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는 늘어도 자립은 요원” EU 반도체 육성책 실효성 의문, 글로벌 기업 유치 전략 재검토론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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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자립 목표 아래 대규모 투자 유치 추진한 EU, 성과 제한적 TSMC·인피니언 등 투자에도 최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 확보 '난항' 신규 공장 건설보다 기존 설비 고도화·R&D 투자에 무게

유럽연합(EU)의 반도체 공급망 자립 계획이 삐걱거리고 있다. EU가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워 역내 반도체 생산 시설 확충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비·규제 장벽 등 유럽 시장 특유의 한계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에 속도가 붙지 못하는 양상이다. 실제 TSMC·인텔·엔비디아 등 주요 기업들의 유럽 투자 역시 최첨단 제조 공장 신설보다는 기존 생산시설 고도화, 연구개발(R&D) 역량 확보 등에 집중되는 추세다.
EU 반도체 시장의 비용·규제 장벽
지난 15일(이하 현지시각) 유럽 현지 매체 EU 퍼스펙티브스에 따르면, 독일 베를린 소재 기술정책 싱크탱크 인터페이스는 이날 발표한 정책보고서에서 "EU는 한국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단계적인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유럽 내 반도체 생산비 부담이 아시아보다 큰 데다, 규제 압박도 상당해 한국 기업들이 현지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할 경제적 유인이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실제 독일 전기·디지털산업협회(ZVEI) 자료를 살펴보면 유럽의 반도체 생산비는 비용 경쟁력을 갖춘 아시아 내 지역보다 15~30% 비쌌다. 특히 독일의 인건비는 아시아보다 3~4배, 전기요금은 2~3배 높았으며 공장 건설비도 20~25% 더 많이 드는 것으로 추산됐다.
EU가 추진 중인 '유럽 반도체법 2.0' 역시 시장 진입 장벽으로 지목된다. 반도체법 2.0 제안을 살펴보면, EU로부터 공공자금을 지원받는 외국 기업은 공급망 관련 정보를 EU 당국에 제공하고 생산·공급 차질에 관한 정보 요청에 대응해야 할 수 있다. 반도체 공급 위기 발생 시에는 유럽 내 핵심 산업의 주문을 우선 처리하도록 요구받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민감 정보 공개 부담이 커지는 데다 생산·공급 의사결정의 자율성까지 제한되는 셈이다. 이에 보고서는 EU가 한국 반도체 기업과의 협력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짚었다. 한국·EU 반도체 업계 간 협의체 설립, 공동 R&D 확대, 연구 성과를 활용한 합작 법인 설립, 소규모 투자 등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망 협력 분야로는 AI 반도체 설계, 친환경 반도체 기술, 화합물 반도체, 방산용 반도체 등이 제시됐다.
반도체 자립 전략 실효성 '안갯속'
이러한 제언이 나온 배경에는 EU의 반도체 공급망 자립 계획이 있다. 앞서 EU는 2030년까지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유럽의 매출 점유율을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2023년 9월 유럽 반도체법을 발효했다. 해당 법은 반도체 R&D부터 설계·생산에 이르는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고, 보조금 지원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역내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골자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반도체법 시행 이후 발표되거나 계획된 역내 제조 시설 투자 규모는 800억 유로(약 119조9,750억원)에 달하며, 이 가운데 현재 진행 중인 생산 시설 사업에 약정된 공공·민간 투자액은 520억 유로(약 77조9,840억원)를 웃돈다.
다만 막대한 투자 유치에도 불구, 반도체 자립 목표 달성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한 실정이다. 집행위 통계를 살펴보면 2024년 유럽의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 매출 점유율은 10.5%에 그쳤으며, 지난해에는 8.8%까지 낮아진 것으로 추산됐다. 유럽 내 관련 산업의 매출 규모가 확대되고 있지만, 미국·아시아 등 주요 지역에서도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면서 세계 시장 내 입지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모습이다. 유럽회계감사원(ECA) 역시 지난해 4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2030년 EU의 세계 반도체 가치사슬 점유율이 목표치인 20%에 크게 못 미치는 11.7%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며, 기존 반도체법만으로는 목표 달성이 사실상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에 더해 EU의 반도체 경쟁력은 전력반도체·마이크로컨트롤러·반도체 제조 장비 등 일부 분야에 국한되며, 5나노미터(㎚) 미만 첨단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기술 방면에서는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아직 높다고 전해진다.
첨단 반도체 투자 드물어
이 같은 한계는 실제 반도체 생산 시설 투자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유럽에 설비 투자를 단행한 기업들의 경우, 자동차·산업용 반도체와 전력 관리용 반도체 등 유럽이 기존에 강점을 보유한 제품군을 중심으로 생산을 늘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대만 TSMC와 독일 인피니언·보쉬, 네덜란드 NXP가 합작해 독일 드레스덴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이다. 유럽반도체제조회사(ESMC)라는 합작법인을 통해 진행되는 해당 사업은 독일 정부의 50억 유로(약 7조4,985억원) 규모 보조금 지원을 바탕으로 2024년 8월 착공했으며,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완공 후에는 12인치(300㎜) 웨이퍼를 월 4만 장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28㎚·22㎚·16㎚·12㎚ 등 4개 제조 공정을 활용해 자동차·산업용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독일 인피니언은 지난 7월 드레스덴에 50억 유로를 투입한 스마트 파워 팹을 개장했다. 이 공장은 12인치 웨이퍼 기반의 전력반도체와 아날로그·혼합신호 반도체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스 역시 드레스덴의 기존 생산 거점에 11억 유로(약 1조6,500억원)를 투자해 2028년 말까지 연간 12인치 웨이퍼 생산 능력을 100만 장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와 함께 저전력·고집적 반도체 제조 기술인 FDX 퓨전(FDX Fusion)을 도입해 자동차·산업용 장비 등에 쓰이는 반도체 생산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TSMC의 드레스덴 공장은 현재 글로벌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상용화된 2~3㎚급 최선단 공정이 적용되지 않으며, 글로벌파운드리스가 개발 중인 FDX 퓨전도 최첨단 고성능 연산용 반도체를 양산하는 기술과는 차이가 있다"며 "EU의 역내 반도체 생산 능력이 확충됐음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 연산용 첨단 반도체와 고성능 메모리 등의 해외 생산 시설 의존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엔비디아는 R&D 등에 초점
엔비디아 역시 유럽 시장에서 공장 신설보다는 현지 기업 지분 확보, R&D 지원, 전문 인력 양성 등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독일·스웨덴·이탈리아·스페인·영국·핀란드 등 6개국에 AI 기술 센터를 설립·확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엔비디아는 독일 바이에른에서 의료·로봇 분야의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스웨덴에서는 현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기술 지원과 실무 교육을 제공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각각 국립 슈퍼컴퓨팅 연구 기관인 CINECA와 바르셀로나 슈퍼컴퓨팅센터를 통해 AI 연산 인프라를 확충 중이다.
지난 13일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유럽에 20억 달러(약 2조6,695억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엔비디아가 지난 1년간 유럽에 투입해 온 80억 달러(약 10조6,780억원)와는 별개의 자금이다. 신규 투자 대상에는 프랑스 의료 플랫폼 독토립, 로봇 개발업체 제네시스 AI,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 피그먼트, AI 기반 소재 연구업체 엔탈픽 등이 포함됐으며, 이들 기업에 대한 개별 투자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표1. 주요 반도체 기업의 유럽 투자 현황
| 기업 | 주요 투자 | 투자 방향 |
|---|---|---|
| TSMC·인피니언·보쉬·NXP | 독일 드레스덴에 ESMC 합작 공장 건설, 2027년 말 가동 목표 |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생산 |
| 인피니언 | 2026년 7월 드레스덴 스마트 파워 팹 개장 | 전력·아날로그·혼합신호 반도체 생산 |
| 글로벌파운드리스 | 드레스덴 기존 공장에 11억 유로 투자, 2028년 말까지 생산 능력 확대 |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생산 확대, FDX 퓨전 기술 도입 |
| 엔비디아 | 유럽 6개국 AI 기술센터 확충 및 유럽 기업 투자 | 현지 생산보다 R&D·인력 양성·기업 투자에 집중 |
| 인텔 | 독일·폴란드 신규 공장 계획 철회, 아일랜드 렉슬립 공장에 50억 유로 투자 | 기존 시설 고도화 및 서버용 프로세서 생산 확대 |
인텔, 공장 신설 계획 접고 기존 시설에 투자
미국 인텔도 유럽 내 반도체 생산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 중이지만, 신규 공장이 아닌 기존 제조 시설의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 인텔은 당초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300억 유로(약 44조9,910억원)를 투입해 첨단 반도체 공장 2곳을 건설하고, 폴란드 브로츠와프에는 반도체 조립·시험 시설을 구축할 예정이었다. 독일 정부는 마그데부르크 프로젝트에 약 100억 유로(약 14조9,970억원)의 보조금 지원을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두 사업은 인텔의 실적 악화 및 투자 지출 조정을 이유로 지난해 7월 최종 철회됐다.
이후 인텔은 지난 7월 아일랜드 더블린 인근 렉슬립 생산기지에 50억 유로를 추가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렉슬립 생산기지는 인텔이 1989년부터 운영해 온 유럽의 핵심 반도체 제조 거점으로, 인텔 4·인텔 3 공정을 기반으로 고성능 프로세서를 생산 중이다. 이번 투자는 기존 클린룸의 생산 라인을 개선하고 첨단 제조 장비를 도입하는 한편, 캠퍼스 내 여러 제조 시설을 연결하는 자동화 이송 시스템을 확충하는 데 사용된다. 인텔은 이를 통해 인텔 3 공정을 적용한 차세대 서버용 프로세서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AI·고성능컴퓨팅(HPC) 시장의 반도체 수요 증가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