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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원유 막히자 남미로” 美 제재 완화에 몰리는 자본,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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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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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그 이야기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서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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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기업 자율성 확대·美 제재 완화로 투자 여건 개선
美·유럽·중동 자본 유입에 원유 수출 증가까지 가세
고물가·전력난 해소 및 산업 재건은 장기 과제로

베네수엘라가 석유·가스 산업 재건을 앞세워 해외 자본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외국 기업의 경영 자율성을 확대한 데 이어 미국의 제재 완화로 거래 여건까지 개선되면서 미국·유럽·중동 기업들이 투자와 사업 확대에 나섰다. 이란 전쟁에 따른 중동산 원유 공급 차질로 수출도 늘며 개발 자금 확보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다만 고물가와 전력난, 노후한 생산시설이 경제 회복을 가로막고 있어 석유 수익을 산업 재건과 고용 확대로 연결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베네수엘라, 5년간 석유·가스 투자 760억 달러 예상

19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7일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대행은 향후 5년간 석유·가스 부문에 760억 달러(약 100조9,800억원)의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다. 개편된 석유·가스 법제에 따라 체결한 협정은 61건으로, 추가로 44건을 협상 중이다. 이 가운데 미국과의 양자 협정에는 유전 17곳 개발과 시추 장비 250기 투입 계획이 담겼다. 로드리게스 대행은 해외 투자에 자국 자본과 인력을 결합해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며, 관련 사업으로 직간접 고용과 파생 일자리가 32만4,000개 이상 창출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들의 투자 계획도 구체화되고 있다. 미국 석유기업 셰브런은 지난달 2일 베네수엘라 정부와 합작사업의 세제·상업·법률 조건을 조정하고 오리노코 벨트의 추가 개발권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5년간 현지 합작사업에 70억 달러(약 9조3,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하루 생산량을 약 60만 배럴로 늘릴 계획이다. 셰브런의 증산은 기존 사업지 주변으로 개발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이를 위해 셰브런이 지분 49%를 보유한 합작사 페트로인디펜덴시아는 인접한 카라보보 1구역과 카라보보 2 남부 A구역의 개발권을 확보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같은 날 이탈리아 에너지기업 에니와도 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에너지 생산 확대에 필요한 전력 공급 기반을 정비하기 위한 협력도 추진했다. 미국 GE버노바와 베네수엘라 국영 전력회사가 맺은 국가 전력망 강화 협정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란 전쟁에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 반사이익

외국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사업을 확대하는 데는 서방 기업의 경영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뀐 베네수엘라 정부의 정책이 뒷받침됐다. 지난 1월 의회를 통과한 석유법 개정으로 민간 기업은 합작사 지분이 소수에 그치더라도 사업을 운영하고, 생산한 원유를 직접 판매해 대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됐다. 국영 석유회사 PDVSA가 통제하던 생산·판매 과정에 외국 기업의 참여 여지가 커진 것이다. 특히 원유 판매 대금을 직접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투자금 회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후속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도 법 개정 직후 원유 수출 관련 제재를 완화하며 거래 재개를 지원했다. 이에 PDVSA의 합작 파트너와 국제 원자재 거래업체들은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공급받아 미국·유럽·아시아 정유사에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사업 여건이 달라지자 과거 자산 국유화로 철수했던 엑손모빌과 코노코필립스도 현지 복귀 가능성을 살피기 시작했다. 엑손모빌은 과거 운영했던 세로 네그로 중질유 사업에 기술팀을 보내 유전과 처리시설의 상태를 점검했으며, 두 회사는 투자금 회수와 사업권 보호에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며 베네수엘라 측과 협의를 진행했다.

여기에 이란 전쟁으로 중동산 원유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찾는 수요도 늘었다. 호르무즈 해협의 운송이 막히자 인도 정유사들이 부족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4~5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등 중남미산 원유 수입을 확대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4월 원유·석유제품 수출량은 하루 평균 123만 배럴로 전월 대비 14% 증가하며 2018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5월에도 하루 약 125만 배럴을 수출해 석 달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으며,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61%에 달했다. 주요 수출처는 미국 하루 55만8,000배럴, 인도 42만7,000배럴, 유럽 16만9,000배럴로, 세 지역 모두 전월보다 반입량을 늘렸다. 비톨·트라피구라 등 국제 원자재 거래업체들이 취급한 베네수엘라산 수출 물량도 4월 하루 69만1,000배럴에서 5월 78만7,000배럴로 증가했다.

표1. 베네수엘라 원유·석유제품 수출 현황

구분시기·지역주요 내용
수요 확대 배경4~5월이란 전쟁·호르무즈 해협 운송 차질
인도 정유사, 베네수엘라·브라질 등 중남미산 원유 수입 확대
전체 수출량4월하루 평균 123만 배럴, 전월 대비 14% 증가
2018년 이후 최대
5월하루 약 125만 배럴, 전년 동월 대비 61% 증가
3개월 연속 증가
주요 수출처
(5월)
미국하루 55만8,000배럴, 전월 대비 증가
인도하루 42만7,000배럴, 전월 대비 증가
유럽하루 16만9,000배럴, 전월 대비 증가
국제 거래업체
취급 수출량
비톨·트라피구라 등4월 하루 69만1,000배럴 → 5월 78만7,000배럴
자료: 로이터통신,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

베네수엘라 원유 거래 주도권 쥔 미국

베네수엘라의 수출 판로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거래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은 이란 전쟁 발발 전인 지난 1월부터 베네수엘라산 원유 판매를 주선하고, 판매 대금을 미국이 통제하는 계좌에 예치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은 당시 저장돼 있던 원유를 우선 판매한 뒤 향후 생산 물량까지 계속 취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유럽 기업들도 베네수엘라 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미국의 허가를 구했다. 스페인 렙솔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모렐앤드프롬은 지난 1월 미국 당국에 원유 수출 허가를 신청하며 거래 재개에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미국 정유업계에는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실익이 있다. 멕시코만 연안의 대형 정유시설 상당수는 중질유 처리에 적합한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2019년 제재 이전에는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하루 80만 배럴씩 들여와 정제했다. 해상 운송이 용이하고 해당 유종을 오랫동안 취급해 온 경험도 있어 수입 확대에 유리한 조건이다.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처리할 설비를 갖춘 미국 정유사들은 원유 조달 비용을 낮추기 위한 직거래에도 나섰다. 필립스66과 시트고는 지난 2월 PDVSA와 직접 구매를 협의하며 중개업체를 거치던 공급 경로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유럽·중동 자본도 베네수엘라 자원 개발 가세

미국 정유사들이 베네수엘라와 원유 직거래를 추진하는 가운데, 유럽과 중동 기업들은 유전·가스전 개발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 토탈에너지스는 지난달 19일 PDVSA와 에너지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베네수엘라 사업 복귀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계열사인 토탈에너지스 E&P 뉴벤처스가 에너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내용이다. 중동 자본은 해상 가스전 개발에 진입했다. 영국 BP와 아랍에미리트(UAE) 국영 석유회사 아드녹의 해외 투자회사 XRG, 카타르 UCC오일앤드가스는 지난 8월 로란 가스전 2단계 사업권을 확보했다. 세 회사가 동일한 지분을 보유하고 BP가 운영을 맡는 구조로, 해당 구역의 회수 가능 가스 자원은 약 4조 세제곱피트(ft³)로 추산된다.

유럽과 중동 자본이 베네수엘라로 향하는 데는 전쟁에 따른 공급 차질에 대비해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XRG는 베네수엘라 진출을 중남미·대서양 지역의 가스·액화천연가스(LNG) 사업 확대 전략의 일부로 제시했다. 로란 가스전을 해외 생산 거점으로 확보해 역내 사업을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함께 사업에 참여한 UCC는 주변 지역에 가스 수요가 형성돼 있고 기존 처리시설도 갖춰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스전 개발과 함께 생산 물량을 가공하고 판매할 여건까지 살핀 셈이다. 이를 토대로 사업성을 검토하기 위해 지하 자원 평가와 설비 설계, 가스 판매 경로 검토를 진행할 예정이다.

진출 기업들은 사업성 검토에 이어 설비 구축과 생산까지 내다보고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영국 투자회사 아페르투라에너지는 지난 7월 런던 투자 설명회에서 현지 사업에 장기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첫 단계로 향후 1년 안에 사업 기반을 마련해 탐사·생산 부문 거래를 성사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레이그 길버트 최고경영자(CEO)는 현지 유전 서비스 시설이 노후화한 만큼 생산 역량을 되살리려면 추가 자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업 진입 이후에도 설비 복구와 개발에 투자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생산 기반을 갖추는 데 필요한 기간과 기업들이 제시한 장기 사업 계획을 고려하면, 종전 이후에도 개발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석유 수출 회복에도 민생 정상화는 장기 과제

다만 장기 개발 자금이 유입되더라도 국내 산업과 민생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베네수엘라는 오랜 투자 부족으로 생산 기반이 약해진 데다 외화 부족과 통화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올해 2월 연간 물가상승률이 약 600%까지 치솟았다. 기업의 원자재 구매와 가계 소비를 뒷받침하려면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시중에 원활히 공급돼야 하는 상황이다.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전력과 연료 공급도 불안정하다. 지난 5월 기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발전 용량은 전체 설비의 40%에도 못 미쳤으며, 파라과나 정유단지에서는 정전으로 휘발유 생산시설 재가동과 연료 배송이 지연됐다. 전력 전문가 미겔 라라는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데만 3년에 걸쳐 최소 150억 달러(약 19조9,320억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산업 기반 복구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만큼, 석유 판매 수익을 재건 사업에 투입하고 국제금융기구의 지원을 확보하는 작업도 중요해졌다. 지난 4월 베네수엘라 정부와 협의한 해외 전력설비 공급업체 일부는 대금 회수를 보장받기 위해 미국 재무부가 감독하는 석유 판매대금 계좌에서 공사비를 직접 지급받는 방안을 제안했다. 같은 달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베네수엘라 정부와의 관계를 재개하면서 재건 자금 지원을 논의할 통로도 열렸다. 금융 지원에 필요한 경제통계 정비와 상환 능력 평가가 후속 과제로, IMF는 정부의 공식 요청과 정책 이행 약속, 충분한 자료가 갖춰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금 조달 절차와 실제 복구 공사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산업 정상화는 수년에 걸쳐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3월 베네수엘라에서는 정부의 불투명한 달러 배분으로 기업들이 비공식 시장에서 더 비싼 값에 외화를 구하면서 비용 부담이 커졌다.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 설비 투자에 활용하려면 외화 공급 경로부터 정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설비를 들여온 뒤에도 설치와 시운전에 시간이 걸리고, 정상 조업을 위해서는 전력·연료 공급망 복구가 뒷받침돼야 한다. 재건 초기에는 설비와 기반 시설에 대한 지출이 먼저 늘어나는 만큼, 투자 확대가 생산과 고용 회복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차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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