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젤렌스키에 광물 협정에 이어 우크라이나 원전 소유권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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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푸틴과 에너지 부분 휴전 합의 우크라에는 전력시설과 원전 소유 제안 구체적인 사안에 이견, 협상 난항 예상

러시아와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제한적 휴전을 끌어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전력 시설과 원자력 발전소 등을 미국이 소유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과거 우크라이나 전력의 20%를 담당했던 자포지라 원전을 지목한 것으로, 해당 시설은 현재 러시아가 점령해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광물 개발 이권을 요구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전력 시설 및 원전 운영권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美 기술력으로 우크라 원전에 도움 줄 수 있어"
19일(이하 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젤렌스키 대통령과 1시간 동안 아주 좋은 통화를 했다"며 "대부분은 어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합의 내용을 토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요청과 요구사항을 조정하기 위한 논의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언론에 제공한 설명자료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에서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과 주요 논의 사항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전했다. 두 나라 정상은 우크라이나의 전력 공급망과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루비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보유한 전력 및 유틸리티 분야의 전문성이 우크라이나 원전 운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며 "미국이 우크라이나 원전을 소유하는 것이 에너지 인프라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원전 소유 주장은 기존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거부했던 광물 협정에서 내용과 범위가 확장된 것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우리는 경제적 광물 협정에서 벗어나 이제 평화의 자리로 이동했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부터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을 거론한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통화 뒤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자포리자 원전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자포리자 원전을 러시아로부터 돌려받는다면 미국이 원전의 현대화와 투자에 참여하는 식으로 소유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방안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밝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남동쪽으로 5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포리자 원전은 유럽 최대 규모 원자력 발전소다. 현재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어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전쟁 이전에는 40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5,700MW(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등 우크라이나 전체 전력의 20%를 담당했다.

부분 휴전 합의했으나 전면적 휴전에 못 미쳐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통화는 전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한 후속 조치로 이뤄졌다. 18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약 2시간 30분간 통화하며 '30일간 부분 휴전'에 합의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후 백악관은 "두 정상은 전쟁이 지속적인 평화로 종결돼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며 "평화로 가는 첫걸음으로 에너지 및 인프라 휴전, 흑해에서의 해상 휴전 이행을 위한 기술적 협상, 완전한 휴전 및 영구적 평화를 추진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에 대한 부분적 휴전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정과 관련해 백악관은 미국과 우크라이나 측 실무팀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나 에너지 분야 부분 휴전을 흑해에서의 해상 휴전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17일 미국과 러시아 실무협상팀이 사우디에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합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이 같은 장소에서 양측을 중재하며 휴전 협상을 주도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레빗 대변인에 따르면 대통령 협상팀과 국가안보 전문가 팀은 이번 주 후반 사우디로 가서 세부 사항을 계속 검토하고 해결할 예정이다.
하지만 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끌어낸 합의안이 우크라이나가 요구해 온 전면적 휴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제한적 휴전에 합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 이후 추진해 온 장기적인 평화 계획에는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미국과 러시아는 완전한 전투 종료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도 "현재 논의되는 휴전 협상의 내용은 우크라이나가 동의한 무조건적인 휴전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 측과도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타결의 핵심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국의 군사 지원의 전면 중단을 요구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실제로 러시아 크렘린궁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 직후 발표한 성명에는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국의 군사 지원의 전면 중단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백악관이 발표한 성명에는 이와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영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러시아 측의 요구와 달리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협력을 시사했다. 백악관에 따르면 19일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위해 계속 협력할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영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아울러 두 정상은 격전지인 쿠르스크의 상황을 검토하고 전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국방 정보를 긴밀하게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과 정보 공유를 중단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유럽 주요국 "우크라에 대한 군사 지원 이어갈 것"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해 국방비 확충을 추진 중인 유럽 주요국들도 '30일 부분 휴전'에 환영하면서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18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부분 휴전이 우크라이나의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실도 성명을 통해 "휴전을 향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전면 중단을 요구하며 끈질긴 전의를 드러낸 것을 두고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 대통령은 타협할 의지가 없다"며 "그의 목표는 여전히 독립국 우크라이나를 끝내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옛 냉전 시대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 정상들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휴전 대상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및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전투가 빠진 점도 우려 사항이다. 우크라이나 영토를 계속 공격하겠다는 러시아 측 입장을 트럼프 대통령이 받아들여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끌면서 전쟁을 계속할 시간을 벌어들일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실제로 러시아는 30일 간의 휴전에 합의한 직후 드론 40여 대를 동원해 키이우를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