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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파이낸셜] 비트코인의 진정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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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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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물 비트코인 ETF’ 미국 출시로 ‘활성화’
현금 흐름보다는 ‘독자적 기능’에 주목해야
‘유행’도 ‘보편 화폐’도 아닌 ‘안전 결제 수단’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년 미국 시장 출시 첫해에 ‘현물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spot bitcoin exchange-traded funds, 실제 비트코인 가격을 반영하는 상장지수펀드)는 순 유입금 360억 달러(약 50조원)를 모아 기록을 경신하며 비트코인 가격을 10만 달러(약 1억4천만원)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이들 상품 중 하나는 미국 역사상 자산 가치 100억 달러(약 14조원)를 가장 빠르게 달성한 관리 자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비트코인이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지구상에서 가장 규제가 심한 금융 시장에서 합법성을 확보했다는 얘기가 된다.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 펀드’ 미국 출시

하지만 아직도 오랜 논쟁은 진행 중이다. 비트코인을 배당금과 순이익에 따라 가격을 산정하는 주식처럼 취급한다면 ‘거품’(bubble)처럼 보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현금 흐름을 창출하기보다는 유용성(utility)을 수익화하는 자산에 가깝다.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믿을 수 있고 희소한 원장의 가치에 의거해 안전한 결제를 가능하게 하는 기능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트코인은 주식보다는 통화 네트워크로 취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비트코인이 일상 통화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는 비웃음과 비판이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따로 있다. 주말의 국경 간 결제나 암호화폐 거래소 내 자금 조정, 상장지수펀드의 관리 주체 변경, 암호화폐 시장 내 금융 거래와 전통 은행 시스템 간의 연결 등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수익성 아닌 유용성에 ‘방점’

지난봄 하락을 기록했지만 비트코인의 일일 거래량은 수백억 달러 규모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자기 충족적 거래(self-referential game)라고 일소하기에는 상당한 규모다. 물론 일부는 최종 결제보다는 내부 조정이나 관리 주체 변경의 성격을 띠지만, 비트코인의 결제 보장(settle assurances) 기능에 수수료를 지불하려는 최소한의 고객층은 탄탄하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비트코인의 중요성은 신규 자금이 암호화폐에 발을 들이는 경로가 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스테이블코인(Stablecoins)이 미국 달러화 연동을 통해 일상의 결제를 지배하지만, 비트코인은 희소한 가치와 검열에 대한 내성(censorship-resistant)을 포함한 통화적 가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미국과 인도가 대량의 비트코인을 보유함으로써 글로벌 자본 흐름을 이끌기도 한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를 담당한다면 비트코인은 가격 형성 기능을 맡고 있는 셈이다.

비트코인 가격(달러) 및 거래 활성화 비중(%)
주: 비트코인 가격(좌측 Y축, 청색), 최근 180일 이내 거래 비중(우측 Y축, 노랑)

특정 자산이 높은 수익률이 아니라 독자적인 유용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경우 이를 ‘합리적 거품’(rational bubbles)이라고 표현한다. 비트코인에 잘 들어맞는 표현이다. 약속된 현금흐름이 아니라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희소한 결제 기능에 따른 유동성 프리미엄에서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규제 범위 편입’으로 투자자 기반도 증가

이것이 비트코인이 침체를 겪으면서도 계속 되살아나는 이유다. 규제 영향권으로 들어온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가 분산된 수요를 끌어모아 손쉬운 거래를 선호하는 광범위한 투자자 기반을 창출하고 있다. 블록 공간(block space, 블록체인 내에서 거래를 저장하고 스마트 계약을 실행하는 용량)이 한정적이라 이용자들은 안전한 거래를 위해 높은 수수료를 지불할 의사가 있다. 비트코인의 시장 주기가 거시 경제 신호와 맞물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달러 약세 및 불확실성 확대 시기에 비트코인은 가격이 오른다.

비트코인 블록 보상(block reward) 감소 추이(단위: 비트코인)
주: 채굴에 대한 블록 보상이 줄어드는 추세로 ‘거래 수수료’ 비중이 늘어나야 함을 나타냄

이 역시 비트코인이 주식보다는 금이나 외환과 비슷한 성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유동성 프리미엄과 위험 회피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기회비용이 떨어지면 수요가 늘어난다. 이를 무시하고 투기(speculation)성 자산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트코인이 안전자산이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 투자자들은 가격 변동으로 인해 높은 손실을 기록하기도 하고, 고래(whales)라 불리는 대규모 투자자들이 시장을 주도할 수도 있다. 범죄자들이 ‘익명성’을 활용해 불법 거래에 이용하는 일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교육과 정보 공개 요구, 데이터 확보를 통해 해결해야지 무작정 일축할 일은 아니다.

‘디지털 희소성’에 기반한 ‘안전 결제 수단’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비트코인이 폰지 사기(Ponzi scheme, 투자자의 돈으로 초기 투자자의 수익을 메우는 투자 사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폰지는 수익을 돌려주기 위한 지속적인 현금 흐름을 필요로 하는데 비트코인은 그런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수익성보다 기능성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줄어든 현금 흐름을 버틸 수 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 도입을 위한 시도들이 왜 자주 실패하는 것일까? 엘살바도르의 떠들썩했던 정책도 비트코인을 소매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통화 자산이 일상 결제 수단으로 지배적 위치를 확보한 사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핵심적 역할 몇 가지를 통해 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을 둘러싼 논쟁도 발전할 필요가 있다. 일시적 유행이라고 무시하는 것과 ‘세계적 보편 화폐’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 모두 중단해야 한다. 중요한 가치는 디지털 희소성에 따른 결제 보장 기능에 있고 이것이 현금 흐름을 보장하지 않아도 가격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원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Bitcoin's Price Can Be Justified, Just Not the Way We Usually Value Things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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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EU 무역 합의는 굴욕" 성난 EU 민심,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사임론 힘 얻어

"美-EU 무역 합의는 굴욕" 성난 EU 민심,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사임론 힘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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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회원국 국민 52%, 美-EU 무역 합의 부정적으로 평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역내 신뢰 잃어
수개월 만에 재차 불신임 투표 추진 나선 유럽 의회 

유럽연합(EU) 시민 과반이 미국과의 관세 합의를 '굴욕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합의가 유럽 경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이에 더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도 빠르게 힘을 얻어 가는 추세다.

美-EU 무역 합의는 '실패'였다?

9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 싱크탱크 지정학연구그룹(GEG)의 정기간행물 르그랑콩티넝은 여론조사기관 클러스터17에 의뢰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4일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등 5개 EU 회원국에서 5,3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에 참여한 이들 중 52%가 미국과 EU의 무역 합의를 굴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2%는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으며, 안도감과 자부심을 택한 응답자는 각각 8%, 1%에 불과했다.

이번 합의가 유럽 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응답한 비율도 단 2%에 그쳤다. 반면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응답은 77%로 압도적이었다. 무역 협상을 진행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높았다. 75%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유럽의 이익을 '매우' 또는 '상당히' 나쁘게 방어했다고 평가했으며,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41%)거나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31%)는 응답도 상당히 많았다. 사임에 찬성한 응답자도 60%에 달했다.

앞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7월 말 트럼프 대통령과 대부분 EU산 제품에 15%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무역 합의를 타결한 바 있다. 또 3년 동안 7,500억 달러(약 1,044조9,750억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고 미국 경제에 6,000억 달러(약 835조9,800억원)를 투자하며, 400억 달러(약 55조7,320억원) 상당의 미국산 인공지능(AI) 칩을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7월에도 불신임 투표 진행돼

EU 내에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처음 투표를 발의한 인물은 유럽 의회에서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는 유럽 보수개혁연합(ECR)의 루마니아 출신 게오르게 피페레아 의원이었다. 그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최고경영자)와 비공식적으로 수십억 유로 규모의 백신 계약 협상을 진행한 것을 문제 삼았다.

해당 계약이 막 체결됐을 당시에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불라 CEO를 설득, 유럽에 필요한 백신 계약을 끌어냈다는 호평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신 등에서 구매 조건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왔고, 일각에서는 백신을 지나치게 많이 구매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사건은 EU 집행위원회의 투명성과 의사 결정 방식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비화했다. 일부는 이 사건에 '화이자 게이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다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불신임안은 전체 720명 의원 중 533명이 참석해 절반이 넘는 의원들의 반대(360표)로 부결됐다. 찬성은 175표, 기권은 18표였다. 불신임안이 가결되려면 투표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결과가 나온 뒤 엑스(X·옛 트위터)에 “외부 세력이 우리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분열시키려 할 때, 우리의 가치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의무”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유럽 의회, 좌우 나란히 퇴진 압박

주목할 만한 부분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불신임안이 부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재차 유럽 의회 내에서 '폰데어라이엔 사퇴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유로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유럽 의회 좌우 정치 그룹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각각 추진 중이다. 유럽의회 교섭단체 좌파(the Left) 대변인 토머스 섀넌은 "집행위원회가 노동자를 희생시키고 그린딜(녹색산업정책)을 파괴해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가치에 반하고 있다"며 불신임 발의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좌파는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이탈리아 오성운동(M5S), 스페인 포데모스(Podemos) 등 급진 좌파 정당들이 만든 교섭 단체로, 전체 의석수는 46석이다. 이에 더해 녹색·유럽자유동맹(Greens/EFA) 소속 이탈리아 의원 4명도 좌파의 불신임 투표 발의에 동참하고 교섭단체 내에서 추가 서명을 모으는 중이다. 집행위원장 불신임 투표를 부치기 위해서는 유럽 의회 재적 720명 가운데 72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극우·강경 우파 모임인 유럽을위한애국자(PfE)도 불신임안을 따로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 국민연합(RN)과 이탈리아 동맹(Lega), 헝가리 피데스(Pidesz) 등이 모여 결성한 PfE는 소속 의원이 85명이어서 다른 교섭 단체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불신임안 제출이 가능하다. PfE는 앞서 지난 7월 ECR이 주도한 불신임안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유럽 의회 규정에는 표결 이후 2개월 안에 새 불신임안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재적 10% 아닌 20%(144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첫 표결은 재적 서명 요건이 원상복구되는 10월 중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불신임 투표가 이뤄지더라도 찬성표가 탄핵 요건인 전체 투표의 3분의 2를 넘기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폰데어라이엔이 속한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이 188석을 차지한 데다, 두 번째로 의석이 많은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136석)도 불신임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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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정년 연장’ 논의, 청년 일자리 잠식에 고용시장 세대 갈등 격화 조짐

불붙은 ‘정년 연장’ 논의, 청년 일자리 잠식에 고용시장 세대 갈등 격화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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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고령화로 청년 채용 여력 축소
세대 불균형 심화 속 생산성 논란도
청년들 “기회 박탈·좌절감 누적” 호소

정치권을 중심으로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청년 고용 축소 우려 또한 속속 현실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30대 이하 청년층 고용률은 연일 하락세를 거듭 중이며, 구직 활동조차 포기한 채 ‘그냥 쉰다’는 청년은 4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학계에선 일자리 총량이 제한된 상황에서 고령층 고용 확대가 청년 세대의 기회 박탈로 이어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주를 이룬다. 정년연장이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시장 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 설계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형국이다.

기업의 ‘총보수 한도’, 청년들에겐 장벽

11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정년 연장과 주 4.5일제 도입을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올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3%에 달하는 등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만큼 정년 연장 논의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법정 정년을 65세로 단계적 연장하고, 이를 위해 연내 입법 추진 및 범정부 지원 방안 마련을 약속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법정 정년과 국민연금 수령 연령(65세) 사이의 ‘소득 공백’을 핵심 위험으로 지목하며 정책 논의를 부추겼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책 변화가 청년 고용에 미칠 파급효과에 주목했다. 노동 수급이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정년을 앞세운 장기 재직이 표준이 되면, 기업이 신규 채용 여력이 제약되는 만큼 취업 시장에서 청년층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정년 제도는 연금·복지와 직결된 사회안전망이지만, 기업의 총보수 한도라는 예산 제약 속에서 운영된다. 이는 동일 인원에게 더 긴 근속을 보장할수록 신규 채용을 위한 가용 재원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의 움직임은 이미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다. 통계청이 10일 발표한 ‘2025년 8월 고용동향’에서 지난달 지난달 취업자 수는 2,896만7,000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치만 보면 긍정적 변화로 읽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연령계층별 취업자 수 변화에서 60세 이상(40만1,000명)과 30대(9만6,000명)는 증가세를 그렸지만, 20대(-19만5,000명)는 큰 폭의 감소세를 나타냈다. 특히 15~29세 취업자는 357만1,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1만9,000명 줄어들며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중소기업의 고령화도 뚜렷하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48.6%가 50세 이상이었고, 신규 채용 계획이 없거나 줄이겠다는 응답은 44.4%에 달했다. 이는 기업들이 생산성 대비 인건비 부담과 교육·전환 비용을 함께 고려할수록 상대적으로 위험이 큰 미숙련 청년 채용을 후순위로 미루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년 연장 논의가 거세지면, 기업들로선 현행 인력의 고용 기간을 먼저 계산하고 청년 채용 규모를 줄여 총보수를 관리하는 수순에 접어들게 된다.

학계에서도 임금체계와 고용 유연성을 그대로 둔 채 정년만 늘리면 청년 고용 위축,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의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의 정년 연장 도입이 중소기업과의 임금 격차를 확대해 청년의 대기업 쏠림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청년고용 보조금의 성과 연동 △채용 의무 조건화 △산업별 인력 수급 전망에 맞춘 정원 관리 체계 등을 병행해야 하나는 조언이다. 이 같은 제도들은 정년 연장의 취지를 유지하되, 기업의 총보수 한도 안에서 청년 채용이 먼저 배제되는 구조를 차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비효율적 인력 교체도 쉽지 않아

청년층의 취업 기회 축소와 직결된 또 하나의 논란은 생산성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조사에서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4.4달러로 38개 회원국 중 33위에 머물렀다. 이는 미국(77.9달러)이나 독일(68.1달러), 일본(49.1달러) 등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뒤처지는 수준이다. 특히 연간 근로시간은 1,872시간으로 최상위권을 나타냈지만, 이 가운데 30%가량이 개인 용무와 잡담, 웹서핑, 흡연 등 이른바 ‘가짜노동’에 소비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 노동에 집중하는 시간은 1,367시간 수준에 불과했다. 이처럼 장시간 근무가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는 기업 생산성 악화는 물론 청년 고용 여력을 직접 잠식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 대비 인건비가 높은 인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저효율 구조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경직된 노동시장과 강성노조의 영향이 있다. 해고가 쉽지 않은 고용보호 체계 속에서 기업들은 위험 분산을 위해 신규 채용보다 내부 전환·경력직 채용에 의존한다. 이때 일부 노조는 생산성과 무관한 일괄적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등을 단행한다. 이러한 노조 중심의 이익 대립은 기업의 비용을 가중시키며 종국엔 청년 일자리를 좁히는 결과로 이어진다. 실제로 20여 년째 이어져 온 화물연대 파업은 지난 2022년 한 해에만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약 4조1,400억원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같은 해 20대 청년들의 임금 근로 일자리는 전년 대비 2.4% 줄었다.

세대 간 불균형도 심각한 문제로 지목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를 고려한 임금체계별 사회적 비용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에서 30년 이상 근속한 근로자의 임금은 1년 미만 근속자의 4.4배에 달한다. 이는 유럽 평균(1.6배), 일본(2.4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50대 근로자의 생산성은 30대 이하 근로자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기여와 보상이 불일치한 임금 체계가 청년들의 기회를 또 한 번 짓밟고 있는 셈이다.

저성장 장기화에 일자리 총량 한계

정치권과 학계에서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한국은행도 이례적으로 우려의 메시지를 내놨다. 한은은 ‘초고령사회와 고령층 계속근로 방안’ 보고서에서 임금 조정 없이 법정 정년만 연장하면 청년 고용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2016년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올린 이후 55~59세 임금근로자는 약 8만 명 증가한 반면, 23~27세 청년 근로자는 11만 명 감소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은이 추정한 대체효과는 고령 근로자 1명 증가 시 청년 근로자 최대 1.5명 감소였다. 한은은 “연장이 내부 연공비용을 고정비로 만들면서 신규채용 여력이 줄고, 특히 신입·주니어 포지션이 먼저 줄었다”고 짚으며 “일본식 ‘퇴직 후 재고용’을 검토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일본은 2021년부터 개정된 고령자고용안정법을 시행, 기업이 정년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퇴직자를 계약직이나 시간제 근로자로 다시 채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재고용 시 임금을 평균 40%가량 낮추는 식으로 직무를 조정했다.

아울러 한은은 저성장 국면에서는 일자리 총량의 제약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성장률이 0%대에 머무는 환경에서 정년만 늘어나면, 고용의 파이는 커지지 않은 채 장기 재직 인력의 비중만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그냥 쉬었음’ 인구의 누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일도 구직도 하지 않는 청년은 지난 8월 기준 40만 명에 달했다. 특히 30대 쉬었음 인구는 32만8,000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청년들은 정년 연장이 직업 선택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 약자인 고령자를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제도의 취지는 높이 사지만, 청년에게 돌아와야 할 기회를 고령세대가 독점하는 폐해는 피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특히 정년 연장으로 정상적인 순환 채용이 둔화되면, 청년들의 첫 일자리 진입이 늦어지는 것은 물론 경력과 임금 궤적 또한 함께 낮아지는 ‘스캐링’ 효과가 심화할 것이란 관측이다. 노동 개혁의 핵심을 정년 연장 그 자체가 아닌, 세대 간 균형을 유지하는 데 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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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대통령 ‘가짜뉴스와의 전쟁’ 선언, 징벌적 손배 상한 없는 강공 드라이브

李 대통령 ‘가짜뉴스와의 전쟁’ 선언, 징벌적 손배 상한 없는 강공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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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대통령 “가짜뉴스 악용, 배상 책임 강화해야"
허위 조작 보도에 곱절 배상, 상한 규정 없어
더 센 언론중재법 개정안 ‘윤곽’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11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회복을 위한 100일, 미래를 위한 성장’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취임 100일을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공식화했다.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해 배상액을 곱절 이상 물리되 상한선을 두지 않는 강력한 규제안을 언급하며, 언론사뿐만 아니라 유튜브 같은 온라인 플랫폼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민주당이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힘을 실어준 이번 발언은 표현의 자유와 민주적 견제 장치에 대한 균열을 예고한는 평가다.

이 대통령 “가짜뉴스가 아들 인생 망쳐”

11일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언론은 민주주의 사회의 제4부라고 불린다. 그래서 헌법에서까지 특별하고 엄격하게 보호하고 있다"며 "그런데 표현의 자유와 특별한 보호를 악용해 특권적 지위를 누리려는 아주 극히 소수의 사람과 집단이 있다. 이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 대선이 조작됐다는 음모론을 보도한 매체가 6,700만 달러(약 930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된 것을 언급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그렇게 헌법적 차원에서 아주 강력하게 보호하는 미국도 명백한 허위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아주 고액의 배상을 한다"며 "특별한 보호를 받는 만큼, 똑같은 양의 책임이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저도 사실 엄청나게 많이 당했다"며 "우리 아들이 멀쩡하게 직장 다니고 있는데, 무슨 화천대유 취직했다고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유명해져서 아직까지도 직장을 못 얻고 있다. 나한테 물어봤으면 아니라고 했을 텐데,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썼다. 일부러 그런 것"이라며 "나와 대장동 관계에 있는 것처럼 아들이 회사에 취직했다고 이름까지 써서 아주 그냥 인생을 망쳐놨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언론뿐만 아니라,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유튜브도 함께 지적했다. 그는 "일부러 가짜뉴스로 관심 끈 다음 슈퍼챗(유료 후원) 받고, 광고 조회수 올리면서 돈 버는 거 있지 않나. 그걸 가만히 놔둬야 하냐"며 "당에 언론만을 타깃으로 하지 말고, 언론이라고 특정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다.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되지 않냐"고 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중대한 과실을 징벌적 배상할 일은 아니다. 악의라는 조건을 엄격하게 하되, 배상액은 아주 크게 하자. 고의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그러는 거는 못 하게 하자"며 "형사처벌보다는 돈을 물으라는 얘기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게 제 생각이다. 제가 입법하는 건 아니니까, 의견만 당에 그렇게 주고 있다. 중과실은 대상으로 하지 말고 명백한 사안으로 제한하고, 언론을 타깃으로 하지 말고 일반적(누구나) 배상을 하게 하자는 것인데, 매우 합리적이지 않냐"고 전했다.

가짜뉴스 퍼뜨리면 ‘징벌적 배상’, 유튜브도 예외 아냐

이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 통과에 힘을 실어주는 성격으로, 여당은 추석 전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허위조작 보도로 손해가 발생한 경우 손해액의 배액(倍額·곱절)으로 배상 금액을 결정하는 ‘배액 손해배상’ 제도로, 고의·중과실 여부나 직접·인용 보도 여부 등을 고려해 차등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별도의 상한 규정도 두지 않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는 다른 법률의 경우 피해액의 최대 3~5배 수준으로 배상 규모를 정하고 있지만, 개정안에 따르면 최대 수십배에 이르는 손해배상액을 산정하는 쪽으로 개정 가닥을 잡은 것으로 파악됐다.

인용·매개에 대해서도 최소 200만~3,000만원의 배상액이 검토되고 있다. 이에 더해 보도, 인용, 매개의 파급력에 따라 최대 3배(매체력을 별도의 할증 요소로 분리할 경우 최대 4배)까지 추가 할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도 더해졌다. 이럴 경우 해당 언론사는 기본 손해액의 최대 15~20배에 이르는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이런 규제 내용은 유튜브에도 적용된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유튜브를 포함하는 방안과 정보통신망법을 동시에 개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유튜브를 통한 뉴스 소비가 늘어난 데 따른 조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3년 발표한 '허위정보 우려 상승 및 유튜브 뉴스 이용 증가'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 53%는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소비한다고 응답했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연구에 참여한 46개국 평균 30%보다 무려 23%포인트(p) 높은 숫자다.

그런데도 유튜브 규제는 유독 낮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 6월까지 유튜브, 디시인사이드, 일간베스트, 워마드, 네이버, 투디갤, 엑스(구 트위터), 에펨코리아, 카카오 등 총 9개 온라인 플랫폼에 게재된 '차별 및 혐오 정보'에 대한 시정요구는 4,137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유튜브 콘텐츠에 대한 시정요구는 단 3건(0.07%) 수준이다. 그나마 모두 2022년에 이뤄졌고 이후로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차별 및 혐오 정보는 성별, 지역,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적 주장을 뜻한다. 단 방심위 자료에는 어떤 내용이 시정요구를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혐오·차별이 아닌 가짜뉴스 규제는 법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유튜브 등의 플랫폼이 활성화되기 전인 2010년, 헌법재판소는 '전기통신기본법 47조 제1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조항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허위사실 유포나 가짜뉴스 콘텐츠 자체에 대한 규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방심위 설명이다.

“피해 구제 vs 표현의 자유 위축” 이견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시민단체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비판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헌법이 보장한 언론 자유라는 관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는 견해도 나온다. 지금도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언론중재위원회나 방심위 제재, 민사상 손해배상 같은 피해 구제 절차가 마련돼 있는데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도입하면 고위 공직자 비판 보도가 위축되고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언론계에서도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 구제책 확대 필요에는 공감하나, 자칫 언론중재법이 언론을 억제하고 위축시킬 수 있다며 법 추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민주당에 전달했다. 특히 일부 고위공직자가 자신을 향한 비판적 보도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경우 언론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위공직자가 손해배상 소송을 남발할 경우 기자 개인을 비롯해 언론사의 취재·보도행위에 대해 심리적인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피해자들은 단순 정정 보도로는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 어렵다며 실질적인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민주당 내 언론개혁특별위원장인 최민희 의원도 "2005년 언론중재 및 피해 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정 이래 법안이 여러 차례 개정됐지만 20년이 지나도록 피해자 구제 장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 구제 절차는 늦고, 배상액은 비현실적이며 모든 책임을 국민에 떠넘기는 비정상적 구조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며 "언론의 자유와 피해 구제는 결코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언론개혁특위 부위원장인 김현 의원도 언론중재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악의적 왜곡으로 국민이 본 피해는 막대했다"며 "언론중재법 개정의 가장 큰 목적은 피해자 보호"임을 강조했다. 언론인 출신이자 언론개혁특위 간사인 노종면 의원도 "언론중재법 개정은 언론 전체를 적대시해 손보려는 것이 아닌, 잘못된 보도로 피해를 본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한 법안"임을 거듭 강조했다. 복수의 언론학, 법학 교수들은 “플랫폼을 통한 허위 정보 확산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며 “악의적인 허위 보도에 한해 엄격한 요건과 기준을 마련해야 표현의 자유와 피해 구제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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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직접 시장 진출할 때" AR 안경 개발하는 아마존, 시장 반응은 '미지근'

"이젠 직접 시장 진출할 때" AR 안경 개발하는 아마존, 시장 반응은 '미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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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소비자·배송 기사용 AR 안경 개발 중
이전부터 특허 출원, 스타트업 투자 등 기술 확보 힘써 와
"이번에는 제때 낼 수 있나" 시장 일각서는 우려도

아마존이 소비자용 증강현실(AR) 안경 개발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수년간 각종 AR 기술 특허를 출원하고 관련 분야 기업에 투자를 단행한 데 이어, 이제는 자체적으로 스마트 디바이스 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양상이다.

아마존의 신규 AR 기기

10일(현지시간) IT전문매체 더 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아마존은 내부 코드명 ‘제이호크(Jayhawk)’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소비자용 AR 안경을 개발 중에 있다. 해당 기기는 한쪽 눈에 풀컬러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고, 마이크·스피커·카메라 등을 갖췄다. 제조에는 중국 업체 메타바운즈의 디스플레이 기술이 활용되며, 출시 시점은 2026년 말에서 2027년 초로 예상된다.

아마존은 물류 부문을 겨냥한 전용 AR 안경 모델도 병행 개발 중이다. 지난해 11월 개발 소식이 전해진 배송 기사용 안경 ‘아멜리아(Amelia)’는 화면에 배송지와 분류 정보를 띄워주는 기능이 적용되며, 이르면 2026년 2분기부터 현장에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초기 생산 물량은 약 10만 대 수준으로 알려졌다. 제이호크와 아멜리아는 같은 디스플레이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 중이지만, 제이호크에는 아멜리아보다 더 얇고 부피가 작은 디자인이 적용된다.

아마존의 이 같은 행보는 AR 안경을 ‘실험’에서 ‘실전’으로 끌어올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소비자용 기기는 아마존의 인공지능(AI) 음성 비서이자 에이전트인 '알렉사(Alexa)'를 통해 AI 기술과 쇼핑·미디어 기능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물류 전용 안경은 배송 효율을 높이고 업무 표준화를 가능케 해 현장 노동 생산성 혁신의 기반이 될 수 있다.

AR 기술 확보 노력 지속

아마존은 이전부터 AR 경쟁력 확보에 꾸준히 힘을 쏟아 왔다. 지난 2018년 AR 기술을 활용한 특허(등록번호:US10754418)를 출원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특허의 핵심은 매장 방문자 주위에 위치한 제품 관련 정보를 신체에서 증강하는 기술이다. 제품 이름이나 가격, 평점, 리뷰 등을 손등이나 팔 위에 표시, 가독성을 해치지 않고 제품 정보를 한데 모아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해당 특허의 등록 절차는 2020년 마무리됐다.

이에 더해 아마존은 투자를 통한 활로 모색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 5월 세계 최초로 오토포커스 안경을 개발 중인 핀란드 스타트업 이그지의 3,220만 유로(약 510억원) 규모 시리즈 A 투자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투자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시장에서는 아마존이 이그지의 차세대 안경 기술을 자사 플랫폼과 연동 가능한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보고 선제적으로 투자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 이그지의 기술이 아마존의 알렉사 등과 연동될 경우, 사용자는 단순 음성 명령만으로 안경 초점을 조절하거나 렌즈를 통해 일정을 비롯한 개인정보를 조회하는 등 직관적인 사용자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마존 입장에서는 노안, 저시력 등 불편을 겪는 고객들에게 훨씬 더 편리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메타의 AR 안경 '오라이온'/사진=메타

올가을 출시하겠다던 기기 '감감무소식'

다만 일각에서는 아마존 AR 안경의 출시 시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마존이 유사 제품 출시를 예고했다가 제 시기에 상품을 선보이지 못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3월 파노스 파나이 아마존 기기 부문 책임자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사용자에게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AI 기기를 기획 중"이라며 "이미 개발 중인 놀라운 기기가 몇 가지 있다"고 말했다. 파나이 책임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이 출시될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AR 안경과 손목 착용 기기, 이어버드 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신호를 던졌다.

당시 아마존 측은 AI 모델 알렉사를 해당 기기에 탑재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파나이 책임자는 "알렉사 플러스는 수많은 새로운 제품과 경험을 열어줄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장치를 가려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때 언급된 AI 기기는 올해 가을쯤 첫선을 보일 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도 실제 제품 출시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아마존이 넘어야 할 산이 제품 출시 시기 만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다. AR 안경 시장의 선두 주자인 메타는 연달아 시제품을 공개하며 시장의 이목을 사로잡는 중이다. 지난해에는 양쪽 눈에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오라이언(Orion)’ 시제품을 공개했고, 이번 달 예정된 메타 커넥트 행사에서는 한쪽 눈에만 화면을 구현하는 ‘하이퍼노바(Hypernova)’ 모델이 베일을 벗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존의 AR 안경이 뚜렷한 차별점을 갖추지 못할 경우, 이 같은 메타의 화제성을 이기지 못하고 시장에서 밀려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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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美 IPO 집단소송서 승소 “법적 족쇄 벗었지만, 무너진 신뢰 회복 과제로”

쿠팡, 美 IPO 집단소송서 승소 “법적 족쇄 벗었지만, 무너진 신뢰 회복 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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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주주 집단소송 기각
IPO 허위 공시 주장 퇴짜 판결
거품 논란에 따른 신뢰 훼손은 지속
2021년 3월 10일(현지시간) 쿠팡 미국 상장 당시 뉴욕증권거래소 건물에 쿠팡의 로고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사진=쿠팡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 쿠팡이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주주들을 속였다는 이유로 제기된 집단소송에서 승소했다. 해당 소송은 알리바바 이후 외국 기업이 얽힌 최대 규모의 IPO 사기 소송으로, 이번 판결을 통해 쿠팡을 둘러싼 법적 위험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투자자들의 이탈과 무너진 신뢰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美 법원 “기만했단 주장 입증 못 해”

10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버논 S. 브로데릭 남부지방법원 판사는 뉴욕시공무원연금 등 주주들이 2021년 제기한 소송에서 쿠팡과 경영진의 기만 의도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하며 사건을 기각했다. 또 상장 주관사(골드만삭스·JP모건·Allen & Co)에 대한 청구도 모두 기각하고 재소 불가(prejudice)로 판결했다. 쿠팡에 같은 내용으로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브로데릭 판사는 판결문에서 "쿠팡의 근무 환경 관련 발언은 모호하고, 납품 업체 관련 내용도 구체성이 없거나 원래 사실이거나 단순한 과장(hyperbolic)"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가격 조작 혐의도 구체적이지 않다"며 "쿠팡은 직원 리뷰 사실을 이미 공개했다"고 덧붙였다. 쿠팡은 성명을 통해 "처음부터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근거가 없다고 믿었으며, 오늘의 결정은 이러한 견해를 확인시켜 준다"고 입장을 전했다.

출처=구글 파이낸스

'작업환경 은폐·순위 조작' 의혹, 주가 하락 보상 촉구

앞서 뉴욕시 교사연금공단 등을 포함한 원고 측은 지난 2022년 8월 26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연방증권법 위반에 따른 피해 보상을 촉구했다. 소송을 주도한 원고들은 △쿠팡이 계약 업체들과 불공정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점 △ 자사의 자체상표(PB) 제품이 타사 제품보다 상단에 노출되게 알고리즘을 조작한 점 △유료회원보다 비회원에게 더 저렴한 상품을 판매한 점 등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신고서에는 회사와 직원의 사이가 원만하다고 작성했는데 쿠팡의 근무 환경은 굉장히 열악한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물류창고의 안전성에 대해서도 실태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서에는 쿠팡의 근무환경이 안전하다고 기재했지만, 물류창고 내 안전점검 시스템도 제대로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장에는 2021년 6월 발생한 경기도 이천시 덕평물류센터의 화재 사건을 예로 적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 발생 이전에 종합소방시설점검에서 스프링클러, 경보기 등 관련 결함을 지적받았으나 쿠팡은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와 물류센터 화재로 인해 상장 후 1년 안에 주가가 절반 이상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실제 쿠팡 주가는 2021년 3월 11일 상장 직후 49.25달러(약 6만8,600원)까지 올랐다가 1년 뒤인 2022년 4월 12달러(약 1만6,600원)선까지 폭락했다. 이후 2022년 5월 10달러 밑으로 떨어져 장기간 20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다가, 지난해 4월 월회비 인상 후 20달러를 넘어서면서 최근 30달러대에 거래되고 있다. 나스닥 상장 당시와 비교하면 35%가량 고꾸라졌다.

법적·제도적 부담 큰 나스닥, 소송 리스크도 상당

쿠팡은 이번 판결로 법적 리스크에서 자유로워졌지만, 투자자들의 무너진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게 됐다. 이는 나스닥 상장을 노리는 국내 기업들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실제 시장 전문가들은 나스닥을 단순히 기회의 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나스닥이 기업의 건전성과 우량함을 기준으로 3개의 시장으로 나뉘는 데다, 국내 시장 대비 상당한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나스닥 시장은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우량기업이 속한 최상위 시장인 ‘나스닥 글로벌 셀렉트마켓’과 중견 기술기업들이 속한 ‘나스닥 글로벌마켓’, 신생기업이나 중소형 기업이 상장하는 ‘나스닥 캐피탈마켓’으로 구분된다. 이 중 상대적 하위 시장인 캐피탈마켓의 경우 자본금 500만 달러(약 69억6,000억원)와 일정 주주 수 요건만 충족하면 진입할 수 있어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다.

문제는 나스닥을 노리는 국내 기업 중 다수가 진입 문턱이 낮은 캐피탈마켓으로 간다는 점이다. 캐피탈마켓의 경우 진입 장벽이 낮은 만큼 관리종목 지정 리스크도 높고, 상장 유지 요건 미충족 시 상장 폐지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시장이다. 실제 상장에 성공하고도 얼마 못 가 상장폐지 되거나, 장외 시장으로 넘어가는 곳도 적지 않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한류홀딩스와 피크바이오가 나스닥 캐피탈마켓에 상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폐 되며 상당한 투자자 손실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나스닥을 포함해 미국 증시에 상장하면 글로벌 자금 유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법적·제도적 부담도 늘어난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주주대표소송 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공시 누락이나 오해 소지가 있는 기업 설명(IR) 행위가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 자본시장 전문가는 “한국거래소가 보수적인 심사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떤 면에서는 이익을 내서 주주들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하는 상장 기업의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아예 거래소 상장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할 기업들이 해외로 가겠다는 건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상장이 곧바로 기업 신뢰나 수익성을 담보하진 않는다. 시장 구조와 상장 유지 요건, 공시 책임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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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관세 협상, 이익 없이 합의도 없어” 국익 관철 의지 강조

이재명 “관세 협상, 이익 없이 합의도 없어” 국익 관철 의지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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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양보 않겠단 의지 드러내
스위스식 맞대응 단기 충격 불가피
일본은 ‘투자-관세 합의’ 모델 선택
8월 25일(현지시각)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이 대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좋으면 사인하겠지만, 불리한 합의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강조하며 ‘노딜’ 전략을 재확인했다. 우리보다 앞서 관세 협상을 마무리한 일본은 대규모 투자와 맞바꿔 자동차 관세 15%를 확정 지은 바 있으며, 스위스는 39%의 고율 관세에도 맞불 전략을 택한 상황이다. 상반된 두 모델 사이 선택을 앞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국익을 해치는 합의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이어질 후속 협상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합의성·공정성 원칙 준수”

11일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미 관세협상 결과를 명문화하지 않았다’는 일각의 지적에 “최소한 합리적인 사인을 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며 ”좋으면 사인해야 되는데 우리에게 이익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느냐“고 반문했다. 단순히 서면 합의서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비난하는 행위를 멈춰달란 당부도 덧붙였다.

앞서 우리 정부는 지난 7월 말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했다. 상호관세는 유럽연합(EU), 일본과 같은 수준의 15%로 최종확정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고, 쌀과 소고기 추가 개방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동차 분야의 경우 그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무관세 프리미엄’이 깨지면서 EU·일본산과 동일한 관세를 적용받게 됐다. 아울러 관세를 15%로 조정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이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직접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했고, 양국의 관계 발전을 둘러싼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때도 서면 형태의 합의 문건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보다 앞서 협상을 마친 EU와 일본에 대한 팩트시트(fact sheet·협상 구체 사항을 담은 문서)를 간략하게나마 발표한 것과 상반된다. 대통령실은 “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얘기가 잘 된 회담”이라고 전하며 “경제통상 안정화, 동맹 현대화, 새 협력 분야 개척 등 3대 목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이를 두고 야권은 비판의 날을 세웠다. 박성훈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규모는 우리 국내총생산(GDP) 대비 20.4%에 달한다”며 “일본(13.1%), EU(6.9%)보다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쌀·쇠고기 추가 개방은 없었다지만, 미국의 주장은 다르다”면서 정부의 협상 발표와 실제 내용 사이 괴리를 지적했다. 명문화된 합의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회담의 성패를 논할 수 없다는 게 야권 전반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단순히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다’는 사실 전달을 넘어, 불리한 합의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그는 후속 협상 경과에 대해 “완결된 게 아닌 데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약간 부적절하고 어렵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이면 합의도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합의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무리한 요구에 강경 대응 나선 스위스

미국의 초고율 관세 압박 속에서 각국의 대응은 극명히 엇갈린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대응 방식을 택한 곳으로는 스위스를 꼽을 수 있다. 8월 초 트럼프 대통령은 스위스산 제품에 기존 31%보다 더 높은 39%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대통령이 직접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발언을 ‘도덕적 훈계’로 받아들이면서 협상이 결렬된 데 따른 결과다. 미국은 지난해 스위스와의 무역에서 385억 달러(약 54조원)의 적자를 떠안은 바 있다.

스위스의 주력 수출품은 시계와 정밀 기계, 제약품 등으로 관세 인상 직후 제조업 전반에 위기가 감지됐다. 이에 주요 제약사들은 즉각 전략을 수정하고 나섰다. 로슈와 노바티스가 대표적 예로, 이들 두 회사는 각각 500억 달러(약 70조원), 230억 달러(약 32조원) 규모의 미국 내 투자를 발표했고, 기존 대미 수출을 모두 현지 생산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향후 1년 반 안에 의약품 관세를 150~25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경고한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여타 부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와 상반된 풍경이 연출됐다. 고율 관세가 적용된 스위스 명품 시계와 유럽산 사치품을 둘러싸고 미국 내 밀수가 급증한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내 다수의 부유층과 인플루언서들이 밀반입에 가담하고 있으며, 특히 스위스 시계는 높은 관세를 피하는 것은 물론 밀수를 통해 35% 이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고가 사치품은 불법성이 명확하지 않아 세관 단속에서도 적발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이 소비자들의 행동까지 왜곡시키며 시장 질서를 흔들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스위스 정부의 ‘맞불 카드’에도 힘을 싣는다. 스위스는 미국 측이 요구하는 2,000억 프랑(약 2,500만 달러·348조원) 투자와 법인세율 조정, 국방비 지출 확대 등이 국가 재정과 기업 경쟁력에 장기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버티기’를 택했다. 그러나 기업의 미국 이전이 점차 본격화하는 만큼 해당 전략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국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할 경우 단기적 충격과 시장 왜곡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사례는 대미 협상 전략의 득실을 가늠할 중요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일본은 단기 안정에 중점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일본은 이달 5일 5,500억 달러(약 765조7,000억원) 규모의 투자 운용을 미국에 전부 위임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그 대가로 자동차 관세 15%를 문서로 확정받았다. 미국은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제조, 핵심광물, 조선 등 우선 투자 분야를 명시했으며, 투자위원회가 안건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최종 선정하도록 설계를 고정했다. 그러면서 행정명령이 관보에 게재된 뒤 7일 내 적용 지시가 가능하다는 문구까지 포함해 빠른 실무 이행의 의지를 드러냈다.

앞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투자 세부 계획과 자금 배분 메커니즘을 요구하며 협상 문서화를 유보한 바 있다. 이는 상호관세 15%라는 외곽선만 먼저 맞춘 뒤, 자동차 관세 인하 등을 지렛대 삼아 투자 약속의 규모와 운용권한까지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 일본이 수용한 안에는 미 상무장관의 상시 모니터링, 이행 정지 시 관세 및 관련 조치의 재도입 권한 등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또 미국 측의 자본 요청이 있을 때 일본이 자금을 송금하고, 선택된 프로젝트는 미국 내에서 집행되며, 수익의 대부분이 미국 납세자에게 귀속된다는 점까지 공표됐다. 자동차 관세 15%의 ‘즉시성’은 이러한 통제 장치를 수용한 결과인 셈이다.

일본은 단기적으로 자동차 관세 불안정 요인를 제거함으로써 미국 시장 내 가격 변수와 재고 리스크를 낮추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를 통해 동시에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조선, 핵심광물 같은 전략 산업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 기회 또한 열릴 것이란 관측에서다. 이 같은 시나리오에선 대규모 투자자금의 집행이 미국 내 설비 확충에 집중되더라도 일본 기업의 공급망 협력과 발주 연계 등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는 게 일본 정부의 기대다.

이러한 일본의 대응 모델은 단기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전략과 대비된다. 다만 투자 운용의 자율성이 극히 제한되고, 수익의 대부분이 미국에 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효율성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에 한국 정부 역시 스위스식 버티기 기조와 일본식 ‘투자-관세 패키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양상이다. 전자의 경우 자국 산업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지만 재정적·정책적 부담이 크고, 후자의 경우 관세 격차에 따른 판매·마진 조정이 불가피하다. 결국 한국의 선택지는 두 가지 모델 사이 균형점을 찾는 데 따라 정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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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 영풍과 'SM엔터 주가조작' 개입 여부 두고 재차 충돌

고려아연, 영풍과 'SM엔터 주가조작' 개입 여부 두고 재차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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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 출자 원아시아파트너스 펀드, SM 주가조작에 활용
영풍 "고려아연, 시세 조작 가능성 인지하고도 자금 투입" 주장
고려아연 측은 모든 투자 재무적 목적이었다며 반박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엔터) 주가 조작 사건을 둘러싸고 고려아연과 영풍 간 갈등이 재점화됐다. 카카오와 원아시아파트너스의 SM엔터 주가 조작 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2023년 고려아연이 원아시아파트너스 하바나1호 사모펀드(PEF)에 출자했다는 사실을 두고 양측이 공방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주가 조작 펀드'에 출자한 고려아연

1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2023년 2월부터 원아시아의 하바나제1호 사모투자 합자회사에 1,016억원을 출자해 99.82% 지분을 확보했다. 해당 펀드는 같은 달 SM엔터 주식 장내 매집에 활용됐고, 같은 해 4월 고려아연에 현금 520억원을 분배했다. 연말에는 400억원 상당의 SM엔터 주식 44만640주를 현물 배당하기도 했다. 이후 5년 존속 예정이던 펀드는 2024년 1월 해산 결의를 거쳐 3월 조기 청산됐다.

문제는 원아시아의 해당 펀드가 카카오발(發) SM엔터 주가 조작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검찰 측은 지난 2023년 카카오가 하이브와 SM엔터 지분 확보 경쟁을 벌이던 당시 장내 주식 매입을 통해 시세 조종에 나섰다고 보고 있다. 하이브가 주당 12만원으로 SM엔터테인먼트 주식 공개 매수를 진행할 때, 카카오가 이를 방해할 목적으로 원아시아와 공모해 인위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 주가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원아시아는 2023년 2월 16, 17, 27일에 걸쳐 1,100억원을, 카카오 측은 하이브의 공개매수 마지막 날이었던 2023년 2월 28일 1,300억원을 각각 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검찰은 2024년 8월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를 포함해 홍은택 당시 카카오 대표, 김성수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대표, 지창배 원아시아 회장 등을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공동 기소했다. 이후 지난달에는 △김범수 창업자에 징역 15년에 벌금 5억원 △배재현 카카오 전 투자총괄대표에 징역 12년 및 벌금 5억원 △김성수 카카오엔터테인먼트 공동 대표에 징역 9년 및 벌금 5억원 △홍은택 전 카카오 대표에 징역 7년 벌금 5억원 △강호중 카카오 CA협의체 재무총괄 소속 리더는 징역 7년 벌금 5억원 △지창배 원아시아 회장 징역 10년 벌금 5억원 △김태영 전 원아시아 부대표에는 징역 7년 벌금 5억원을 각각 구형했다.

영풍, 고려아연 '고의성' 지적

고려아연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며 적대 관계가 된 영풍 측은 고려아연이 원아시아의 펀드에 대규모 자금을 출자했다는 점을 문제 삼고 나섰다. 고려아연이 SM엔터 시세 조종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풍 측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지창배 대표가 중학교 동창으로 개인적 친분이 있으며, 펀드 정관 개정부터 자금 출자까지의 과정도 너무 빨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영풍은 고려아연 경영진이 펀드 출자 자금이 SM엔터 주식 매입에 사용될 것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펼쳤다. 근거로는 해당 정황이 법원에서 공개된 고려아연 내부 이메일이 제시됐다. 해당 이메일은 하이브가 공개매수를 개시한 2023년 2월 10일 이후 작성됐으며, 원아시아가 SM엔터 지분 매입을 위한 프로젝트 펀드 조성을 계획 중이며 하이브에 SM엔터 주식을 12만원에 팔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SM 시세조종 공모 정황은 법원에서 공개된 고려아연 내부 이메일 내용에서 확인된다"며 "시세를 인위적으로 형성하는 자금 흐름을 인지하고도 출자 및 승인했다면 이는 ‘공모’ 혹은 ‘방조’에 해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형법 및 자본시장법 제176조 및 법원의 판례는 시세 조종 행위를 공모하거나 방조한 이를 처벌 대상으로 간주하며, 제178조에는 부정 거래 목적의 자금 또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부정 거래를 방조한 행위에 대한 형사 처벌이 명시돼 있다.

고려아연 "당사는 무고하다"

이에 고려아연은 곧장 반박 의견을 내놨다. SM엔터의 시세 조종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일절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모든 투자는 재무적 목적으로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고려아연 측은 "당시 상대방(영풍)이 주장하는 공개 매수 저지 목적 등에 대해 전혀 사전 보고 및 전달받지 않았다"며 "실제 영풍 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인용한 메일의 내용을 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히려 당사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증거 자료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SM엔터 사건에서의 핵심 의혹은 (카카오 측이) 하이브의 SM엔터 주식에 대한 공개매수를 무산시키도록 했는지, 즉 하이브가 공개매수를 통해 SM엔터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도록 했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그 과정에서 SM엔터 주식에 대한 시세 조종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느냐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 측이 공방을 벌이는 사안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하지만 영풍 측에서 언급하는 메일에서 고려아연 재무 파트는 '하이브에 SM엔터 주식을 12만원에 팔 수도 있다'고 했다"며 "(이 같은 문구에서) 해당 투자가 재무적 투자 목적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이미 하이브의 공개매수 계획이 12만원 한도로 언론에 공표된 만큼, 하이브의 공개 매수에 응해 투자금을 현금화할 수 있다는 엑시트 가능성을 고려한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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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치이고 중동에 쫓기고” 칼날 위에 선 ‘석유화학’, 탈출구 안 보인다

“중국에 치이고 중동에 쫓기고” 칼날 위에 선 ‘석유화학’, 탈출구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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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출효자였던 석유화학
글로벌 공급과잉 등에 내리막길
'물음표' 붙는 수직 계열화

한국 제조업의 대들보인 석유화학 산업이 고사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중국이 석유화학 설비를 증설하고, 자국 내에서 싼값에 제품을 자급하기 시작하면서다. 우리 경쟁력의 근간이던 저원가 시대는 끝났고, 중국발 과잉 공급은 멈출 기미가 없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중국발(發) 경보음'을 무시한 대가다. 과거에도 유가가 치솟으면 석화 산업의 수익성이 떨어져 주기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중국의 굴기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별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 차원에서 주요 석유화학기업 간 빅딜을 주선하는 등 산업 살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사업을 재편한다고 해도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부문을 합칠 꼴이라 근본적 회생은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침체 늪’ 빠진 여수산단

11일 석유화학업계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여수 소재 중견·중소기업 재직자와 개인 사업자 등은 최근 여수 석화 산업 불황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여천 NCC와 롯데케미칼 등 대기업이 일부 공장 가동을 중단하며 버티기에 들어간 사이 석유화학과 밀접한 협력 업체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 여수시여수산단공동발전협의회에 따르면 여수산단의 수출 실적은 지난해 44조2,980억원으로 2023년(44조7,182억원)보다 4,161억원가량 감소했다.

지역에서 안정적인 직장으로 평가받던 중견 규모 석화 업체도 흔들리고 있다. 여수에 직원 130여 명을 둔 섬남석유화학은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1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으나 지난해 순이익은 2022년(약 298억원)에 비해 무려 90% 감소했다. 금호석유화학 계열사인 금호피앤비화학도 2023년에는 매출 2조2,024억원, 순이익 2,314억원을 냈지만, 지난해에는 매출 1조6,653억원, 순이익 87억원에 그쳤다. 석화 회사 폴리미래 역시 최근 3년 동안 480억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여수산단의 현주소를 가장 여실히 드러내는 곳은 여천NCC다. 한때 대기업들의 캐시카우로 역할하던 여천NCC는 2022년부터 내리 적자의 늪에 빠졌다. 공동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지난 3월 각각 1,000억원씩 유상증자 방식으로 지원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난달에는 3,100억원 상당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 부도 위기까지 갔다. 결국 한화와 DL이 1,500억원씩 자금대여를 결정하면서 한숨 돌렸지만, 오히려 부채비율을 높여 재무구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석화 기업들도 정도만 다를 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여러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셧다운 도미노’가 진행 중이다.

호황 안주하다 중국에 밀려 공멸

석화 산업을 위기로 내몬 핵심 원인은 중국발 공급과잉이다. 석화 산업은 업종 전체로 보면 지난해 480억 달러(약 66조6000억원)의 수출을 달성할 정도로 반도체, 자동차, 일반 기계에 이은 한국의 주력 산업이지만, 중국의 저가 공세로 하루아침에 사정이 급변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은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던 기초 소재를 국산화하기 위해 공격적인 설비 증설에 나섰다. 대규모 NCC 증설을 통해 에틸렌 등 기초화학 제품 자급률은 100%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 10여 년간 중국이 증설한 규모만 한국의 연간 에틸렌 생산 능력(1,270만t)의 두 배를 넘는다. 거대한 중국 시장이 사라져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산 범용 소재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여기엔 업계의 안이한 경영 전략도 한몫했다. 그간 석화업계는 중국 특수에 취해 에틸렌을 생산하는 고식적인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에틸렌 등 범용화학 제품들은 가격이 싸고, 마진율이 높지 않고, 기술력 격차도 크지 않아 언젠가는 중국에 따라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도 게을리했다. 결국 중국에 자리를 내준 에틸렌 가격은 최근 1년 새 톤당 500달러 이상 떨어질 정도로 하락세가 가파르다. 저유가에 과잉공급이 겹쳐 수출단가도 1년 새 13%나 떨어졌고 수출액 역시 30억 달러대로 10%나 하락했다. 중국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한국 석화업계로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동 산유국마저 탈(脫)석유 전략에 드라이브를 걸고 다운스트림 산업 고도화에 나서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는 자국뿐 아니라 한국, 중국에 7개 정유, 석화 공장을 건설 중이며, 에틸렌 생산능력은 중국과 중동을 중심으로 2026~2028년에 4,000만 톤이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이 9조원이 투입되는 ‘샤힌 프로젝트(SHAHEEN Project)’를 내년 완공하면, 울산에서 연간 에틸렌 180만 톤이 생산될 예정이다. 기존 기업들은 과잉 생산으로 2022년 이후 에틸렌 신규 증설을 중단했는데, 원가 경쟁력이 뛰어난 정유업체가 석화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석화 산업에 대한 위기의식은 지난 2020년대 초부터 확대됐다. 그러나 국제유가와 글로벌 수요에 따라 경기가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하면서 업계는 물론 정부도 산업 재편 시기를 놓쳤다. 장치산업인 석화는 고용 유발 효과가 조선·철강·자동차에 비해 낮다는 점도 정부가 구조조정에 느슨했던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이는 결국 석화 산업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았다.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진행한 컨설팅 용역 결과를 보면 국내 석화 기업의 영업손익과 재무 상황을 고려했을 때 구조조정 없이 현재의 불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3년 뒤에는 국내 석화 기업의 절반 정도만 생존할 것으로 추산된다.

NCC 통합으로 시작된 석유화학 대수술, 경쟁력 회복 요원

이에 정부는 지난달 석화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의 후속 대책을 내놓으며 석화 살리기에 나섰다. 다만 정부 입장은 명확하다. ‘무임승차’는 없다는 것이다. 기업의 뼈를 깎는 자구 노력 없이는 정부 지원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석화 산업이 직면한 문제는 명약관화했는데, 국내 석화업계가 그동안 문제를 외면해 왔다”며 “중국 등 글로벌 공급 과잉이 예고됐음에도 국내 석화 업계는 과거 호황에 취해 오히려 설비를 증설했고, 고부가 전환까지 실기하며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작심 비판했다. 그는 “위기 극복 해답은 과잉설비 감축과 근본적 경쟁력 제고”라며 “버티면 된다, 소나기만 피하자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으며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임할 것”을 강조했다.

구조조정 방안으로 거론되는 카드는 정유사와 석화 기업 간 수직적 통합이다. 석화 기업이 원유를 다루는 정유사와 손잡으면 원재료인 나프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수월하다는 판단이다. 또한 설비 합리화를 통해 NCC 생산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 대산산단에서 롯데케미칼과 HD현대가 NCC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구체적으로 롯데케미칼이 대산단지에 보유한 설비를 HD현대케미칼에 넘기고, HD현대오일뱅크가 현금 혹은 현물을 추가 출자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문제는 대기업 위주로 수십년간 구축된 석화업계의 자율적 통폐합과 인수합병(M&A)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여천NCC 대주주가 신규 투자를 놓고 싸운 것과 같이 그룹사 시너지와 이해 등이 맞물려 상징적인 몇 건의 통폐합 선언은 있을 수 있지만 온전히 자율적인 구조 개편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석화 산업의 골든타임이 이미 지났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기업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추진하더라도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근본적 처방이 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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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중국산 자동차에 50% 관세 폭탄, 트럼프 압박에 디커플링 가속

멕시코, 중국산 자동차에 50% 관세 폭탄, 트럼프 압박에 디커플링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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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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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한 경험을 통해 IT 기업들의 현재와 그 속에 담길 한국의 미래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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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미체결국 고율 관세 부과
트럼프 행정부 대중 압박 기조에 동조
미·멕 갈등 구도 속 중국 반사이익 확대 차단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시코 대통령/사진=셰인바움 대통령 X

멕시코 정부가 중국·한국 등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를 대상으로 고율의 수입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국내 일자리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상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중국 압박 기조에 발맞춘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자리 32만5,000개 보호 명분

10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멕시코 경제부는 자동차를 비롯해 섬유, 철강, 장난감 등 약 1,500개 품목에 대한 수입 관세를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수입관세 전면 개편의 일환으로, 이에 따라 520억 달러(약 72조원) 규모의 수입품이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경제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미 관세가 부과되고 있지만 세계무역기구(WTO)가 허용하는 한도까지 (관세를) 끌어올릴 것"이라며 "특정 수준의 보호 없이는 경쟁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중국산 자동차가 참조가격(reference price) 이하로 유입돼 멕시코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국가산 자동차에 최대 50%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밝혔다.

이번 계획은 의회 승인을 거쳐야 하지만 여당이 과반을 점하고 있어 통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관세 인상안이 의회 문턱을 넘으면 철강·장난감·오토바이에 35%, 섬유에 10~50%의 관세가 부과된다. 자동차 부품, 의류, 신발, 가전제품, 종이·판지, 유리, 화장품 등에도 최고 50%의 관세가 적용된다. 멕시코 정부는 이번 조치로 약 32만5,000개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번 관세 인상의 직격탄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멕시코 경제부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와 FTA를 체결한 국가는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EU), 일본, 칠레, 파나마, 우루과이 등이다. 멕시코 경제부는 문서에 "관세 인상은 FTA를 맺지 않은 국가들 특히 중국,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러시아, 태국, 튀르키예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명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중 무역적자 1,200억 달러, 중간재 의존 심화

미국은 그간 중국이 멕시코를 우회 통로로 활용해 수출길을 넓히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여기에 북·중·러가 밀착하는 모습을 과시한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비자 발급 제한 등 대중 압박 수위를 높이자 멕시코가 이에 보조를 맞추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미국과 멕시코는 캐나다와 함께 미·멕·캐 협정(USMCA)을 체결한 최대 교역 파트너다. 이 협정이 사실상 보호막 역할을 하면서 멕시코는 상호관세 부과에서 상당 부분 예외를 적용받았으나, USMCA는 내년 재검토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의 교역에서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점도 멕시코 정부의 관세 인상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멕시코 통계청(INEGI)에 따르면, 멕시코의 대중 무역적자 규모는 지난 1,198억6,000만 달러(약 116조6,000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10년 새 두 배 이상 불어난 것으로, 멕시코에서 중국으로 수출되는 품목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무역 적자가 급증한 것이다.

반면 지난해 대중국 수입은 무려 1,297억9,500만 달러(약 180조4,000억원)에 달했다. 멕시코가 중국에서 수입하는 품목의 상당 부분은 멕시코 기업이 최종 수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중간재다. 대표적인 품목은 구리로, 구리가 없으면 멕시코 자동차 산업은 마비가 된다. 멕시코가 중국산 제품에 의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산 부품의 세계적인 경쟁력과 TV, 기계 등 일부 국내 생산망의 낮은 통합성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는 멕시코가 경제 대국인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재고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이후 중국의 대미 무역 규모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23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해 5월 기준, 중국은 미국 전체 무역에서 5.89%를 차지했는데, 이는 2002년 이후 최저 월별 비중이자 2017년 초 17.77%에서 절반 이상 감소한 수치다. 이렇다 보니 멕시코 정부로서는 이번 수입 관세 부과를 통해 중국 의존도를 낮출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중국과의 무역 적자가 1,200억 달러에 육박한다는 점은 멕시코 경제가 구조적으로 중국에 종속돼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미-멕 갈등 구도, 중국에 오히려 기회

또한 멕시코의 이번 결정은 단순한 통상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미국과의 갈등 구도가 오히려 중국에 기회를 제공해 왔던 구조를 차단하려는 전략적 조치로도 해석된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조슈아 멜처 선임연구원은 지난 3월 북미 무역을 주제로 한 연구소 주최 행사에서 "분명한 것은 (미국이 캐나다·멕시코에 부과한) 25% 관세가 경제 성장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점"이라며 "이는 물가를 상승시키고 일자리와 임금도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캐나다·멕시코가 이러한 경제적 타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경제 강국으로 중국을 지목했다. 멜처는 "미국과 캐나다·멕시코 간 무역 전쟁에서 승자가 될 국가는 중국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관세는 공급망을 중국에서 북미로 옮기려는 노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며 "미국이 최대 무역 상대국들에 관세를 부과하려는 의지는 전 세계적으로 동맹국과 우방 모두에게 미국에 대한 무역 노출을 줄여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여기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무역 및 투자 관계 확대에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멕시코의 대중국 관세 조치가 결과적으로 미국 입장에서는 멕시코를 통한 우회 수출이라는 틈새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으며, 멕시코 역시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강화하려는 동기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고 본다. 한 통상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세계 무역 질서가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대응을 보면서 다른 나라들을 콘트롤 하는 격"이라며 "한국, 일본, 멕시코 같은 나라들이 일종의 장기말인 셈"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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