 일본 엔화 환율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치솟는 등 엔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서고 일본은행도 31년 만에 금리를 1%로 인상했지만 엔화 약세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모습이다. 미·일 금리차와 중국발 환율 경쟁, 엔 캐리 트레이드가 엔화 약세를 떠받치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일본 정부의 개입 효과가 갈수록 제한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1986년 이후 처음으로 162엔대
1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오후 3시 기준 162엔을 웃돌며 전일 대비 상승 흐름을 이어갔다. 하루 전만 해도 엔·달러 환율은 장중 한때 161.78엔까지 올랐다. 한 번 불붙은 환율 상승은 같은 날 일본 시장으로 이어져 장중 162엔대를 돌파했다.
이번 환율 수준은 플라자합의 직후인 1986년 말과 비슷하다. 플라자합의는 1985년 미국이 일본·서독 등 주요 교역국을 상대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기 위해 체결한 합의다. 당시에는 달러 약세와 엔화 강세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달러당 엔화값이 158~163엔 수준에서 형성됐다. 현재는 같은 환율 수준이지만 과거와는 달리 달러 강세, 엔화 약세라는 정반대 흐름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엔저는 일본 경제에도 부담이 되고 있다. 원유와 천연가스, 식료품 등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수입물가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도 확대되면서 엔저에 따른 수출 확대 효과보다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당국도 과도한 엔화 약세에 민감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무역상 우위를 위해 엔화를 의도적으로 약세로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고, 미 재무부는 일본을 외환 관행 ‘관찰대상국’ 명단에 올려놓은 상태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의 경우 최근 일본은행이 금리를 인상해 엔화가 적정 수준에 도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직접 개입보다는 통화정책 정상화가 근본 해법이라는 점을 사실상 못박은 셈이다.

엔화 매수·금리 인상도 못 막는 엔저
하지만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개입에도 엔화는 여전히 약세 압력에 노출된 상황이다. 그동안 시장은 일본 정부가 언제 외환시장에 개입할지를 가장 큰 변수로 봤다. 실제 일본 정부는 2022년 이후 엔화 가치가 급락할 때마다 달러를 매도하고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했다. 환율은 단기간 수 엔씩 급락하며 개입 효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은 5월 27일까지 한 달간 엔화 방어를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인 11조7,300억 엔(약 112조2,700억원)을 투입했다. 재무성 외환보유액 데이터를 보면, 일본은 미국 국채를 포함한 해외 유가증권 보유분을 매각해 이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재무성은 엔화가 161엔선에 근접했던 4월 30일 처음 시장에 개입했는데, 트레이더들은 5월 초 황금 연휴 기간에도 간헐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개입 이후 엔화는 한때 달러당 155엔까지 강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일본은행이 지난달 16일 기준금리를 31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인상한 이후에도 상승분을 꾸준히 반납했다.
엔화 약세의 가장 큰 요인은 미·일 금리 격차다. 일본은행이 지난달 기준금리를 31년 만에 최고 수준인 1%로 올렸지만, 여전히 국제적으로는 낮은 수준이어서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계속되고 있다. 미국 금리 상승 기대가 달러 강세를 이끌면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엔화는 매도 압력을 받는 것이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를 넘는 국가부채도 부담이다.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부채비율과 만성 재정적자가 일본 자산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는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이란 전쟁에 따른 고유가도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입장에서, 달러로 결제되는 원유 수입 비용 부담이 커지면 엔화 매도 압력도 함께 높아지는 구조다. 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관한 잠정 합의에 도달했으나, 엔화 회복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하다는 평가다. 블룸버그는 "미·일 금리차와 같은 구조적인 요인이 엔화 가치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간 금리차 확대는 투자자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최신 주간 자료에 따르면 투기 세력의 엔화 순매도 포지션은 113억 달러(약 17조4,900억원) 규모로 치솟았다. 이는 글로벌 통상 마찰이 극에 달했던 2017년 11월 이후 9년 만의 최대 베팅이다.
中 위안화 절하에 엔화 방어막도 흔들
여기에 중국의 환율 정책도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변수로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확대하자 중국은 위안화 약세를 일정 부분 용인하며 수출 가격 경쟁력을 방어하는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위안화 가치가 하락하면 중국과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는 일본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 일본은 자동차와 기계, 전자, 철강 등 중국과 경쟁하는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다. 위안화 약세가 장기화될 경우 일본 기업들의 수출 채산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엔화 강세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 카드는 많지 않다. 일본은행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경우 엔화 약세를 일부 완화할 수는 있지만, 막대한 국가부채와 경기 회복세를 고려하면 공격적인 긴축은 어렵다. 반대로 금리를 충분히 올리지 못하면 미·일 금리차가 유지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는 계속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기업의 자본 국내 회귀와 국내 투자 확대, 재정 개혁을 통한 국가부채 축소 등도 장기적으로 엔화를 지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꼽히지만, 이런 구조적 처방이 효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외환시장 개입도 근본적인 해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비등하다. 재무성의 외환보유고는 5월 말 기준 1조900억 달러(약 1,689조2,820억원)에 달해 실탄은 충분하다.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도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문제는 실탄이 아니라 효과다. 우에노 쓰요시 일본생명(NLI) 리서치 인스티튜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정부가 통화 하락세를 즉각 되돌릴 수단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면서 “시장도 이를 알고 있으며, 이것이 엔화가 계속 약세를 보이는 한 이유”라고 말했다. 반복적인 개입이 근본적인 시장 역학을 바꾸지 못한다면 효용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급격한 환율 변동은 가격 책정과 환헤지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부담이 되고, 추세 지속에 베팅한 트레이더에게 손실을 안길 수도 있다는 점도 정책당국이 고려해야 할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