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EU 방산 자금 '유럽산' 요건에 한국 방산기업 현지 생산 확대, 부품 원산지·기술이전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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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방산 자금, 역내 생산·기술 통제권 조건 한화 직접 투자, 현대로템 현지 기업 통한 조립 후속 수주·부품 현지 조달, 수익성 관건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유럽의 군사비 지출은 전년 대비 14% 늘어 8,640억 달러(약 1,161조원)에 이르렀다. 급증한 방산 수요는 한국 방산기업들에 기회가 됐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방산 수출액은 154억 달러(약 21조원)로, 이 가운데 폴란드가 40% 이상을 차지했다. 유럽 방산업체들이 수년 치 수주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 기업들이 전차와 자주포를 신속하게 공급하며 입지를 넓힌 결과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이 방산 공동 자금 지원에 유럽산 부품 사용과 역내 기업의 통제권 확보 등을 조건으로 내걸면서 납기 경쟁력만으로는 시장을 공략하기 어려워졌다.
'준비태세 2030'·SAFE·EDIP, 비EU 방산기업 진입 장벽 높여
EU가 방산 자금 지원에 조건을 붙인 것은 역내 생산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3월 최대 8,000억 유로(약 1,199조원)를 동원하는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과 방위 백서인 '준비태세 2030(Readiness 2030)'을 내놨다. 재원 대부분은 회원국들이 국방비를 늘릴 수 있도록 재정적자 관련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해 마련할 방침이다. 여기에 EU 차원의 공동 자금 지원도 늘렸다. 대표적인 제도가 지난해 5월 도입된 1,500억 유로(약 225조원) 규모의 방위산업 대출 제도 '유럽안보행동기금(SAFE)'이다. 한국 방산기업들의 주요 수출 시장인 폴란드와 루마니아에는 각각 437억 유로(약 66조원), 169억 유로(약 25조원)가 배정됐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유럽방위산업프로그램(EDIP)'도 총예산 15억 유로(약 2조원) 가운데 7억 유로(약 1조원) 이상을 역내 생산 확대에 투입하기로 했다.
막대한 지원금에는 까다로운 요건이 따라붙는다. SAFE 규정 제16조에 따르면 계약업체와 하도급업체는 EU 회원국이나 유럽경제지역(EEA)에 속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 우크라이나에 설립돼 있어야 한다. 경영진도 해당 지역에 소재해야 하며, 원칙적으로 제3국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외국인직접투자 심사를 통과하거나 설립국이 안보상 보장을 제공하면 예외가 인정될 수 있다. 게다가 부품 원산지에도 제한을 뒀다. SAFE는 완제품에 들어가는 전체 부품의 추정 비용 가운데 적격 지역 밖에서 조달한 부품의 비중을 35% 이하로 묶는다. 계약금액이나 현지 조립 비율이 아니라 실제 부품 조달 비용이 기준이다. 이는 한국 기업이 유럽에 조립공장을 세우더라도 사격통제장치나 동력장치 등 고가의 핵심 부품을 한국에서 들여오면 35% 기준을 넘기기 쉬운 구조다.
EDIP는 설계 권한까지 요건으로 삼았다. 규정 제10조는 지원 대상 기업이 무기체계를 개조하거나 부품을 교체할 때 제3국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못 박았다. 한국 기업이 설계한 무기라면 성능을 개량하거나 부품 하나를 바꿀 때도 한국 측 승인을 거쳐야 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2033년 말까지 해당 권한을 완전히 확보하겠다는 법적 구속력 있는 약정을 체결하면 지원을 받을 길이 열린다. 한국에서 생산한 무기를 수출하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EU의 신규 방산 자금에 접근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현대로템, 유럽 현지화 전략 차별화
EU 자금 요건이 까다로워지면서 한국 방산기업들의 유럽 현지 생산시설 구축도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의 투자 방식과 운영 구조는 뚜렷이 갈린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2월 루마니아 페트레슈티에서 유럽 첫 생산기지인 '한화 유럽 장갑차 생산·기술 거점' 건설의 첫 삽을 떴다. 이는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장갑차의 조립·시험·정비를 맡는 시설로, 현지 기업과 협력해 최대 80%의 현지화율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폴란드에서는 지난해 9월 현지 방산기업 WB그룹과 유도미사일 생산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에 합의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합작법인 주도 컨소시엄이 폴란드 군비청으로부터 140억 즈워티(약 5조원) 규모의 CGR-080 유도미사일 공급 계약을 따냈다. 미사일은 폴란드 내 전용 생산시설에서 만들어 2030년부터 납품할 예정이다.
반면 현대로템은 폴란드 국영 방산그룹 PGZ 산하 부마르-와벵디(Bumar-Łabędy)의 기존 생산시설을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생산설비와 기술을 제공해 K2PL 전차 61대를 현지에서 조립하고, 첫 현지 생산 전차는 2028년 출고할 계획이다. 두 전략의 차이는 누가 자본을 대고 누가 통제권을 쥐느냐에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현지 자회사와 합작법인에 직접 투자해 생산·정비·부품 공급 체계를 꾸리는 방식이다. 시설 투자와 운영에 따른 재무 부담은 물론, 향후 수주로 가동률을 유지해야 하는 위험도 직접 떠안는다. 현대로템은 생산을 폴란드 기업에 맡기되 주계약자와 설계자 지위는 지킨다. 자체 생산시설 투자에 따른 위험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어느 방식이든 EU 자금 요건을 맞추려면 현지화 수준을 한층 끌어올려야 하는 처지다. 현대로템은 폴란드 기업이 제조를 맡아 SAFE의 설립지·통제권 기준은 상대적으로 충족하기 쉽다. 하지만 핵심 부품의 원산지와 설계 권한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역시 유럽에 생산시설을 확보하더라도 고가의 핵심 부품을 한국에서 계속 조달하면 역외 부품 35% 제한이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이에 따라 기술이전과 수출 권한도 해결 과제로 꼽힌다.
한화 통합 방산 제안, 유럽 현지 생산으로는 아직 미흡
개별 무기체계 현지화를 넘어 사업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도 있다. 한화그룹은 지상무기와 방산전자, 조선을 아우르는 통합 방산체계를 앞세워 유럽 시장을 공략 중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시스템은 지난달 폴란드 국제방위산업전시회(MSPO)에서 다층 방공체계와 무인수상정 등을 공동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공동 제안이 유럽 현지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폴란드 오르카(Orka) 잠수함 사업에 도전했지만, 지난해 11월 스웨덴 방산기업 사브(Saab)에 밀렸다. 레이더와 지휘통제체계 등 방산전자를 맡은 한화시스템도 유럽에 생산시설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아직 내놓지 않았다.
한화시스템의 이러한 현지 생산 공백은 통합 제안의 약점으로 이어진다. 한화가 주력하는 방공·미사일 방어 체계는 발사대에 레이더와 전자장비, 지휘통제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묶어 공급하는 방식이다. 레이더·전자장비를 계속 한국에서 만들어 들여오면 패키지가 커질수록 역외 부품 비중도 높아져 SAFE의 35% 기준을 맞추기 어려워진다. 개별국이 자체 예산으로 사들이는 사업에서는 여러 무기체계를 한꺼번에 공급하는 능력이 강점이지만, EU 대출을 쓰는 사업에서는 부품마다 원산지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으로 바뀐다.
소량 생산에 원가 부담, SAFE 대출 기간도 2030년 종료
부품 원산지 문제를 풀더라도 현지 공장이 수익을 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확보한 물량부터 많지 않다. 루마니아 페트레슈티 공장의 초기 물량은 루마니아가 주문한 K9 자주포 54문과 K10 탄약운반장갑차 36대, 총 90대다. 폴란드 글리비체의 부마르-와벵디 생산라인도 2028~2030년 3년에 걸쳐 K2PL 전차 61대를 조립하는 데 그친다.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창원의 기존 생산라인보다 물량이 훨씬 적어 대당 생산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공장을 계속 돌리려면 폴란드의 K9 추가 계약 같은 후속 수주나 유럽 현지 생산 제품의 제3국 수출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수익성도 나빠진다.

현지 생산이 본격화하는 시점과 이를 이끌어낸 EU 자금이 끝나는 시점이 겹친다는 점도 변수다. 글리비체의 첫 K2PL 전차는 2028년에야 출고되고, 폴란드산 CGR-080 미사일 납품은 2030년 시작된다. 반면 루마니아에 배정된 SAFE 대출의 자금 이용 기간은 2030년 12월 31일 끝난다. 한국 기업들이 유럽 공장을 본격 가동할 즈음이면 이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인 SAFE 자금에는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된다.
일정상의 엇박자에도 한국 방산기업들은 루마니아 공장 착공과 WB그룹과의 합작법인 설립, 글리비체 조립라인 구축으로 EU의 규정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적어도 계획상으로는 완제품을 실어 나르던 무기 공급업체에서 현지 산업 기반을 갖춘 파트너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들어선 셈이다. 다만 유럽 현지화의 성패는 생산시설을 확보한 뒤에 좌우된다. 공장을 계속 돌릴 후속 수주와 핵심 부품의 현지 조달, 기술 통제권 확보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짓고 있는 생산시설이 꾸준한 수익원으로 자리 잡을지, 차기 EU 방산 지원 사업을 겨냥한 발판이 될지는 유럽의 지원 정책과 한국 정부의 기술이전·수출통제 결정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South Korean Defense Groups Shift to European Production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