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 빼면 더 비싸진다" EU 통신장비 규제에 현지 통신사 반발, 장비 가격 상승·교체 비용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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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사이버보안법 개정 추진, 통신망서 '고위험 공급업체' 배제 "교체 비용 어쩌나" 유럽 통신업계 반대 목소리 커져 '소수정예' 통신장비 시장, 화웨이 배제 시 가격 경쟁 압박 급감

유럽 주요 통신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통신장비 규제에 반발하고 나섰다. 집행위가 사이버보안법(Cybersecurity Act) 개정을 통해 고위험 공급업체 장비의 신규 도입 제한·기존 설비 교체를 추진하자, 막대한 교체 비용과 투자 지연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가중된 것이다. 시장에서도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이 화웨이·노키아·에릭슨·ZTE 등 소수 업체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인 만큼, 특정 기업이 배제될 시 대체 공급자 선택지가 크게 줄어들며 통신사들에 돌아가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U, ICT 공급망 규제 강화
18일 IT업계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월 20일(이하 현지시각) 브뤼셀 본부에서 사이버보안법 개정 초안을 공개했다. 초안의 핵심은 개별 제품의 기술적 보안성을 넘어 △공급업체의 소재 국가 및 지배 구조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 △외국 정부의 개입 가능성 등 비기술적 위험까지 정보통신기술(ICT) 공급망 심사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다. EU 집행위와 회원국은 주요 ICT 공급망에 대한 공동 위험 평가를 실시하고, 구조적 사이버 보안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제3국과 관련 공급업체를 심사해 ‘고위험 공급업체’를 지정할 수 있다. 지정된 업체에는 위험 수준에 따라 △공급망 정보 공개 △공급업체 다변화 △특정 ICT 부품의 사용·설치 금지 △기존 장비 교체 등의 조치가 부과된다.
통신 분야에는 보다 직접적인 퇴출 규정이 적용된다. 초안은 이동통신·유선·위성통신 네트워크의 핵심 자산에서 고위험 공급업체가 제공한 장비와 부품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도록 했다. 특히 이동통신망 사업자는 고위험 공급업체 명단이 공개된 시점부터 최대 36개월 안에 관련 장비를 교체해야 하며, 신규 장비 도입 과정에서도 해당 공급업체 제품 사용이 제한될 수 있다. 유선·위성통신망 역시 핵심 네트워크 장비를 중심으로 교체 의무가 부과되며, 구체적인 적용 대상과 이행 기한은 집행위가 별도 시행법을 통해 정한다.
통신업계 비용 지출 부담
현지 통신업계는 이러한 집행위의 구상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오랑주(프랑스), 도이체텔레콤(독일), 텔레포니카(스페인) 등 유럽 통신사 CEO들은 최근 유럽 통신사 연합회 '커넥트유럽' 명의로 낸 '유럽의 기술 리더십을 위한 궤도 수정' 성명을 통해 "집행위가 추진 중인 개정 사이버 보안법이 유럽 통신 업계에 과도한 비용을 부과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개정 사이버 보안법에 따라 장비를 전면 교체할 경우 최대 400억 유로(약 63조4,300억원)의 비용이 발생한다"며 "광통신, 5세대 이동통신(5G), 6세대 이동통신(6G) 투자에 쓸 재원을 (장비 교체가) 빨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근 연구를 보면 (법안 개정으로 인해) 운영 차질과 고객에 대한 부정적 영향 등 추가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며 "투자 수명 주기나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인프라 교체를 밀어붙이는 전면적 규제 대신, 위험이 큰 곳에 집중하고 교체 외 대안을 검토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 같은 비용 부담에 대한 지적은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 측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GSMA는 지난 7월 도이체텔레콤, 보다폰(영국), 오랑주 등 유럽 7개 통신사업자 그룹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보고서를 공개하고, EU 통신망에서 화웨이 등 중국 업체의 장비를 제거하는 데 300억∼400억 유로(약 50조∼63조원)가 투입될 것으로 추산했다. 기지국과 기타 네트워크 장비 등 이동통신망 교체에 160억∼220억 유로(약 26조∼36조원)가 쓰이고, 전송망 장비 교체와 유선 광대역망 등에도 대규모 예산이 소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GSMA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퇴출 후 유럽 통신사업자들이 구매하는 이동통신장비 가격이 최대 24%, 유선 광대역 장비는 19%, 전송망 장비는 10% 각각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화웨이, 순식간에 에릭슨 추월
이러한 전망이 제기되는 것은 지난 10여 년 사이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이 급격히 재편됐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2010년까지만 해도 무선 통신 인프라 시장에서는 스웨덴 에릭슨이 매출 기준 34%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1위 자리를 지켰다. 당시 화웨이의 점유율은 16%로 에릭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핀란드 노키아와 독일 지멘스의 합작사인 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NSN)와 프랑스계 알카텔루슨트가 각각 13%, 중국 ZTE가 9%로 뒤를 이었다. 한국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약 3%에 그쳤다.
하지만 이 같은 격차는 오래가지 않았다. 4세대 이동통신(4G) 투자가 확대되면서 화웨이는 무선 접속망(RAN)을 비롯해 코어 네트워크, 광 전송 장비, 라우터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고, 2012년에는 글로벌 RAN 시장에서 24%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에릭슨과 사실상 동률을 이뤘다. 이후 경쟁의 중심축은 화웨이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델오로그룹 자료를 살펴보면 화웨이가 전체 통신장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약 21%에서 2018년 29%까지 상승했고, 5G 투자가 본격화한 2020년에는 31%까지 확대됐다. 같은 해 노키아와 에릭슨은 각각 15%, ZTE는 10%, 시스코는 6%, 삼성전자는 2%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표1. 화웨이의 통신장비 시장 경쟁력
| 경쟁력 | 주요 내용 |
|---|---|
| 내수 기반 | 중국의 대규모 5G 투자, 국영 통신사의 발주를 통해 안정적인 성장 기반 확보 |
| 가격 경쟁력 | 경쟁사보다 최대 20~50% 저렴한 장비 가격을 앞세워 글로벌 영향력 확대 |
| 연구개발 투자 | 내수 시장 수익을 기반으로 기술 개발 및 사업 범위 확대 |
| 시장 지배력 | 소수 업체 중심의 시장 구조 속 대체하기 어려운 공급자 지위 확보 |
| 배제 비용 | 화웨이 퇴출 시 공급자 감소에 따른 장비 가격 상승·교체 비용 확대 가능성 |
中 내수 수요가 성장 기반
시장 경쟁 구도는 최근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화웨이는 2024년에도 전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매출 기준 31%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노키아는 14%, 에릭슨은 13%를 각각 기록했으며, 이어 ZTE 11%, 시스코 4%, 삼성전자 2% 등 순이었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에도 업체별 순위는 화웨이, 노키아, 에릭슨 순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화웨이와 에릭슨의 점유율도 전년 수준을 대체로 유지했고, 노키아만이 미국의 광통신장비 제조업체 인피네라 인수 등의 영향으로 점유율을 확대했다.
이처럼 화웨이가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에서 몸집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막대한 중국 내수 수요가 있다. 중국 정부와 통신사들이 5G 네트워크 구축에 줄줄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화웨이의 성장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2020년 한 해에만 60만 개 이상의 5G 기지국이 신설됐으며, 같은 해 연말 누적 기지국 수는 71만8,000개를 넘어섰다. 당시 차이나모바일이 발주한 23만2,143개 5G 기지국 입찰에서는 화웨이가 57.2%에 육박하는 물량을 수주하기도 했다. 이는 ZTE(28.7%), 에릭슨(11.5%)을 크게 앞서는 수준이다.
통신장비 시장의 제한적 선택지
가격 경쟁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해외 시장 진출 초기 화웨이는 경쟁사보다 낮은 가격을 앞세워 통신사들의 설비 투자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택했다. 실제 2018년 한국의 5G 장비 도입 당시 업계에서는 화웨이 장비 가격이 삼성전자·에릭슨·노키아 대비 약 20~30% 저렴한 것으로 평가됐으며, 이듬해 로이터통신 역시 미국 중소 통신사들이 사용하는 화웨이·ZTE 장비 가격이 경쟁업체 제품보다 30~50% 낮다고 추산했다. 유럽 시장에서는 화웨이의 저가 공세가 기존 업체에 상당한 하방 압력을 가했다. 독일 베렌버그은행 분석에 따르면 화웨이가 유럽에 본격 진입하기 전 45~50% 수준이던 에릭슨·알카텔루슨트의 매출총이익률은 이후 30~35% 수준까지 하락했다.
화웨이는 이렇게 확보한 사업 기반을 바탕으로 연구개발(R&D) 투자 및 사업 범위를 공격적으로 확대해 시장 지배력을 갖췄고, 사실상 대체하기 어려운 주요 선택지로 자리매김했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 자체가 이미 화웨이·노키아·에릭슨·ZTE 등 소수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된 만큼, 화웨이를 배제할 경우 대체 선택지가 많지 않다"며 "EU가 화웨이를 고위험 공급업체로 지정할 시, 유럽 통신사들은 사실상 노키아와 에릭슨 등 제한된 공급업체를 통해 신규 발주와 장비 교체를 진행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이처럼 공급자 선택지가 줄어들면 과거 화웨이의 진입으로 형성됐던 가격 경쟁 압력이 약해져 비용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