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안보는 유럽이” 본토 방어·中 견제에 무게 둔 美, 러시아 억제는 유럽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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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방위 분담 압박에 러시아 도발 우려 겹쳐 유럽 자주국방 과제, 전력 확충·작전 체계 정비로 구체화 드론·AI 방어 전략부터 국경 병력 배치까지 대비 강화

미국이 유럽 주둔군 일부를 본토와 중남미로 재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며 유럽에 방위 책임 확대를 거듭 압박하고 나섰다. 유럽 동맹국들이 러시아 억제를 주도하도록 하고, 미국은 본토 방어와 중국 견제에 군사 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구상이다. 미국의 안보 역할 축소에 대비해 온 유럽도 국방비 증액과 공동 무기 조달에 이어 실전 대응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러시아의 국지적 도발 우려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드론·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방어 전략을 다듬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는 침공 초기부터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주력 전력을 국경 인근으로 옮기고 있다.
미 국방부, 중남미 군사활동 확대 시사
6일(이하 현지시간) 미 의회 전문매체 더힐에 따르면 피트 헤그세스 장관은 3일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기자들과 만나 “에콰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등 중남미에서 우리 군의 존재감과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며 “중남미와 파트너십을 통해 경제 군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선택지를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럽이 더 많은 부담을 나눠지기를 원하고 있다”며 “일부 전력을 우리가 건설할 본국 기지로 돌아오게 하거나, 지정된 테러 조직에 대응하기 위해 서반구 내 다른 형태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안보 분담을 강조하면서 유럽 주둔군 재배치와 중남미 지역 마약 카르텔 대응 강화를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 국방부는 유럽 내 미군 병력 재배치에 대해 연말까지 6개월간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유럽 내 동맹국들에 재래식 방어 책임을 이관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헤그세스 장관은 앞서 지난달 30일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군 전력 현황과 관련한 연설을 하면서 각 주지사에게 새로운 미군 기지 유치 경쟁에 뛰어들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유럽 주둔 병력 일부를 미국 본토로 이동시키는 방안도 함께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중남미는 중국이 베네수엘라 등과 경제 협력을 확대하며 미국의 전통적인 영향권 안에서 입지를 넓혀 온 지역이다. 미국은 남미에 대규모 군기지를 두고 있지 않으나, 지난해 가을부터 중남미 마약 카르텔에 대한 군사 대응을 강화하면서 현지 병력 수요가 커졌다. 미군은 카리브해와 동태평양에서 마약 밀매에 이용된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공격해 왔으며, 최근에는 에콰도르 인근 해상에서 ‘떠다니는 급유소’로 의심받는 대형 어선 등을 차단해 선원들을 하선시킨 뒤 선박을 폭파하는 방식의 작전을 펴고 있다. 지난주에는 미군과 법 집행 인원 약 50명이 에콰도르 경찰과 함께 마약 밀매 혐의자를 소탕하기 위한 지상 급습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유럽에 방위 맡기고 군사 자원 재배분
미국의 병력 운용 구상에는 본토 방어와 대중국 견제에 군사 자원을 우선 투입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이런 기조는 지난해 2월 나토 본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국방연락그룹 회의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헤그세스 장관은 미국의 국경 안보와 중국의 위협을 거론하며 유럽 안보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유럽 동맹국들에 역내 재래식 방어를 주도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의 상당 부분을 책임질 것을 요구한 것이다. 유럽이 자체 방위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 미국은 다른 지역의 군사적 수요에 대응할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해석된다.
미국이 역할 분담을 요구하는 데는 냉전 종식 이후 달라진 유럽의 안보 지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서방과 동구권의 군사적 대치선은 분단 독일을 가로질렀다. 이후 폴란드·체코·헝가리가 1999년 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에는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을 비롯한 7개국이 합류하면서 동맹의 방어선도 동쪽으로 넓어졌다. 과거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국가들까지 서방의 집단방위체제에 편입된 만큼, 유럽도 그에 걸맞은 방위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게 미국의 시각이다.
여기에 중국의 중남미 진출은 미국이 자국 주변의 안보망을 재정비할 유인을 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9월부터 세계 주요 항만의 중국 지분을 미국·서방 기업이 인수하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 당국자들이 주목한 지역에는 파나마와 카리브해가 포함됐으며, 자메이카 킹스턴항의 중국 투자도 안보 우려 대상으로 거론됐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는 전시 군수 지원에 필요한 해운 역량이 부족하고 해외 선박·항만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판단도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는 본토와 연결된 해상 수송로와 물류 거점에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서반구에 외교·군사 자원을 투입할 필요성도 높아진다는 의미다.
표1. 유럽의 방위 책임 확대 및 재원·생산·조달 과제
| 구분 | 핵심 내용 |
|---|---|
| 지출 확대 목표 | 나토 회원국, 2035년까지 국방·안보 지출 GDP의 5%로 확대 |
| 분야별 배분 | 핵심 국방 분야에 GDP의 최소 3.5%, 기반시설 보호·네트워크 방어 등 안보 관련 분야에 최대 1.5% 배정 |
| 재원 확보 부담 | 무기 도입·병력 유지뿐 아니라 군 수송용 도로·항만 정비 비용까지 각국이 마련 |
| 이행 점검 | 매년 지출 확대 계획 제출, 2029년 증액 일정·지출 구성 재검토 |
| 생산·조달 정비 | 국가별 방위산업 분산과 상이한 무기체계로 생산 확대·연합작전 효율성 제약. 중복 투자 축소·공동 조달 확대 필요 |
| EU 금융 지원 | 1,500억 유로 규모로 공동 무기 구매와 핵심 방위 역량 확충 지원 |
| 이해관계 조정 | 자국 방산업체 육성 기조 속 공동 사업 생산 물량·거점 배분 과제로 |
나토, 2035년까지 국방·안보 지출 GDP 5%로 확대
미국이 유럽의 방위 책임 확대를 요구하면서 유럽에는 자국 방위에 필요한 재원을 직접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이 누적되고 있다. 나토 회원국들은 지난해 6월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국방·안보 관련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5%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GDP의 최소 3.5%는 병력과 무기체계 등 핵심 국방 분야에, 최대 1.5%는 주요 기반시설 보호와 네트워크 방어 등 안보 관련 분야에 배정하기로 했다. 무기 도입과 병력 유지에 드는 비용에 더해 군 수송에 필요한 도로·항만 정비 비용까지 각국이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합의 이행을 위해 회원국들은 해마다 지출 확대 계획을 제출해야 하며, 2029년에는 안보 환경과 필요한 군사 역량을 고려해 증액 일정과 지출 구성을 다시 검토할 예정이다.
이렇게 확보한 재원을 전력 확충에 효율적으로 투입하려면 국가별로 흩어진 무기 생산·조달 체계를 정비하는 작업도 시급하다. AP통신에 따르면 유럽은 방위산업이 국가별로 분산된 데다 운용하는 무기체계도 제각각이어서 생산 확대와 연합작전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미국에 의존해 온 군사 장비와 정보 역량까지 자체적으로 갖춰야 하는 만큼 각국의 중복 투자를 줄이고 공동 조달을 확대할 필요성도 커진 상황이다. 이에 EU는 1,500억 유로(약 225조8,350억원) 규모의 금융 지원으로 회원국들의 공동 무기 구매와 핵심 방위 역량 확충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다만 각국이 자국 방산업체 육성을 우선시하고 있어 공동 사업의 물량과 생산 거점을 조율하는 과정에는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러시아 침공 대비 ‘승리 전략’ 마련
유럽의 방위 자립 논의는 미군 지원 축소에 대비한 작전 체계 정비로도 이어지고 있다. 역내 병력과 장비를 유기적으로 연계해 유사시 초기 대응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에서다. 이러한 안보 여건 속에 나토도 동부전선 방어 전략을 다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알렉서스 그린케위치 나토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은 러시아의 공격을 신속히 격퇴하기 위한 이른바 '승리 이론(Theory of Victory)' 이라는 전략 문건을 작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나토 영토를 침범할 경우 나토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보다 명확히 제시하는 게 목적으로, 그린케위치 사령관은 오는 12일 폴란드에서 이 전략을 공개할 예정이다.
문건에 따르면 러시아가 나토 영토를 공격하면 나토는 지상군과 '동부전선 억제 구상(Eastern Flank Deterrence Initiative)'에 따른 전력을 결합해 진격을 저지한다. 여기엔 저비용 드론과 최소 인원으로 운용되는 시스템, AI 기반 표적 지정 기술 등이 포함된다. 특히 나토군이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한 뒤엔 적의 지휘·통제 체계를 파괴해 러시아군을 신속하고 압도적으로 격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건엔 나토의 방어적 성격과 의도하지 않은 도발을 피해야 한다는 원칙도 담겼다. 동시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에 이르지 않는 공격 행위인 '하이브리드 위협'에 회원국들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도 명시됐다. 나토가 충분한 대응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보여줘 상대가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도록 만드는 게 억제 전략의 일부라는 설명이다. 블룸버그는 이번 전략이 나토의 준비 태세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늘어난 국방비가 뒷받침하는 군사 역량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다고 전했다.
에스토니아, 러 침공 초기 저지할 ‘능동방어’ 추진
러시아의 국지적 도발 가능성도 유럽의 대응 태세 정비에 시급성을 더한다. 지난달 가디언과 인터뷰한 미할 쿠델카 체코 보안정보국(BIS) 국장은 러시아가 수개월 안에 나토 영토에 제한적으로 침입하거나 공격 주체를 위장한 도발을 벌일 가능성을 경고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 역시 러시아가 드론·미사일 공격으로 나토의 집단방위 의지를 시험할 수 있다는 정보 평가를 의회에 전달한 바 있다. 회원국들이 대응 수위와 방식에 합의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면 러시아가 이를 동맹의 결속을 흔드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다.
유럽 정보기관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러시아의 사보타주(sabotage·고의적 방해 공작) 활동 확대다. 러시아가 나토의 직접적인 군사 대응을 촉발할 정도로 수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핵심 시설을 공격하거나 불안을 조성해 서방의 대응 의지를 시험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라트비아 국가안보국(VDD)의 노르문즈 메즈비에츠 국장은 러시아의 사보타주 대상이 “무차별적인 공포 조성에서 우크라이나 지원과 직접 연관된 구체적인 표적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공격은 심리적 효과까지 함께 얻으므로 러시아로선 일거양득인 셈”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에스토니아는 도발이 실제 영토 침범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접경지역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능동방어(active defense)’ 전략에 따라 주력 전투부대인 제1보병여단의 주요 전력을 타파에서 러시아 국경과 약 50㎞ 떨어진 여흐비로 옮기고 새 군사시설을 건설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험을 토대로 침공 초기부터 국경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구상이다. 타르모 쿤들라 여단장은 FT에 국경에서 전투를 시작해 첫 교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에스토니아군은 장거리 타격 전력도 확충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공격이 시작될 경우 국경 너머 군사 목표물을 타격하는 방안까지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