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징금에 M&A 제동까지" 中 기업 상대로 규제 장벽 높인 EU, 역내 기업 M&A에는 빗장 풀어
"과징금에 M&A 제동까지" 中 기업 상대로 규제 장벽 높인 EU, 역내 기업 M&A에는 빗장 풀어
입력
수정
EU, 中 이커머스 테무에 2억 유로 규모 과징금 부과 "보조금 지원 의심된다" 징둥닷컴 세코노미 인수 계획에도 경고등 EU 역내서는 M&A 규제 완화 흐름, 거래 규모 '급성장'

유럽연합(EU)이 중국 전자상거래(이커머스) 기업에 대한 제재를 연이어 내놨다. 테무에 디지털서비스법(DSA) 위반을 근거로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한 데 이어, 징둥닷컴(JD.com)의 독일 업체 인수 계획에도 제동을 건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EU의 행보가 '유럽 챔피언' 육성 전략의 연장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역외 기업에 대한 규제 장벽을 높이는 한편, 역내 기업들의 인수합병(M&A)과 규모 확대에는 보다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산업 경쟁력 강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테무, DSA 위반으로 과징금 철퇴
28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EU 집행위원회는 "테무는 자사 플랫폼에서 판매되는 불법 제품의 구조적인 위험과 그로 인한 EU 소비자의 피해를 충분히 식별·분석·평가하지 못했다"며 2억 유로(약 3,490억원)의 과징금 부과를 결정했다. 테무가 DSA에 따른 위험 평가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2024년 도입된 EU의 DSA는 대형 온라인 플랫폼, 오픈마켓 등이 자사 서비스에서 발생 가능한 구조적 위험을 평가하고, 이를 경감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도록 규정한다. 이를 위반할 시 연간 글로벌 매출의 최대 6%까지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집행위는 조사 결과 테무가 판매하는 제품 중 다수가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제품엔 안전 기준을 초과하는 화학물질이 검출된 유아용 장난감과 장신구, 기본 안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충전기 등이 포함됐다. 이와 관련해 헤나 비르쿠넨 EU 기술 주권·안보·민주주의 담당 집행위원은 "테무의 위험 평가는 사실에 의거한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고, 구체성과 근거가 부족할 뿐 아니라 포괄성도 떨어진다"며 "이는 규제 당국과 사용자, 대중들이 테무에서 판매되는 불법 제품으로 인한 잠재적인 위험 정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끔 한다"고 지적했다.
테무는 집행위의 결정에 즉각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테무 측이 공개한 성명에는 "이번 결정은 2024년 EU 집행위의 첫 번째 DSA 평가와 관련된 것으로, 현재 시스템 상태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사 과정에서부터 집행위와 건설적으로 협력해 왔으며, 이미 이용자 보호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추가 조치 등을 시행했다는 설명이다. 향후 EU 당국과 유의미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테무는 오는 8월 말까지 문제 해결을 위한 시정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추가로 일·주·월 단위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사업 확장 저지당한 징둥닷컴
같은 날 집행위는 또 다른 중국 이커머스 기업인 징둥닷컴의 세코노미 인수 계획에 대해서도 역외보조금규정(FSR)에 따른 심층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앞서 징둥닷컴은 지난달 세코노미를 22억 유로(약 3조8,0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코노미는 디아마르크트와 자투른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11개국에서 1,067개 매장(2025 회계연도 기준)을 운영 중인 유럽 최대 전자제품 소매업체다.
조사의 근거가 된 FSR은 비(非)EU 국가의 정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보조금, 저리 대출, 세제 혜택 등을 지원받은 기업이 EU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2022년 12월 제정돼 2023년 7월부터 시행됐다. EU 내 M&A의 경우 인수 대상 기업의 EU 매출이 5억 유로(약 8,800억원) 이상이고, 거래 당사자들이 최근 3년간 비EU 국가로부터 받은 재정 기여금이 총 5,000만 유로(약 880억원)를 넘을 때 사전 신고 대상이 된다. 집행위는 거래가 시장 경쟁을 왜곡한다고 판단될 시 M&A 승인 조건 부과, 공공조달 입찰 제한, 보조금 반환 명령, 인수 금지 등의 조치를 결정할 수 있다.
현재 EU는 징둥닷컴이 중국 정부, 국영 금융기관 등의 지원을 통해 경쟁사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인수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징둥닷컴 측은 인수 자금이 중국 정부나 기타 비EU 국가로부터 받은 보조금이 아닌 국제 민간은행 차입과 자체 영업 활동을 통해 축적한 현금성 자산으로 마련될 예정이며, 이번 거래가 순수한 상업적 판단에 따른 투자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징둥닷컴의 세코노미 인수에 실제로 제동이 걸릴 경우,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가전 업체들에는 일시적 호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코노미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럽에서 장기간 공을 들여 확보한 핵심 판매 채널이다. 인수가 성사돼 징둥닷컴의 자금력·공급망이 세코노미의 판매 네트워크와 결합할 경우, 하이센스, TCL, 샤오미, 로보락 등 중국 가전 제조사들의 유럽 시장 내 존재감이 순식간에 커지며 국내 업체들의 입지가 축소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향후 EU가 FSR 심사 끝에 거래를 막거나 강한 시정 조치를 부과하면 이 같은 급격한 변화가 대폭 늦춰지게 된다.

EU의 '유럽 챔피언' 육성 구상
시장은 징둥닷컴에 대한 제재가 EU의 산업 보호 기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EU가 역내 기업들의 M&A에는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집행위는 M&A 가이드라인 개정 초안을 공개하고, M&A 거래가 가격 경쟁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혁신 역량, 투자 확대, 공급망 안정성, 글로벌 경쟁력 강화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시장 점유율과 독과점 우려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M&A 심사 장벽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기업 규모 확대가 혁신과 투자, 공급망 회복력을 높여 소비자와 산업 전반에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빅테크와 중국 국영기업에 맞설 ''유럽 챔피언 기업'을 키우자는 기존의 정치적 합의가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정책 기조에 발맞춰 유럽 기업들의 M&A 행보에도 속도가 붙었다.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집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유럽 기업이 관여한 M&A 거래 규모는 전년 대비 39% 급증한 4,550억 달러(약 686조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미주 지역과 아시아·태평양의 거래 규모 증가율이 9%대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매우 가파른 성장세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경우 유럽 M&A 시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기 직전 이어졌던 호황기 수준까지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200억 달러(약 30조1,070억원) 이상의 초대형 거래도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영국·네덜란드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가 자사 식품 사업부를 미국 향신료 업체 맥코믹과 합병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한 매각이 아닌 뷰티·퍼스널케어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래로, 규모는 448억 달러(약 67조5,850억원)에 육박한다. 이 밖에도 핀란드 엘리베이터 업체 코네는 지난달 독일 경쟁사 TK엘리베이터를 294억 유로(약 51조6,3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2위 은행 우니크레디트도 독일 최대 은행 코메르츠방크에 350억 유로(약 61조4,700억원) 규모 합병을 제안하며 직접 주주 설득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