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파나마 EU 블랙리스트서 제외, 법만 고친 조세회피처 '집행 공백'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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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민간 지수, 서로 다른 기준에 엇갈린 평가 글로벌 최저한세 대응도 지역별 온도차 자금세탁 평가 만점권에도 처벌 사례 부족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이 지난달 9일 파나마를 조세 비협조국 명단인 블랙리스트에서 삭제하고, 개선 과제를 점검하는 그레이 리스트(Grey-list·조세회피 위험참고국)에 편입했다. 케이만제도와 버뮤다 등 주요 역외 금융 중심지도 블랙리스트나 그레이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의 평가는 정반대다. 국제 조세 감시단체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지난해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에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를 1위, 케이만제도를 2위, 버뮤다를 4위로 꼽았다. 평가가 엇갈리는 배경에는 두 기관의 서로 다른 판단 기준이 있다. 조세회피처들이 EU 심사를 통과할 수준으로만 제도를 정비해 온 점도 격차를 키웠다.
세율 0%여도 협조하면 블랙리스트 면제
EU가 조세회피처를 평가하는 기준은 국제 조세 협력이다. 세율이 0%라도 다른 나라 세무당국이 요청한 금융정보를 제공하고, 페이퍼컴퍼니를 막기 위해 현지에 직원과 사무소를 두도록 의무화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는다. 법인세가 없는 케이만제도도 이 요건을 갖춰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 파나마는 EU가 유해하다고 판단한 해외소득 면세 제도를 고친 뒤에야 2020년 2월부터 올라 있던 블랙리스트에서 제외됐다.
반면 조세정의네트워크는 다국적기업이 그 지역의 법을 이용해 세금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를 따진다. 다른 나라에 낼 세금을 줄이기 쉬운 법 구조일수록 높은 점수를 주고, 여기에 현지 사업 규모를 곱해 순위를 매긴다. 버진아일랜드와 케이만제도, 버뮤다는 18개 지표 모두에서 조세회피 위험이 가장 높은 100점을 기록했다. 자금세탁을 평가하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기준을 적용하면 결과는 또 달라진다. FATF는 2023년 10월 케이만제도와 파나마를 감시 대상에서 동시에 해제했지만, 파나마가 EU 블랙리스트에서 제외되기까지는 3년이 더 걸렸다.
케이만은 펀드·버뮤다는 보험, 지역마다 다른 주력 사업
조세회피처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지역마다 주력 사업이 다르다는 데 있다. 케이만제도는 투자 펀드 등록지로 성장했다. 지난해 말 등록 사모펀드는 1만7,722개로 2020년 말보다 40% 증가했다. 반면 버뮤다는 펀드 대신 보험으로 성장한 곳이다. 버뮤다의 지난해 총보험료는 사상 최대인 1,975억 달러(약 264조원)를 기록했다. 회사 설립이 주력인 버진아일랜드에는 지난해 말 35만6,256개 회사가 등록돼 있다.

영국해협의 왕실령 섬인 저지와 건지는 신탁과 자산관리 서비스가 주력이다. 이들 섬과 달리 싱가포르는 법인세율이 17%인 종합 금융 허브로, 운용자산이 6조7,000억 싱가포르달러(약 7,011조원)에 이른다. 같은 조세회피처라도 자금 흐름의 투명성은 주력 사업에 따라 차이가 크다. 펀드가 주력인 케이만제도는 운용사와 감사인이 공개되고 투자자 정보도 각국 세무당국에 통보되는 만큼 자금 흐름 추적이 쉬운 편이다. 반면 회사 설립이 주력인 버진아일랜드는 등록 대리인 외에 공개되는 정보가 적어 실제 보유 자산을 파악하기 어렵다.
표 1. 7개 역외 금융 중심지 세제·실소유자 등록부·규제 평가(2026년 10월)
| 지역 | 주력 사업 | 세제 | EU 명단(지난달 9일) | 조세정의네트워크 순위 | 자금세탁 평가 | 실소유자 등록부 열람 |
|---|---|---|---|---|---|---|
| 케이만제도 | 투자 펀드(사모 1만7,722개, 뮤추얼 1만2,876개) | 직접세 없음, 최저한세 미도입 | 없음 |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 2위 | 2023년 10월 FATF 강화 감시 해제 | 지난해 2월 28일부터 정당한 이해관계자, 수수료 75 달러(약 10만원) |
| 버뮤다 | 보험·재보험·대체자본 | 매출 7억5,000만 유로(약 1조1,180억원) 이상 다국적기업 15%(지난해부터) | 없음 |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 4위 | CFATF 2020년: 40개 중 39개 이행·대체로 이행 | 비공개 |
|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 회사 설립(35만6,256개) | 대부분의 국경 간 활동 비과세 | 없음 |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 1위 | CFATF 지난해 11월: 40개 전부 이행·대체로 이행 | 지난해부터 등기소 제출, 정당한 이해관계자 |
| 저지 | 신탁·자산관리·운용 펀드 | 0/10 세제, 15% 다국적기업세(지난해부터) | 그레이 리스트 |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 8위 | 머니발 2024년: 40개 중 39개 이행·대체로 이행 | 당국만 열람, 정당한 이해관계자 허용 의견수렴 |
| 건지 | 운용 펀드·자산관리 | 0/10 세제, 15% 국내 추가세(지난해부터) | 없음 | 금융비밀지수 10위 | 머니발 지난해: 40개 전부 이행·대체로 이행 | 비공개 |
| 싱가포르 | 펀드 운용(6조7,000억 싱가포르달러, 약 7,011조원) | 17%, 15% 국내 추가세(지난해부터) | 없음 | 기업 조세회피처 지수 5위, 금융비밀지수 3위 | 30억 싱가포르달러(약 3조1,390억원) 사건으로 지난해 벌금 2,745만 싱가포르달러(약 287억원) | 비공개 |
| 파나마 | 회사 설립·국외소득 비과세 | 실질 없는 해외 수동소득 15%(내년부터) | 그레이 리스트(2020년부터 블랙리스트) | 두 지수 모두 10위권 밖 | 2023년 10월 FATF 강화 감시 해제 | 비공개 |
버뮤다 15% 과세 도입, 케이만은 계획 없어
주력 사업이 다르다 보니 다국적기업의 세 부담을 최소 15%로 맞추는 글로벌 최저한세에 대응하는 방식도 지역마다 다르다. 버뮤다는 지난해 1월부터 매출 7억5,000만 유로(약 1조1,180억원) 이상 다국적기업에 15% 법인세를 부과했다. 미국과 유럽에 모회사를 둔 재보험사가 많아 과세하지 않으면 세수가 모회사 소재국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의 세 부담이 곧바로 15%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버뮤다가 경과 조치로 앞으로 10년가량 세금을 공제받을 수 있는 혜택을 허용한 덕분이다. 보험사 처브는 이 조치로 2023년 4분기에만 11억4,000만 달러(약 1조5,210억원)의 일회성 세금 이익을 실적에 반영했다. 이에 따라 현지 기업의 실제 세 부담은 당분간 명목세율 15%를 밑돌 전망이다.
저지와 건지, 싱가포르도 지난해 최저한세를 도입했다. 반면 펀드와 회사 설립이 주력인 케이만제도와 버진아일랜드는 도입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최저한세 도입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야 했던 파나마는 지난 5월 법률 526호를 제정했다. 다국적기업 계열사가 해외 투자소득을 올리면서 현지 직원과 사무소를 입증하지 못하면 내년부터 순소득에 15%를 과세하는 내용이다.
실소유자 등록부, 일반 공개 없이 당국에만 개방
조세회피처의 투명성을 가늠하는 또 다른 기준은 회사의 실제 주인을 기록한 실소유자 등록부다. 영국령 지역들은 실소유자 등록부를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022년 11월 유럽사법재판소가 EU 회원국 등록부의 일반 공개를 무효화하자 공개 방침에서 후퇴했다. 케이만제도는 지난해 2월부터 언론인과 학계, 시민단체가 금융범죄 관련성을 입증해야 열람을 허용한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저지는 1989년부터 등록부를 운영하고도, 당국과 금융회사에만 열람을 허용한다. 열람 범위가 이렇게 좁아도 EU 블랙리스트에는 오르지 않는다. EU 심사는 일반 공개가 아니라 각국 당국이 실소유자 정보를 받을 수 있는지만 따지기 때문이다. 2019년 도입된 현지 직원·사무소 의무도 한계가 뚜렷하다. 심사 대상이 현지 운영 여부에 그쳐 실제 세금 납부 실적은 평가되지 않는다.
싱가포르 벌금, 압수 자산 1%에도 못 미쳐
법은 갖췄지만 집행이 뒤따르지 않는 문제는 자금세탁 분야에서도 되풀이된다. 국제 자금세탁방지 기준인 FATF 40개 권고 평가에서 버뮤다와 저지는 39개, 건지와 버진아일랜드는 40개 전부가 '이행' 또는 '대체로 이행' 판정을 받았다. 법과 제도만 보면 사실상 만점인 셈이다. 그러나 평가 보고서를 들여다보면 법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건지에서는 의심스러운 거래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 버진아일랜드는 등록 회사가 35만 개를 넘는데도 법 집행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평가 방식도 한계로 꼽힌다. 평가기구들은 정식 평가 뒤 후속 점검을 벌이는데, 이 단계에서는 법령 개정만으로 평가 등급이 상향된다. 버진아일랜드가 짧은 기간에 40개 권고를 모두 충족한 것도 이 덕분이다. 실제 수사·기소 역량은 다음 정식 평가에서야 검증된다. 싱가포르에서는 제도의 허점이 대형 자금세탁 사건으로 이어졌다. 2023년 8월 현지 경찰은 해외 사기·불법 도박 자금 유입 사건으로 외국인 10명을 체포하고 30억 싱가포르달러(약 3조1,390억원)가 넘는 자산을 압수했다. 하지만 자금 유입을 막지 못한 금융회사에 대한 제재는 가벼웠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지난해 7월 금융회사 9곳에 벌금을 부과했지만, 총액은 2,745만 싱가포르달러(약 287억원)로 압수 자산의 1%에도 못 미쳤다.

조세정의네트워크의 평가가 편향됐다는 반박도 나온다. 단체의 정치적 성향이 지수에 반영됐고, 국제기구 평가에서는 대부분 지역이 문제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법령을 갖췄다고 조세회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23년 한 국제 학술지 논문은 2015년 다국적기업이 해외 이익의 36%를 조세회피처로 옮긴 것으로 추정했다. 버뮤다의 과세나 싱가포르의 벌금처럼 기업에 실제 부담을 준 변화도 있지만, 상당수 개혁은 여전히 서류 정비에 머물러 있다. 파나마의 블랙리스트 제외도 마찬가지다. 법률 526호가 내년에야 시행되는 만큼 실효성 검증은 이후에야 가능할 전망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Offshore Finance] Not All Tax Havens Are Equal: How Offshore Financial Centres Differ in Transparency, Taxation and Regulation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