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말라카 해협 범죄, 군사 대응보다 공동 감시가 답이다
입력
수정
日 에너지 수송로 안정 위한 해협 전략 군사력 아닌 법 집행 역량 강화 동남아 협력 기반 지속 가능한 안보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계 교역의 핵심 해상 운송로인 말라카 해협의 안전을 둘러싼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잇따른 해상 범죄를 모두 '말라카 해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실제 위협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말라카·싱가포르 해협에서 보고된 공격은 총 80건이었지만, 이 가운데 79건은 싱가포르 해협에서 발생했고 말라카 해협에서 확인된 사건은 단 한 건에 그쳤다. 실제 사건의 대부분은 인도네시아 영해 일부에서 저속으로 운항하는 선박을 노린 심야 시간대의 소규모 무장 강도였다.
치안 역량이 좌우한 해협 안전
아시아해적퇴치협정 정보공유센터(ReCAAP-ISC)에 따르면, 지난해 아시아 해역에서 발생한 해적 및 무장 강도 사건은 총 132건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곧바로 해상 안보 악화나 해군력 부족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국제법상 공해상 해적 행위에 해당한 사건은 두 건뿐이었고, 나머지 130건은 연안국의 내수·군도 수역 또는 영해에서 발생한 무장 강도였다. 상당수는 선원을 흉기로 위협했지만, 선박 납치나 대규모 화물 탈취를 노린 조직적 해적 활동과는 성격이 달랐다. 절반가량은 아무런 물품도 빼앗지 못했고, 실제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엔진 부품 등 소규모 물품 절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같은 양상은 해협 안보의 핵심이 군사력보다 연안국의 치안과 법 집행 역량에 있음을 시사한다. 위험 지역의 신고와 수사, 처벌 체계가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면서 범죄가 반복됐지만, 인도네시아 당국이 지난해 7~8월 용의자들을 잇달아 검거한 이후 4분기 발생 건수는 12건으로 줄었다. 역사적으로도 해적 문제를 외국 해군력 확대의 명분으로 활용하는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식민 세력은 해적 진압을 내세워 해역 통제권을 확대하며 영향력을 넓혔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동남아 국가들이 외부 해군력의 역할 확대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배경으로 남아 있다.

민간 협력 기반의 역할 분담
이 같은 이유로 일본의 역할도 연안국의 역량을 뒷받침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본은 이미 이러한 협력 모델을 추진할 기반을 갖추고 있다. 2006년 발효된 아시아해적퇴치협정(ReCAAP) 설립을 주도한 이후 싱가포르 정보공유센터를 중심으로 재정과 인력, 해상보안 역량을 꾸준히 지원해 왔다. 이 같은 협력은 연안국이 자국 해역의 치안과 법 집행을 주도하도록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동남아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역내 신뢰를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올해 발표된 일본과 말레이시아 간 협력도 이러한 기조를 보여준다. 양국 정부는 일본 해상보안청과 말레이시아 해양집행청 간 양해각서 체결을 환영했으며, 일본 해상자위대와 말레이시아 왕립해군 간 연합훈련 지속과 안보 협력 확대에도 뜻을 모았다. 그러나 협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려면 해상보안기관과 해군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해상보안기관은 구조·수색과 법 집행, 항행 안전을 담당하는 반면, 해군은 국가 간 분쟁 억제와 군사 작전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두 기능을 모두 '해양안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경우 해상 범죄 대응이 군사 경쟁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동남아 국가들과의 협력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역할은 연안국의 현장 대응 역량을 높이는 데 집중될 필요가 있다. 고성능 감지 장비와 레이더 영상, 신고 체계 등을 연계해 사건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고 수사에 활용할 수 있는 증거 확보를 지원해야 한다. 승선 검색과 디지털 증거 처리, 국경 간 사건 인계 절차를 아우르는 공동 교육도 확대가 요구된다. 검찰과 해양경찰 간 공조 체계 강화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외부 파트너는 기술과 교육을 지원하고 연안국은 지휘와 법 집행을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자리 잡을수록 협력 체계의 지속성과 상호 신뢰도 높아진다.

에너지 안보와 군사 전략의 구분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은 일본의 에너지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에너지 자급률은 2023년 기준 15.3%로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낮다.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만큼 말라카 해협의 안정은 일본의 에너지 안보와 경제 활동에 직결된다. 그렇다고 모든 해상 위험을 군사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소규모 무장 강도에 구축함을 투입하더라도, 신고 체계 미비와 야간 경계 공백, 장물 유통 등 범죄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조명과 감시 체계를 개선하고 24시간 신고망과 신속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등 연안국의 치안 역량을 높이는 편이 실효성이 크다.
해적 대응을 해군의 역할 확대와 연결하는 접근 역시 신중해야 한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동남아 국가들과 국방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해상 무장 강도와 대만해협 유사시, 미·중 군사 충돌은 발생 배경과 법적 성격, 대응 방식이 모두 다른 사안이다. 이를 모두 해양안보라는 하나의 틀로 해석하면 해상 범죄 대응과 군사 전략의 구분도 불분명해진다.
연안국 중심 해양 협력체 구축
말라카 해협 안보의 해법은 연안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지원하는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협력의 방향도 군사 체제 확대보다 현장 대응 역량 강화에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 ▲위험 항로 공동 감시 체계 구축 ▲실시간 신고 체계 운영 ▲체포·기소를 위한 국가 간 증거 공유 ▲선원과 항만 안전 지원 ▲연안 지역 대상 맞춤형 지원 사업 추진 등을 핵심 과제로 추진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해운업계의 역할도 중요하다. 선박 감시 장비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사건 발생 즉시 신고하는 것은 해운회사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관리 체계다. 또한 정부는 항만 운영 기준과 보험 제도를 활용해 최소한의 보안 및 신고 기준을 마련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위협 증가와 신고 건수 증가를 구분할 수 있는 분석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같은 협력은 일본에도 분명한 전략적 이익을 제공한다. 핵심 에너지 수송로의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협력 기반을 확대하고, 특정 국가 중심의 안보 질서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규범에 기반한 해양 질서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 군사적 위협과 해상 범죄를 동일한 안보 문제로 다루기보다 각각의 성격에 맞는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해협 안보와 역내 협력을 위한 현실적인 방향이다.
일본과 말레이시아 협력이 성과를 거두려면 해상보안기관 간 공조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에너지 안보와 해군 전략을 분리해 운영하는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 이는 말라카 해협 안보를 실제 발생하는 해상 범죄에 맞는 대응 체계로 유지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속 가능한 안보 경쟁력은 신속한 신고 체계와 실효성 있는 법 집행, 역내 국가들이 신뢰하는 공동 규범을 통해 축적된다. 일본의 해양 전략 역시 이러한 협력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때 장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Japan’s Best Route to Strait of Malacca Security Is Not a Bigger Navy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