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둔화 경고에도 긴축” ECB, 3년 만의 금리 인상 임박, 이란 전쟁이 되살린 S 공포
“성장 둔화 경고에도 긴축” ECB, 3년 만의 금리 인상 임박, 이란 전쟁이 되살린 S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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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CPI 2.5%, 서비스업 인플레 3.5%로 급등 ECB, 연속 7차 동결 후 첫 인상 가능성 경기 부양도 긴축도 쉽지 않은 유럽 경제

유럽 경제가 다시 인플레이션의 그림자에 갇히고 있다.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충격이 물가를 밀어 올리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은 약 3년 만의 금리 인상을 검토하는 상황에 놓였다. 성장률은 둔화되고 국가부채는 누적된 가운데 물가마저 다시 목표치를 이탈하면서 유럽은 또 한 번 고물가와 저성장이 맞물리는 압박에 직면하게 됐다.
유럽 물가 2023년 9월 이후 최고, 금리 인상 불가피
9일(이하 현지시간) 유럽연합(EU) 통계기구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5월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3.2%, 전월 대비 0.1% 오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유로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0%를 넘은 건 2023년 9월(4.3%) 이후 2년 8개월 만이다. 유로존 물가 상승률은 지난 1월 1.7%를 기록한 뒤 4개월째 오르면서 ECB 중기 목표치 2.0%를 한참 뛰어넘었다.
에너지 가격이 전년 대비 10.9% 뛰어오른 것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서비스 물가도 3.5%까지 올랐다. 근원 물가(식품·에너지 제외) 역시 2.5%로 1년여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주요국별로도 독일 2.7%, 프랑스 2.8%, 이탈리아 3.3%, 스페인 3.6%로 유로존 4대 경제권이 일제히 ECB 목표치인 2%를 웃돌았다. 여기에 ECB 4월 통화정책회의 의사록에서 단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급등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ECB 소비자 설문조사에서도 1년 뒤 기대 물가가 3월 2.5%에서 4월 4.0%로 수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시장은 ECB가 이달 정책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리고 연말까지 한 차례쯤 더 인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독일 주요 은행 코메르츠방크에 따르면 현재 경제 전문가 대다수는 이번 주 ECB의 금리 인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로 분류되는 야니스 스투르나라스 그리스 중앙은행 총재는 6월 회의에 대해 "금리 인상이 가장 가능성 높은 결과"라고 언급했다. 또 다른 비둘기파 게디미나스 쉼쿠스 리투아니아 중앙은행 총재도 "ECB가 행동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시장에 충격을 줘선 안 된다"고 가세했다.
연내 추가 인상 시점은 9월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딘 터너 UBS글로벌자산운용 유로존·영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향후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 커질 가능성을 막고자 금리를 중립 범위 하단에서 상단으로 옮기는 게 타당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시모나 델레 치아이 블룸버그이코노믹스 유로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3월 금리 전망에 대해 모호한 발언을 한 이후 이번 회의에선 차기 행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며 “우린 그가 과거보다 더 명확하게 2차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앞서 ECB는 지난 4월 말 정책이사회 투표에서 정책금리 3종의 금리를 연속 7차 동결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일반은행이 대출하는 대신 자금을 ECB에 예치할 때 주는 중앙은행 예치(데포) 금리는 1년 동안 2.0%에 있었다. 인플레이션 기간에 핵심 정책금리인 이 데포 금리는 2년 전 첫 금리 인하할 당시 4.0%였다. ECB는 오는 11일 금리 결정 정책이사회를 열 예정으로, 여기서 데포 금리, 주요 재융자금리, 긴급 대출 금리 등 3종의 정책 금리가 약 3년 만에 첫 인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V자 회복 기대 무너뜨린 호르무즈 봉쇄
ECB가 물가 상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의 정책적 학습효과가 깔려 있다. 당시 ECB를 비롯한 유로존 중앙은행들은 전쟁에 따른 물가 충격을 일시적 현상으로 판단했다. 전쟁이 단기간 내 마무리될 것이라는 전망이 강했고, 공급망 교란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확산될 가능성 역시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축소와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 차질이 맞물리면서 유럽은 수십 년 만의 에너지·식량 가격 급등에 직면했다. 뒤늦게 중앙은행들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섰지만 이미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뒤였다. 이후 ECB는 2022년 하반기부터 사상 유례없는 긴축 사이클을 단행해야 했고, 유럽 경제는 성장 둔화와 고물가가 공존하는 국면을 겪어야 했다.
유럽은 이에 따른 경제적 충격에서 겨우 회복해 나가고 있었지만, 이번엔 이란 전쟁이 발목을 잡았다. 이란 전쟁발 충격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비교해 파급 경로가 더 넓다는 점에서 ECB의 경계감을 키우고 있다. 전쟁 발발 초기만 해도 유럽은 급격하지만 단기적인 충격으로 경제가 V자형 곡선을 그릴 수 있다고 전망했으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이어지면서 이제는 U자형의 더딘 회복세를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실제 러시아발 충격이 유럽의 천연가스 의존 구조를 정면으로 흔들었다면, 현재의 중동 리스크는 원유·액화천연가스(LNG)·해상운송·보험료·비료 가격을 동시에 자극하는 복합 공급 충격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산 LNG 수입 비중을 크게 높여왔는데, 카타르를 비롯한 중동산 LNG 공급에도 차질이 발생할 경우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다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유럽 정책 당국이 주목하는 부분은 물가 자체보다 기대심리다. 2022년 경험은 공급 충격이 발생한 뒤 대응하는 것보다 초기 단계에서 인플레이션 기대를 억제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적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ECB가 공개한 최근 의사록에서도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상승에 대한 우려가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기대 인플레이션의 상승은 중앙은행 입장에서 실제 물가 지표보다 더 까다로운 변수로 꼽힌다. 기업들은 향후 비용 상승을 예상해 가격 인상에 나서고, 노동자들은 실질임금 방어를 위해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 경우 공급 충격에서 출발한 물가 상승이 경제 전반의 가격 결정 과정에 내재화될 수 있다.
성장 둔화·부채 부담, 재정 여력 바닥
문제는 현재 유럽 경제의 충격 흡수 능력이 과거보다 크게 약화됐다는 점이다. 먼저 물가와 성장이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호르무즈 해협 위기의 여파로 유로존의 2026년 성장률 전망을 종전 1.4%에서 0.9%로 대폭 낮췄다. 이란 전쟁 이후 발생한 에너지 충격이 기업 투자와 소비 심리를 동시에 위축시키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유로존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낮추며 에너지 가격 급등이 유럽 경기 회복세를 훼손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OECD가 최근 발표한 경제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EU의 원유 수입 5%, LNG 수입 10%, 항공유 수입 45%가 차질을 빚는 상황이다.
재정 여력 역시 넉넉하지 않다.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유로존 정부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87.8%를 기록했다. 국가별로는 그리스 146.1%, 이탈리아 137.1%, 프랑스 115.6%, 벨기에 107.9%, 스페인 100.7% 순으로 높았다. 유로존 4대 경제권 가운데 독일을 제외한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이 모두 100% 안팎의 고부채 구조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ECB가 금리 인상에 나서면 고부채 국가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럽 국채금리가 장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이자비용 증가 속도가 경제성장률을 웃돌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 집행위에 따르면 유로존 전체의 이자지출은 2021년 GDP 대비 1.6% 수준에서 올해 2.7% 안팎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초저금리 환경에서 발행했던 국채가 만기를 맞으면서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 정책의 선택지도 과거보다 좁아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유럽 각국은 에너지 보조금과 기업 지원책, 가계 지원금 등을 대규모로 투입하며 충격을 흡수했다. 2022년 이후 회원국들이 투입한 에너지 지원 규모만 누적 8,000억 유로(약 1,408조6,000억원)를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현재는 재정건전성 회복을 요구하는 EU 재정준칙이 다시 작동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 등은 이미 과도한 재정적자를 이유로 EU의 재정감시 대상에 포함된 상태다. 추가적인 경기 부양책을 동원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