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고유가에도 경기침체 없는 미국,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망까지 장악
Input
Modified
오일쇼크에 침체 대신 고용·소비 증가 베네수엘라 유전 17곳 100년 임차·지분 35% 중동 공급 차질에도 정유소 원료 확보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제유가 급등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와 정반대로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과 이란 간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의 원유 수송이 일부 차질을 빚으면서 지난 4월 미국 유가는 전쟁 전 배럴당 평균 72 달러(약 9만6,830원)에서 117 달러(약 15만7,350원)로 급등했다. 1973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러한 유가 급등은 대부분 미국의 경기침체와 실업 증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고유가가 오히려 미국 경제에 수혜로 작용한다. 여기에 미국은 베네수엘라와 원유 계약을 체결하며 원유 공급과 정제 부문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셰일 증산에 2019년 석유 순수출국 전환
미국이 원유 대부분을 수입하던 시절에는 유가가 상승할수록 미국의 부가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으로 이전됐다. 해외로 유출된 자금은 미국산 제품 소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노스웨스턴대와 하버드대 연구진이 2010년 이후 유가 변동이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결과, 2011년 리비아 내전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했을 때도 미국은 경기침체를 피했다. 변화를 이끈 것은 셰일오일 생산 확대다. 미국은 셰일오일 증산으로 석유 순수입을 줄인 끝에 2019년 순수출국으로 전환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에너지 수출량은 3경1,000조Btu(영국열량단위)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고유가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산유 지역을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연구에 따르면 유가 상승기에 광업을 제외한 고용 증가폭은 산유 주와 비산유 주에서 동일했으며, 제조·건설·유통·서비스업 전반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연료비 부담이 큰 항공업종의 주가도 상승했다.
베네수엘라산 100만 배럴 텍사스 정유소 도착
셰일오일 증산으로 고유가에 대한 대응력을 높인 미국은 베네수엘라와의 원유 계약을 통해 공급 통제력도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양국 계약에 따른 첫 원유 100만 배럴이 텍사스주 코퍼스크리스티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 원유를 대가 없이 들여와 텍사스 정유소에 공급할 예정이다. 원유 무상 도입은 베네수엘라 지도부가 바뀐 뒤 맺은 계약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지난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 마약테러 혐의로 뉴욕 법정에 세웠고, 지난 8월 양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원유 계약에 서명했다. 계약에 따라 베네수엘라 유전 17곳의 100년 임차권은 민간기업 노스아메리칸 블루에너지 파트너스에 돌아갔다.
미국 정부도 이 회사를 통해 원유를 확보할 길이 열렸다. 미국 전쟁부 산하 전략자본국이 모회사 지분 35%를 갖고, 생산량의 20%를 원가에 사들일 권리와 나머지 80%를 우선 매입할 권리도 확보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원유 확보에 나선 배경에는 정유시설의 구조적 특성이 있다. 텍사스 셰일 유전에서는 황 함량이 낮은 경질유가 생산되지만, 멕시코만 연안 정유소 상당수는 황 함량이 높은 중질유를 처리하도록 설계됐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석유 순수출국이 된 뒤에도 경질유를 수출하고 중질유는 수입해 왔다. 석유제품까지 합치면 수출이 수입보다 많지만, 원유만 놓고 보면 지난해에도 하루 220만 배럴을 순수입했다. 여기에 이란 전쟁으로 중동산 원유 공급이 끊기면서 대체 수입처가 필요해졌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베네수엘라산이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멕시코만 유입량은 지난 1월 하루 11만 배럴에서 6월 57만5,000배럴로 늘었다.
51번째 주 편입 대신 매장량 650억 배럴 통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베네수엘라에 40조 달러(약 5경3,800조원) 규모의 원유가 매장돼 있다며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권한대행은 "베네수엘라는 식민지가 아닌 자유 국가"라며 반발했다. 이후 편입 계획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미국은 원유 계약을 통해 영토 편입 없이도 사실상 유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계약 대상 유전의 매장량은 약 650억 배럴로, 미국 영토 안에 매장된 원유 약 460억 배럴보다 많다. 미국은 이 유전을 개발하는 운영사의 경영권도 손에 쥐었다. 이에 따라 운영사 이사회에서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사 과반은 미국 시민이어야 하며, 계약 이행도 베네수엘라법이 아닌 미국법을 따른다.
다만 유전 통제권이 곧 소유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유에 붙는 세금과 로열티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귀속되며, 향후 25년간 2,000억 달러(약 26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이 원유 수출과 대금 지급을 관리하는 만큼 해당 자금도 사실상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구조다. 하지만 계약이 유지되더라도 미국이 기대하는 만큼 원유를 확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베네수엘라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2000년대 초 300만 배럴을 넘었지만 현재는 약 100만 배럴에 그치며, 이 가운데 절반가량을 미국이 매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030년대 초까지 대규모 증산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지만, 노스아메리칸 블루에너지 파트너스가 계획대로 1,000억 달러(약 134조원)를 투자하면 시기가 앞당겨질 전망이다.
휘발유값 인하·수출 수익, 엇갈린 美 정부 셈법
고유가를 견디는 경제 구조에 베네수엘라 원유 통제권까지 더해지면서 미국이 원유 공급 차질에 대응할 여력도 커졌다. 미국은 여전히 저렴하고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선호하지만, 이제는 경기침체 부담 없이 산유국 제재나 원유 공급 차단에 나설 여건을 갖췄다. 이번 이란 전쟁은 연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연구진의 분석을 적용하면 지난 9월 중순 배럴당 100 달러(약 13만4,490원) 안팎의 유가도 미국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중동산 원유 공급이 끊겨도 정유소 원료는 베네수엘라산으로 충당할 수 있다. 휘발유 가격 상승에 따른 소비자 부담은 여전하지만, 석유산업 외 분야의 고용 증가 효과까지 고려하면 미국 경제 전체로는 고유가가 득이 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미국 정부가 유가 하락과 상승을 동시에 원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점이다. 백악관은 휘발유·경유 가격 인하를 약속하면서도 베네수엘라 원유 계약을 통해 수천억 달러(수백조원)의 수익을 확보하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규모 수익을 거두려면 높은 유가가 유지돼야 한다. 지난해 석유는 미국 에너지 수출의 63%, 수입의 83%를 차지했다. 이처럼 석유를 많이 팔면서 동시에 많이 사들이는 만큼, 미국 정부로서는 유가가 오르든 내리든 득실을 함께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당시와 달리 미국은 이제 배럴당 117 달러(약 15만7,350원)의 고유가에도 가격 인하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베네수엘라 유전 17곳의 통제권과 운영사 지분 35%를 확보했고,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입량도 지난 1월의 5배 수준으로 늘었다. 고유가에도 경기침체를 피할 수 있게 된 데다 원유 공급망까지 손에 넣으면서 미국 정부의 선택지도 넓어졌다. 남은 과제는 확보한 원유를 국내 연료 가격 안정과 수출 수익 확대 가운데 어디에 쓸지 정하는 일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Oil Price Shocks Now Benefit the US as Venezuelan Crude Flows to Texas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