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대출 규제 영향’ 서울 아파트 거래 ‘9억원 이하’가 절반 이상

‘대출 규제 영향’ 서울 아파트 거래 ‘9억원 이하’가 절반 이상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이동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한 경험을 통해 IT 기업들의 현재와 그 속에 담길 한국의 미래를 전하겠습니다.

수정

9억원 이하 거래 비중, 직전 두 달 대비 10%p 증가
정책대출 지원 없는 9억∼15억원 이하 아파트 직격탄
30억원 초과 초고가 거래는 되레 증가, "그들만의 리그"
molit_APT_PE_20241028

9월 이후 팔린 서울 아파트 가운데 9억원 이상 아파트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대출 지원을 받기 위해 무주택 수요자들이 9억원 이하 아파트로 몰린 영향으로 분석된다.

9∼10월 9억 이하 거래 비율 52.8%

28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9∼10월 매매돼 이달 25일까지 거래 신고를 마친 서울 아파트 총 4,138건 중 9억원 이하 거래 건수는 2,184건으로 전체의 52.8%를 기록했다. 직전 2개월(7∼8월)간 9억원 이하 거래 비율(43%, 1만5,341건)보다 10% 포인트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올해 초만 해도 서울 아파트 매매 시장은 급매물이 팔리기 시작하고 아파트값이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면서 고가 아파트 거래가 크게 늘었다. 특히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이 강해지며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나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 같은 상급지의 거래가 증가했다. 지난 5∼6월 기준 9억원 이하 거래 비율은 41.3%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달 2단계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시행과 함께 시중은행이 가계부채 관리를 이유로 대출 이자를 올리자 거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유주택자의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의 대출 규제도 9억원 이하 거래 비율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국토부에 따르면 지난 7월 9,024건(계약일 기준)에 달했던 서울 아파트 매매 건수는 8월 들어 6,329건으로 줄었고, 9월에는 감소폭이 더 커졌다. 이달 27일까지 신고분은 2,890건에 그쳐 8월 대비 절반 수준으로 급락했다.

초고가 아파트 거래 비중은 늘어, 대출 규제 영향 無

특히 9억∼15억원 이하 중고가 금액대의 거래 위축이 두드러졌다. 지난 7∼8월 33.7%에서 9∼10월 들어 27.6%로 6%포인트 이상 감소했다. 15억∼30억원대 거래 비율 역시 7∼8월 19.2%에서 9∼10월은 15.1%로 4%포인트가량 감소했다. 월별 추세로도 최근 9억원 이하 거래 비율이 커지는 추세다. 지난 7월 41.7%였던 서울 아파트 9억원 이하 거래 비율은 8월 들어 44.9%로, 9월에는 50.2%로 증가했다. 거래 신고 기한이 다음 달 말까지인 10월은 현재까지 거래 신고물량의 58.7%가 9억원 이하 거래다.

눈길을 끄는 것은 30억원을 초과하는 초고가 아파트 거래 비율이 되레 증가했다는 점이다. 지난 7∼8월 4.0%였던 30억원 초과 거래 비율은 9∼10월 들어 4.5%로 늘었다. 자산가들이 선호하는 초고가 아파트는 대출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의미다. 서초구 반포동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어차피 고가아파트 거래는 현금 부자 또는 고액의 대출이 가능한 전문직 종사자 등 그들만의 리그"라며 "애초 초고가 주택은 대출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규제로 인한 영향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고 말했다.

molit_APT_PE_002_20241028

높아진 대출 문턱에 지방은 더 '위축'

반면 지방에선 거래가 줄고, 가격 하락 폭이 커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축 아파트값이 초기 분양가 수준까지 떨어졌다. 스트레스 DSR 2단계가 적용된 9월 이후 아파트값 흐름을 살펴본 결과, 서울의 아파트값은 지난 25일 한국부동산원의 주간 조사 누적치를 기준으로 두 달여간 1.13%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전체로 보면 0.74% 올랐다.

하지만 같은 기간 지방(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의 아파트값은 0.15% 하락했다. 지방 5대 광역시(광주·대구·대전·부산·울산) 아파트값 역시 0.27% 떨어졌다. 대구(-0.59%)·부산(-0.26%)·광주(-0.19%)·대전(-0.11%) 등 순으로 하락 폭이 컸다. 평균매매 가격 격차도 확대됐다. KB부동산의 월간 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지난 1월 수도권(6억1,808만원)과 지방 5대 광역시(3억2,641만원)의 주택 평균매매가격 차이는 2억9,167만원에서 지난 9월엔 3억7,86만원으로 커졌다. 같은 기간 수도권 주택 평균매매가격은 1,509만원 올랐지만, 5대 광역시는 오히려 110만원 하락했다.

부산의 경우 부동산원 통계 기준으로 2022년 6월 20일 조사 이후 123주(2년 4개월) 연속 아파트값이 하락했고, 대구도 하락세가 49주 연속 이어지고 있다. 일부 신축 아파트의 경우엔 3~4년 전 분양가 수준으로 추락한 곳도 속출한다. 부산 강서구 강동동 에코델타호반써밋스마트시티 전용 84㎡는 지난달 5억2,124만원(10층)에 거래됐다. 해당 면적 최고가는 지난해 11월 6억1,284만원(18층)이었는데, 1년 새 1억원이 떨어진 것이다. 분양가가 중층 기준 5억1,000만~5억2,000만원으로 사실상 집값이 최초 분양가 수준으로 하락했다.

‘악성 미분양’도 지방에 집중돼 있다. 국토부에 따르면 8월 기준 전국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은 1만6,461가구인데, 이 중 지방 물량이 1만3,640가구로, 전체의 83%를 차지한다. 대구 일부 신축 아파트에서는 1억원에 육박하는 마이너스 프리미엄(마피) 매물이 등장할 정도다.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분양가보다 1억원 낮은 가격에라도 서둘러 집을 팔겠다는 얘기다. 미분양이 지속하자 아파트를 매수하면 명품 가방을 주겠다고 홍보하는 지방 건설사도 있었다.

부동산 양극화에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수도권은 대출 규제 등을 통해 집값 급등세를 누르는 한편, 지방은 부동산 경기 불씨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금융당국은 지난달 스트레스 DSR 2단계를 적용하면서 스트레스 금리를 수도권(1.2%포인트)과 지방(0.75%포인트)을 차등 적용했다. 국토부의 경우 정책대출인 디딤돌 대출의 한도 축소를 예고하면서 이를 수도권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실제 디딤돌 대출이 가능한 주택가격 5억원 이하(신혼부부 6억원, 신생아 특례 9억원 이하)가 대부분 지방에 몰려있어 대출 한도를 전국적으로 줄일 경우 지방 부동산에 미치는 타격이 더 클 것이란 우려에서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이동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한 경험을 통해 IT 기업들의 현재와 그 속에 담길 한국의 미래를 전하겠습니다.

성장 엔진 식은 폭스바겐, 10% 임금 삭감 및 공장 폐쇄 검토

성장 엔진 식은 폭스바겐, 10% 임금 삭감 및 공장 폐쇄 검토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차수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정확성은 신속성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믿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신선한 시각으로 여러분께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수정

폭스바겐 '허리띠 졸라매기' 착수, 인건비 40억 유로 절감
독일 내 생산 시설 폐쇄도 검토 중, 2만 개 일자리 소멸 전망
68만에 이르는 직원, 수익성 낮아, '고용안정협약' 종료되나
volkswagen_TE_20241028
사진=폭스바겐

글로벌 주요 완성차 기업인 폭스바겐(Volkswagen)이 다양한 비용 절감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독일 자동차 업계를 이끌던 대표 기업의 성장 엔진이 차갑게 식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폭스바겐, 인건비 절감 방안 검토

2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한델스블라트 등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최근 인건비 절감에 나섰다. 폭스바겐은 임금 10%를 삭감하고 2년간 동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통해 40억 유로(약 6조원)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 경영진 판단이다. 이와 더불어 최고위 직원들의 보너스 상한선 설정을 비롯해 각종 기념일 수당 축소 등도 논의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바겐은 지난 30년간 유지해 왔던 고용안정협약도 종료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를 통해 2026년까지 150억 유로(약 22조원)를 절약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와 관련해 독일 매체 슈피겔은 폭스바겐 조치로 일자리 2만 개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 내 폭스바겐 직원은 10만 명에 달한다.

獨 정부 세액 공제 부활했지만

폭스바겐이 구조조정에 나선 건 수익성 악화에 따른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함이다. 폭스바겐의 올해 2분기 매출액은 833억 유로(약 124조6,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4%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55억 유로로 2% 감소했고, 영업이익률도 6.6%를 기록해 0.4%포인트 낮아졌다.

폭스바겐은 내연기관차 중단을 서둘러 온 유럽연합(EU) 정책에 맞춰 급히 전기차 전환에 나섰지만 수요 부진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올해 1~7월 유럽에서 팔린 승용차 중 전기차는 13.8%에 불과한데, 그마저도 중국차가 대부분 잠식했다. 지난 6월 중국의 유럽 전기차 시장 점유율이 11%로 사상 최고였다.

게다가 폭스바겐은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도 15년간 지켜온 1위 자리도 중국 전기차 BYD에 내줬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과 방대한 내수에 힘입은 중국 기업에 기술·가격 경쟁력 모두 뒤처졌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며 전기차의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에 대응한 한국·일본 기업에도 밀렸다.

이렇다 보니 시가총액도 글로벌 자동차 판매 1위 기업인 도요타와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지난해 글로벌 차량판매 대수는 도요타가 1,123만 대, 폭스바겐이 924만 대다. 하지만 폭스바겐의 시가총액은 522억 유로(약 78조원)로, 42조 엔(약 390조원)에 달하는 도요타 시가총액과 무려 5배 가까이 차이난다.

이에 독일 정부는 지난 9월 전기차를 구매하면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세제 개편안을 급히 의결했다. 올해 7월부터 2028년 12월까지 구매한 전기차에 적용된다. 이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지난 7월 독일 정부가 발표한 경기부양 패키지의 일부로, 독일 정부는 세금 절감 효과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연평균 약 4억6,500만 유로(약 6,9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같은 소식은 폭스바겐이 경영 악화로 독일 내 공장 폐쇄와 인력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지 이틀 만에 나왔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2일 폭스바겐이 독일 내 공장 폐쇄를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정부 지원에도 폭스바겐은 인건비를 줄이겠다는 기조를 굽히지 않고 있다. 업계는 폭스바겐이 비용 절감 외에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volkswagen_TE_002_20241028
사진=폭스바겐

노사 모두 구한 폭스바겐의 '워크쉐어링', 존폐 기로에

폭스바겐의 수익률 개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고용보장제도와 68만 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이 꼽힌다. 슈피겔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폭스바겐의 독일 현지 포함 전세계 임직원 수는 68만4,025명으로 도요타보다 약 30만 명이 더 많다. 전체 임직원 중 43.7%인 29만여 명이 독일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들은 노사 간 '고용안정협약'에 따라 2029년까지 고용이 보장돼 있다.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전하면서도 생산성을 높인 이른 바 '워크쉐어링(일자리나누기)'의 일환인 고용안정협약은 그동안 폭스바겐의 성장 원동력으로 역할했다. 1994년부터 실시된 워크쉐어링의 핵심은 사측이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조는 임금 보전 없는 근로시간 단축(주4일제 도입으로 주당 노동시간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단축)에 합의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시간이 20% 줄어들고 노동자 소득은 최고 16%가 줄어들었으나 고용이 안정돼 노와 사의 신뢰가 쌓였다.

노동유연성을 위한 조치도 마련했다. 1995년에는 감산으로 조업이 단축될 경우 노동자에게 기존 근로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보장해 주고 결손된 조업시간은 이후 증산 시 결산하는 등 내용을 담은 '노동시간 계좌제'를 도입했다. 이로써 폭스바겐은 수요 변동에 따라 생산량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교대제 또한 설비 특성에 따라 1교대제~3교대제 등 다양하게 분화시켰다.

2004년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50%에서 17%로 급락하는 등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폭스바겐은 워크쉐어링을 통해 위기를 벗어났다. 당시 폭스바겐은 2011년까지 노동자 전원 고용 보장과 3년간 임금 동결을 주고받았다. 그룹 내 타회사 파견까지 수용하는 등 노동자의 큰 희생이 뒤따르는 조치였으나 이 모델은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정리해고를 막은 것은 물론, 새 일자리까지 창출해 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적 악화로 인해 폭스바겐은 더 이상 노사 상생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폭스바겐 경영진이 독일 내 강도높은 구조조정과 함께 고용안정협약도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올리버 블루메 폭스바겐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성명에서 "고용안정협약을 이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몹시 어렵고 심각한 상황"이라며 "포괄적 구조조정을 거칠 것이며 공장 폐쇄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차수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정확성은 신속성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믿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신선한 시각으로 여러분께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동아시아포럼] ‘북한-러시아 협정’이 드러낸 글로벌 ‘안보 사각지대’

[동아시아포럼] ‘북한-러시아 협정’이 드러낸 글로벌 ‘안보 사각지대’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수정

‘북한-러시아 안보 협정’, 국제 사회에 ‘놀람과 우려’ 안겨
안보 전문가들, ‘집단 사고’ 빠져 중대 사건 예측 실패
가능성 낮아 보이는 가설들에 대한 폭넓은 검증 필요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올해 6월 북한과 러시아가 체결한 ‘포괄적 전략적 파트너십 조약’(Treaty on the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은 새로운 반서방 동맹(anti-Western alliances)이 동아시아 역학 구도에 심각한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를 국제 사회에 안겼다. 또한 북-러 간 군사적, 비군사적 협력 강화를 약속하고 있는 해당 조약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감안할 때, 안보 전문가들이 ‘집단 사고’(groupthink)에 빠져 중대한 사건 예측에 실패했다는 비판도 거세다. 안보 사각지대를 개선하기 위한 글로벌 안보 공동체(security community)의 접근 방식과 우선순위 재조정이 요구된다.

Russia and North Korea’s treaty_PE_20241028
사진=동아시아포럼

글로벌 안보 공동체, 북-러 안보 협정 “상상도 못 해”

북한과 러시아 간 안보 협정은 양국 간 소통 및 전략적 협력의 강화, 외부 공격 대응 시 상호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로서는 충돌 시 고려해야 할 위험과 전략적 복잡성이 커진 셈이고 북한과 러시아는 상당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사안 자체도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지만, 여기에 더해 글로벌 안보 전문가들이 적대국인 북한-러시아 간 공식적 협력 관계 수립을 예측은커녕 상상조차 못 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론 참여자만 1,000명을 넘는 국제 연구 협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연례 회의는 2022년 이후 통틀어 북한을 언급한 세션이 35개에 불과했고 논의 주제 역시 핵 위협, 미국의 억지력, 인권, 한국에 대한 영향, 사이버 공격 등 반복되는 주제에 그쳤다. 북한 외교 정책과 관련한 논의 역시 한국, 미국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국 정치학 협회(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모임에서도 토론 참여자가 1,200명을 넘는 가운데 단 7개 세션에서만 북한이 언급됐고, 국제 연구 협회의 2023년 아시아태평양 회의(Asia-Pacific 2023 conference)에서도 450명의 참가자 중 6명만 북한 관련 주제를 다뤘다.

심지어 정책 중심 행사로 일컬어지는 샹그릴라 대화(Shangri-La Dialogue, 정부 간 안보 컨퍼런스)에서도 북-러 안보 협정을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참석자들이 북한의 러시아 무기 공급을 한목소리로 규탄하는 가운데, 한국 측 당국자는 UN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관련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사실만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일본과 미국은 단일 국가 위협에 대한 다자간 대응에만 집중해 정보 공유의 중요성 언급 정도에 그쳤고, 누구도 서방의 ‘전쟁 억지 및 견제 전략’(deterrence and containment strategies)에 맞서 적대국들이 동맹을 결성할 가능성은 언급하지 못했다.

안보 문제 예측, ‘좁은 시야’와 ‘집단 사고’에서 벗어나야

조약이 미칠 영향과 대응 방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예상은 갈리는 편인데 북한-러시아 협력이 미국의 이해와 국제 질서를 위협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의 이해와 상충한다거나 한미일 동맹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북한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는 것부터 심지어는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자는 안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모든 분석과 대안에 앞서 강조돼야 할 사항은 기존 안보 논의 틀을 벗어난 새롭고 선제적인 연구 방법론의 필요성으로 판단된다.

안보 문제에 있어 좁은 시야와 집단 사고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중국과의 ‘대립 구도 첨예화’에서도 상황을 오판하게 만든 원인으로 지목된 바 있다. 북러 동맹이 한미일 3자 간 협력에만 시선을 고정한 미국 대외 정책이 초래한 결과이며, 심지어 이를 예측조차 못 했다는 비난이 쇄도하는 것도 반복되는 문제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물론 북한과 러시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은 워낙 폐쇄적이고 기밀 주의도 강해 정보 수집이 어렵기로 유명하고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사실상 고립주의로 돌아섰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서방 국가들의 정책도 양국을 국제 교류, 행사, 회의 등에서 배제함으로써 정확한 최신 정보의 수집을 어렵게 만들었다.

확률 낮지만 가능성 있는 가설들에 대한 폭넓은 검증 필요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어려움보다 더 큰 문제는 안보 공동체의 우선순위가 새롭고 예측에 기반한 연구 자체를 어렵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상 가능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안전한 안건이나 기확립된 주제를 앞세움으로써 북한-러시아 조약과 같이 가능성은 낮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일을 후순위로 밀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보 공동체가 우선순위를 바꾸고 보다 광범위한 주제를 포괄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토론 주제에 자주 오르지 않는 안건에 대한 연구 지원, 연구 분야 간 협업 강화, 소수 유명 학자들에 대한 의존 탈피 등이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안전한 환경에서 다양한 가설들을 실험할 수 있는 시나리오 시뮬레이션(simulation scenario)도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더욱 기대되는 분야다.

기억할 점은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각자의 비교 우위를 드러낼 때 집단 사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원문의 저자는 톰 르(Tom Le) 포모나 칼리지(Pomona College) 부교수 외 2명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Russia and North Korea’s treaty exposes blind spots in the security community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반도체 자유 무역은 죽었다" 美-中 갈등 따라 움직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반도체 자유 무역은 죽었다" 美-中 갈등 따라 움직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서지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매일같이 달라지는 세상과 발을 맞춰 걸어가고 있습니다.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에, 관성보다는 호기심에 마음을 쏟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수정

반도체 업계 美-中 갈등이 좌우, 파운드리 1위 TSMC도 '곤혹'
일본·네덜란드·한국 등 美 동맹국들도 줄줄이 영향권
갈등 중재해야 할 WTO, 사실상 반도체 시장서 영향력 잃어
usa china chip 20240806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반도체 자유 무역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대만을 비롯한 각국 반도체 생태계가 눈에 띄게 들썩이는 양상이다.

美 대중국 규제에 휩쓸린 TSMC

26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모리스 창 창업자는 이날 TSMC 연례 체육대회에 참석해 “반도체, 특히 최신 반도체 부문의 자유 무역은 죽었다”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계속 성장할지가 우리의 도전”이라고 말했다. 대만 TSMC는 미국 빅테크 중심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으로, 인공지능(AI) 열풍과 미·중 갈등이 교차는 지점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평을 받는 기업이다.

실제 TSMC는 최근에도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인한 잡음에 휘말린 바 있다. TSMC 반도체가 중국 화웨이 제품에 탑재된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상무부가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TSMC는 화웨이 AI 칩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제품이 중국 비트코인 채굴 업체 비트메인의 계열사 소프고에서 출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출하를 중단했다.

이후 미국 상무부는 TSMC의 미국 수출 통제 위반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확인했으나, 실제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언급할 수 없다고 밝혔다. TSMC의 대중국 제재 위반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는 의미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미·중 갈등에 '혼란'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미·중 갈등은 TSMC 등 민간 기업을 넘어 각 주요국의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유력 반도체 장비 제조사인 도쿄일렉트론을 보유한 일본의 경우, 미국으로부터 대중국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판매·유지 보수를 축소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이 반도체 장비 판매·유지 보수를 추가 제한할 경우 경제 보복을 가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업계는 중국이 자동차 제조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 공급을 차단, 도요타 등 일본의 완성차 기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또 다른 동맹국인 네덜란드는 2019년부터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 수출을 통제 중이다. ASML은 글로벌 반도체 노광장비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인정받는 기업으로, 7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공정에 활용되는 EUV 장비를 사실상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이에 더해 지난달 네덜란드 정부는 EUV 장비 대비 기술 수준이 낮은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수출 통제 범위를 확대, 대중국 규제 수위를 한층 높이기도 했다.

주요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사를 보유한 우리나라 역시 미·중 반도체 갈등의 영향권에 들었다. 앨런 에스테베스(Alan Estevez)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지난달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경제 안보 콘퍼런스에서 “세계에 HBM을 만드는 기업이 3곳 있는데 그중 2곳이 한국 기업”이라며 “그 역량을 미국과 우리 동맹의 필요를 위해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마이크론과 함께 글로벌 HBM 시장 ‘핵심 플레이어’로 꼽히는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정조준, 대중국 수출 통제 동참을 종용한 것이다.

chips_20241028

WTO 제재는 '유명무실'

그런데 이 같은 분쟁 상황을 조정해야 할 세계무역기구(WTO)는 반도체 시장에서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각국의 반도체 보조금 경쟁은 바닥에 떨어진 WTO의 권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WTO는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을 통해 회원국의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고 있다. 국가가 직접 나서 자국의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WTO에 제소를 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각 주요국은 WTO의 협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은 2022년 제정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인텔과 TSMC·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에 총 527억 달러(약 73조원) 규모 보조금을 제공한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되찾기 위해 구마모토의 TSMC 1공장 건설 비용 1조 엔(약 8조9,400억원)의 약 절반(4,760억 엔, 약 4조2,890억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TSMC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등에 업고 통상 5년 정도 걸리는 공장 건설 기간을 2년 수준까지 단축했다.

중국은 최소 270억 달러(37조4,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육성 펀드를 조성하며 반도체 굴기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유럽연합(EU)은 독일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360억 달러(49조8,700억원)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는 인텔에 투자 비용의 3분의 1(110억 달러, 약 15조2,380억원) 규모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유럽 반도체 기업과 TSMC의 합작 법인에 투자금의 절반에 달하는 보조금을 제공할 예정이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서지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매일같이 달라지는 세상과 발을 맞춰 걸어가고 있습니다.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에, 관성보다는 호기심에 마음을 쏟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삼성 이어 SK도 사실상 '주 6일 근무' 전환, 재계 확산 움직임

삼성 이어 SK도 사실상 '주 6일 근무' 전환, 재계 확산 움직임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남윤정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금융 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기사를 쓰겠습니다. 경제 활력에 작은 보탬이 되기 바랍니다.

수정

올해 초 삼성 전 계열사, 임원 주 6일 근무로 전환
SK도 '토요 회의' 부활에 이어 '커넥팅 데이' 도입
고강도 구조조정 속에 선제적 위기 대응 위한 조치
office retrun TE 20240808

저조한 실적으로 비상 경영을 선언한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원의 주 6일 근무가 확산하고 있다. 올해 초 삼성그룹이 전자 관련 계열사의 주 6일 근무를 본격화했고 SK그룹도 주요 경영진이 참석하는 '토요 회의'를 24년 만에 부활한 데 이어 다음 달부터 임원들의 토요일 출근도 시행하기로 했다. 현재 처한 위기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여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SK, 매주 토요일 협업과 소통 위한 '커넥팅 데이' 시행

28일 재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다음 달부터 매주 토요일 임원 대상 '커넥팅 데이'를 시행한다고 공지했다. SK이노베이션 임원 50여 명을 비롯해 SK에너지·SK지오센트릭·SK엔무브 등 계열사 임원들이 참여 대상으로 이들은 매주 토요일 오전 회사로 출근할 예정이다. 다만 팀장급의 토요일 출근은 자율 선택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미 비상 경영 중인 SK온과 다음 달 1일 SK이노베이션과 합병 예정인 SK E&S는 토요 근무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결정은 사실상의 '주 6일 출근'으로, 최근 그룹 차원의 고강도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데다 글로벌 경영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는 데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SK 측은 "정식 근무가 아니라 사내 소통 강화를 위한 워크숍, 외부 전문가 강연 등을 통해 협업과 학습의 장을 마련하는 취지"라며 "토요일 오전 중에만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사측은 일반적인 주 6일 근무와는 다르다는 입장이지만, 직원들은 임원의 토요일 출근으로 기강 잡기에 나선 것이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4일 SK에너지·SK지오센트릭·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등 3개 자회사 최고경영자(CEO)를 조기에 교체하며 조직 재정비에 돌입하기도 했다.

삼성·SK 외에 현대오일뱅크·롯데지주 등 주 6일 근무

삼성그룹도 토요일 출근에 나섰다. 삼성그룹은 지난 4월부터 시행한 '임원 주 6일 근무'를 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삼성디스플레이 등 전자 관계 계열사로 확대했다. 당초 삼성전자 임원들이 평일 외에 토·일요일 중 하루 더 일하는 방식으로 주 6일 근무를 하던 것이 주요 관계사로 확대된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에서만 15조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데다 올해는 반도체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어 이에 따른 대응 조치로 해석된다. 다만 임원 외에 부하 직원들의 동반 출근은 전면 금지했다.

삼성과 SK 외에도 실적이 악화한 기업을 중심으로 임원 주 6일 근무를 도입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HD현대오일뱅크·BGF리테일 등이 임원 주 6일제를 공식화했고 삼양그룹도 6월부터 임원만 월 2회 토요일 오전 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롯데지주 또한 지난 8월 비상 경영을 선포하며 임원들이 주말 회의를 하는 등 사실상 주 6일 출근 중이다. 격주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던 포스코 역시 최근 철강 업황 악화에 따라 6월부터 임원에 한해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20241031_work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주 6일 근무'는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기 위한 고육지책

재계에서는 국내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사실상 주 6일 근무제로 전환한 곳들이 늘어난 상황을 두고 그만큼 위기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분석한다.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제를 적용받지 않는 임원들은 기존에도 업무가 있으면 주말에 일해 왔는데, 이를 공식화하면서 일반 직원들도 위기를 체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비록 임원들로 한정되긴 하지만 연공서열 문화가 남아있는 한국 기업 풍토에서 일반 직원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에는 성과를 위해 근무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일하는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는 "주 40시간 일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고 아마존의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도 "일과 삶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라며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란 말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애플·구글·엔비디아 등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도 살인적 업무 강도로 유명하다. 이들은 근로 시간에 제한이 없는 대신 오직 성과로 평가받는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도 "지난해 반도체 사업에서 15조원의 적자가 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회사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데 과거의 방식대로 계속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프로젝트를 따거나 새 사업을 개발하려고 밤낮없이 일하는데, 우리는 시간 되면 퇴근해야 하니 경쟁이 될 수 없다"며 "주 6일제는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의 한 임원도 "상반기 수립한 리밸런싱 계획을 연내 실행하려면 토요 회의와 7시 출근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주 4일제 근무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유연근무 등을 확대해 온 기업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주 6일제 근무가 실질적으로 직원들의 업무 몰입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조직 내 군기 잡기나 보여주기식 해법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와 함께 빅테크의 인재들이 근무 시간이 아니라 성과 중심으로 평가받는 데 익숙한 만큼 경직된 조직 문화가 인재 영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남윤정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금융 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기사를 쓰겠습니다. 경제 활력에 작은 보탬이 되기 바랍니다.

한국 방위비 이어 ‘반도체법’ 비난한 트럼프 "반도체 관세 부과해 美에 공장 짓도록 해야"

한국 방위비 이어 ‘반도체법’ 비난한 트럼프 "반도체 관세 부과해 美에 공장 짓도록 해야"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이동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한 경험을 통해 IT 기업들의 현재와 그 속에 담길 한국의 미래를 전하겠습니다.

수정

트럼프 "반도체 기업 관세 매겨 美에 공장짓게 하자"
삼성·TSMC 혜택받는 美 반도체법 정면 비판
트럼프 당선 시 국내 반도체 기업 타격 불가피
Donald Trump PE 20240718 002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사진=도널드 트럼프 인스타그램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미 투자를 유인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정면 비판했다. 이들 기업에 보조금 대신 관세를 부과해야 했다는 주장이다.

트럼프 "반도체기업에 왜 돈 주나"

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틀 전 팟캐스트 진행자 조 로건(Joe Rogan)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법에 대해 “그 반도체 거래는 정말 나쁘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는 부자 기업들이 와서 돈을 빌려서 여기에 반도체 기업을 설립하도록 수십억 달러를 대는 데 그들은 어차피 우리한테 좋은 기업들은 주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보조금을 주지 말고 고율 관세를 매겨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유치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센트도 줄 필요가 없었다”며 “관세율이 아주 높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이 그들 스스로 미국에 와서 반도체 기업을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게다가 이들 반도체 기업은 매우 부유한 기업들"이라며 "그들은 우리 사업의 95%를 훔쳤고 그게 지금 대만에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 TSMC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어 "대만이 엄청나게 잘하고 있는데, 그건 오로지 우리의 멍청한 정치인들 때문"이라며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잃었고 이제 우리가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반도체 공장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자기 돈을 미국에서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만이 미국에 방위비를 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Samsung_TEXAS_TE_20241028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에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전경/사진=삼성전자

한국 반도체 기업에 부정적 영향

바이든 행정부에서 2022년 의회의 초당적 지지로 제정된 반도체법은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반도체 생산 보조금 390억 달러와 연구개발(R&D) 지원금 132억 달러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3조1,200억원)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마이크론 같은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세계 유수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대가로 보조금을 받는다.

구체적으로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새로 건설한 반도체 공장에 대해 반도체법 보조금으로 64억 달러(약 8조7,600억원)를,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에 예정된 반도체 패키징 시설을 위해 4억5,000만 달러(약 6,200억원)를 지원받는다. 이런 가운데 만약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아직 할당되지 않은 보조금이 남아 있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를 회수하려 들 수 있다. 이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 큰 위협이다.

이와 관련해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법에 의거해 미국 투자에서 보조금 지원을 받지만 반도체법이 축소되거나 보조금 지원 조항이 기존에 비해 국내 기업에 비우호적으로 결정되면 자금 압박 등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중국 투자 엄격히 제한하는 반도체법, 폐지 시 견제 무력화될 수도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반도체법이 폐지될 경우 대중국 견제 조치가 무력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반도체법이 미국 진출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사업 재조정을 사실상 강제하고 있어서다.

반도체법의 시행규칙인 이른바 '가드레일 규칙(Guardrail Rule)'에 따르면 보조금을 지원받는 기업은 지급 시점부터 10년간 중국 등 ‘해외우려국가’ 내 반도체시설의 생산시설은 5% 이하(일정 사양 이하의 구형 반도체 생산시설은 기존시설에 대해서는 10% 미만)의 확장만 허용되며, 이를 어기면 보조금을 반환해야 한다. 반도체 기업의 중국 투자를 제한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다.

미국은 또 개별 기업에 대한 반도체 보조금 지급 요건과는 별개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미 자국 기업에 대해서는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고 있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 네덜란드 등 주요 반도체 장비 수출국에도 비슷한 수준의 통제를 요구했으며, 지난해 말부터는 한국도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법을 폐지하고 고율 관세로만 대중국 압박을 이어갈 경우 중국을 글로법 공급망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도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이동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고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한 경험을 통해 IT 기업들의 현재와 그 속에 담길 한국의 미래를 전하겠습니다.

日 이시바 '전략 오판'으로 참패, 자민당 독주해 온 일본 정치 격랑 불가피

日 이시바 '전략 오판'으로 참패, 자민당 독주해 온 일본 정치 격랑 불가피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민주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지금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표류하지 않도록, 정확한 정보만 골라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수정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조기 총선, 승부수 아닌 '자충수'
정치 문제보다 경제에 관심 높은 민심 못 읽어
야당 노다 대표, 비자금 비판하며 중도 성향 유권자 포섭
JP_election_PE_20241028_01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단독은 물론 공명당과의 연립으로도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이로써 2012년 정권 재탈환 후 12년간 지켜온 자민당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이달 초 취임한 이시바 총리는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과는 ‘자충수’가 된 모양새다.

日 여당, 단독 과반 확보 실패

27일 NHK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선거에서 집권당인 자민당은 191석을 차지해 단독 과반을 달성하지 못했다. 연립 정당인 공명당 의석 수 24석을 합치면 215석으로, 중의원 465석의 과반(233석)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두 정당의 선거전 의석 수는 각각 247석, 32석으로 총 279석이었다.

반면 입헌민주당은 전체 의석 수 465석 가운데 148석을 차지했다. 현재 의석 수인 98석을 훨씬 웃도는 성과다. 입헌민주당은 과거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2012년 자민당에 정권을 뺏긴 뒤 네 차례 선거에서 57~96석에 그쳤다. ‘세 자릿수(100석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한 입헌민주당은 명색이 제1 야당이면서도, 200석 중·후반을 차지한 자민당과는 양당 구도라고 하기에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지금의 선거 제도 아래서 일본의 제1 야당이 전체 의석 수의 30% 이상을 차지한 것은 2003년 신진당(156석)과 2003년 민주당(177석) 두 차례밖에 없다”며 “민주당은 2003년의 약진을 발판 삼아,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었다”고 보도했다. 입헌민주당이 이번 총선 약진을 토대로 정권 교체에 도전할 수 있다는 평가다.

입헌민주당 노다 '우클릭', 중도층 표심 잡기 성공

일본 현지 언론들은 ‘입헌민주당의 우클릭(보수화)’ 전략이 중도 성향 유권자를 성공적으로 끌어왔다고 분석한다. 입헌민주당 내 가장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꼽히는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3년 전 총선 때와 정반대 전략을 택했다. 3년 전엔 지역구마다 일본공산당과 후보를 단일화했다가 강경 좌파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권자의 외면에 참패했지만, 이번엔 선거 협력을 하지 않고 일본공산당과 거리 두기를 했다.

노다는 지난달 대표로 취임한 직후 의석 수 98석에 불과한 입헌민주당으로선 무리하다고 여겨졌던 목표인 정권 교체를 내걸고, 집권 여당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야당과는 협력하지 않고 ‘입헌민주당의 길’을 고집해 성과를 냈다. 일본 정계는 장기 집권 중인 자민당이 싫어진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노다가 이끄는 우클릭 입헌민주당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고 진단했다. 60~70대 유권자의 비례대표 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이 자민당을 근소하게 앞섰다는 일본 언론의 여론조사가 나오는 배경엔 이런 ‘안정감’이 컸다는 것이다.

지바현 출신인 노다 대표는 자위대의 자위관 아들이며, 명문 정치 학교인 마쓰시타 정경숙(政経塾) 1기 출신이다. 입헌민주당 정치인이지만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노다 대표는 “A급 전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전쟁범죄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선이 굵은 정치를 하는 인물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国葬) 때는 민주당 출신의 전 총리로선 유일하게 참석했으며, 자민당의 요청을 받아 국회에서 아베 추도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번 총선 승리로 노다 대표는 ‘아베에게 정권을 뺏긴 총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와졌으며, 입헌민주당 내 입지도 한층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Ishiba Shigeru_PE_20241002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사진=이시바 시게루 총리 공식 홈페이지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희석 위한 선거

한편 새 정부 출범 27일 만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조기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결단한 이시바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번 중의원 선거는 사실상 지난해 집권 자민당에서 불거진 파벌 의원들의 정치 비자금 파문에 대한 국민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 자민당이 이시바 총리로 '당의 얼굴'을 바꾼 것도 비자금 스캔들을 희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 개혁안을 내놓지 못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비자금 연루 의원 40여 명이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민당 혹은 무소속으로 선거 출마를 강행한 데다, 자민당 본부가 공천 배제된 의원의 소속 지부에 당 활동비 2,000만 엔(약 1억8,000만원)을 지급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참패로 이어졌다.

자민당·공명당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놓친 기저에는 장기간 지속된 경제 부진과 고물가, 실질 임금 감소로 팍팍한 민생의 불만도 깔려 있다. 교도통신이 1∼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5.9%가 새 내각의 우선 과제(복수응답)로 ‘경기·고용·물가 대책’을 꼽았으며 이어 ‘연금·사회보장’(29.4%), ‘육아·저출산’(22.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유권자들의 관심이 정치 문제보다 먹고사는 데 집중돼 상황에서 이시바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내놓은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등의 공약이 먹힐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이에 자민당 내부에서는 이시바 총리 사퇴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날 현재 취임 28일이 된 이시바 총리의 사임이 이뤄질 경우, 역대 최단명 정권 기록을 새로 쓸 수도 있다. 앞서 일본에선 1994년 비자민당 소수 정당들이 뭉쳐 만든 하네다 쓰토무 정권이 출범 64일 만에 교체됐다. 자민당 따지면, 1988년 우노 소스케 총리가 취임 69일 만에 사임한 사례가 있다.

자민당 안에서 ‘반 이시바’ 세력들이 결집해 갓 출범한 새 지휘부를 흔들 가능성도 점쳐진다. 특히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당선자와 막판까지 경쟁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또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을 공개 지지했던 아소 다로 자민당 최고 고문은 당내에서 유일하게 파벌을 해체하지 않았고, 이시바 총리 지지 세력과 날을 세워온 ‘구 아베파’들이 여기에 가세할 경우 이시바 총리를 충분히 흔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취임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이시바 총리가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선거 패배의 근본 원인이 아베 신조 총리 시절부터 누적돼 온 파벌 정치인의 비자금이나 통일교와 유착 의혹 등 자민당의 오랜 적폐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총리 지명 선거를 위한 새 임시국회가 다음 달 7일 소집되는데, 남은 열흘 동안 당내에서 이시바 총리를 끌어내릴 만한 세력이 결집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민주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지금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표류하지 않도록, 정확한 정보만 골라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동아시아포럼] 일본 경제 위협하는 ‘환율 리스크’

[동아시아포럼] 일본 경제 위협하는 ‘환율 리스크’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수정

일본, 해외 투자 자산 축적으로 심각한 환율 리스크 직면
엔화 절상 우려에 인플레이션 대응 위한 금리 인상도 “족쇄”
‘엔-달러화 고정 환율제’ 주장 “힘 얻어”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일본은 국내 경제는 물론 글로벌 시장까지 위협하는 엔화 환율 변동이라는 불확실성과 씨름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금리 인상이 초래한 엔화 가치 절상과 이로 인한 세계 금융 혼란은 물가 조절과 환율 안정 사이에서 외줄타기해야 하는 일본의 위태로운 상황을 그대로 노출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엔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달러 페그제(dollar peg system)를 시행하자는 목소리가 일부 경제학자와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Exchange rate Japan_PE_20241027
사진=동아시아포럼

일본 금리 인상 발표, 엔화 절상으로 이어지며 세계 금융 시장 “흔들”

올해 8월 초 갑작스러운 일본은행(Bank of Japan)의 금리 인상과 양적 완화 축소 발표는 세계 금융 시장을 순식간에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은 바 있다.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한 금리 인상은 뒤이은 미국 고용시장 위축 소식과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의 금리 인하 전망과 함께 글로벌 시장에 충격파를 던졌다. 금리 인상이 바로 엔화 가치 절상으로 이어지며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s,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수익성이 높은 외화 표시 자산에 투자) 투자자들이 서둘러 외화 자산을 팔아 엔화 대출 상환에 나서며 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일본은행은 추가 금리 인상을 보류하고 시장은 안정됐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의 엔-달러 환율 변동과 캐리 트레이드가 글로벌 금융 시장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이 재조명됐다. 동시에 엔화를 달러화에 연동시켜 인플레이션 위험과 환율 변동성을 동시에 해결하자는 방안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일본, 90년대 이후 경기 침체 극복 위해 장기간 저금리 유지

일본의 엔-달러 환율은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의 무역 흑자가 급격히 상승하던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격동의 역사를 가졌다. 일본의 증가하는 무역 흑자는 교역 상대국들, 그중에서도 미국의 심기를 거슬렸고 일본은 불공정 무역 관행의 주범으로 지목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G5(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국가들이 모인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를 통해 일본은 대미 무역 흑자 축소를 위한 대 달러화 엔화 절상에 합의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한 급격한 엔화 매수와 가치 절상은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갉아먹어 이때부터 일본의 경제 위기가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일본의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95년에 시작한 엔화 가치 절하는 한국과 태국 등 이웃 국가들의 경쟁력 하락을 불러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동남아시아에 대거 융자했던 일본 은행들은 심각한 손실을 기록하고 98년 일본 금융 위기와 연결된다. 이때부터 일본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장기간 지속될 저금리 정책과 양적 완화를 채택하는데, 값이 싼 엔화를 빌려 고금리를 보장하는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시기다.

저금리로 인한 해외 투자 자산 증가, 심각한 환율 리스크 불러

점점 더 많은 일본 내 기관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들이 낮은 금리가 영속화되다시피 한 일본보다는 해외 투자에 눈길을 돌렸다. 일본의 개인 외환 거래자를 상징하는 ‘와타나베 여사’(Mrs Watanabe)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늘어난 일본의 해외 투자 자산은 작년에 3조 4천억 달러(약 4,728조원) 규모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거대 규모의 외화 표시 자산 때문에 일본은 엄청난 환율 변동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급격히 증가한 일본 노령 인구들이 주로 의존하는 연금 기금(pension fund)의 상당 부분이 해외에 투자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일본의 통화 정책은 소비자 물가 인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은행이 장기간 시행한 저금리 정책은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일본의 수출주도형 경제에 기여해 왔지만 2022년 이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일본은행의 정책 목표인 2%를 지속적으로 넘어서며 일본은행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엔화 가치 절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대규모 해외 보유 자산의 가치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금리 유지는 소비자 물가 상승을 방임하는 것으로 이미 고물가에 시달리는 일본 소비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시바 시게루(Ishiba Shigeru) 일본 총리와 정부 관료들은 경제 회복과 저성장 탈피를 위한 저금리와 양적 완화 위주의 통화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경제 구조는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에 익숙해져 제조업은 물론 금융 산업과 연금 기금까지 엔화 약세에 의존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생명 보험 회사와 연금 기금은 해외 자산 투자 비중이 매우 높아 갑작스러운 엔화 절상에 취약한 상태다. 정부연금투자기금(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의 경우 1조 7천억 달러(약 2,364조원) 규모의 보유 자산 중 절반가량이 해외에 투자돼 있다.

‘엔-달러화 고정환율제’로 환율 리스크 최소화가 “답”

이렇게 환율과 인플레이션 사이에서 외줄타기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일부 정책 결정자와 경제학자는 엔화를 달러화에 고정하는 달러 페그제(dollar peg system)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정 환율제가 주는 이점은 명확하다. 우선 일본 경제에 지속적으로 혼란을 초래해온 종잡을 수 없는 엔화 가치 변동을 잡을 수 있다. 엔-달러 환율이 안정화되면 일본 소비자들과 해외 자산에 극심하게 의존하고 있는 연금 생활자들이 환율 변동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엔-달러 고정환율제는 환율 변동으로 인한 해외 투자 자산의 가치 하락 리스크를 최소화할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정환율제를 통해 일본의 금융 정책을 미국과 연동시킴으로써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경감할 수 있다.

물론 달러 고정환율제 도입은 일본이 장기간 의존해 온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자율성을 일부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일본의 금리 인상이 극소 규모에 그친 것에서 드러나듯 일본의 통화 정책 자체가 이미 발이 묶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일본은행은 고정환율제 유지에 정책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그간 통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정치 집단이나 압력 단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제 엔-달러 고정 환율제 채택 여부는 특정 경제 제도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상호 의존성과 변동성이 심화되는 글로벌 시장에서 금융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 중 하나로 거론되는 상황이 됐다.

원문의 저자는 군터 슈나블(Gunther Schnabl) 라이프치히대학교(Leipzig University) 교수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Exchange rate uncertainty endangers Japan’s economic stability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해외 DS] GPS를 통한 자녀 위치추적, 진정 자녀를 위한 것인가

[해외 DS] GPS를 통한 자녀 위치추적, 진정 자녀를 위한 것인가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전웅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흥미로운 데이터 사이언스 이야기를 정확한 분석과 함께 전하겠습니다.

수정

과도한 위치추적, 부모와 자녀 간의 ‘벽’ 세워
위치추적 실용성 의문 “실제 위험은 스마트폰 안에 있어”
자녀와 진실한 대화를 통해 적절한 타협책 찾아야

[해외DS]는 해외 유수의 데이터 사이언스 전문지들에서 전하는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글로벌AI협회(GIAI)에서 번역본에 대해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부모 중 절반이 스마트폰을 통해 자녀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자녀가 위험에 처하거나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명분에서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의 행동은 자칫하면 자녀의 자율성 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심하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마음은 이해하나, 위치추적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GPS_SA_20241025
사진=Scientific American

지나친 간섭은 자녀의 성장을 망치는 ‘독’

스마트폰은 이제 중학생은 물론 초등학생도 심심찮게 가지고 있을 만큼 보편화됐다. 부모는 스마트폰을 사주는 게 자녀를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생각에 찝찝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못 가져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부모가 자녀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할 수 있어 안도감을 준다. 최근에는 연락을 넘어 위치추적 앱을 통해 자녀의 위치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위치추적으로 부모의 마음은 한층 편해질지 몰라도 자녀는 지나친 간섭을 받는다는다고 느낄 수 있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가 난무한 나라에서는 위치추적이 과민 반응이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학교 총기 사고, 펜타닐 복용 등 각종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부모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오히려 무책임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소피아 슈카스 브래들리(Sophia Choukas-Bradley) 피츠버그대(University of Pittsburgh) 심리학 부교수는 “청소년기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단계”라며 청소년기에 지나친 간섭은 독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청소년기에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책임감을 키우고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워 자신만의 가치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군다나 심한 간섭은 반항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청소년기는 부모의 말 한마디에도 감정 변화가 클 만큼 예민한 시기다. 이러한 시기에 위치추적을 통한 간섭은 자녀에게 반항심을 심어주고 감시당하는 것에 지친 자녀는 휴대폰을 끄거나 문자 메시지를 무시하는 등 부모와의 관계를 회피하게 될 수 있다. 한 번 틀어진 관계는 되돌리기 어려운 만큼 부모의 섬세한 행동이 중요하다.

더 많은 위협은 스마트폰 안에

무엇보다 위치추적이 자녀를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사이버 괴롭힘, 소셜 미디어 중독 등 자녀에게 노출된 위험은 물리적 환경보다 스마트폰 안에서 자주 발생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을 겪는 청소년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타인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고 자연스럽게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긴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청소년들은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인플루언서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비정상적인 미의 기준을 가지기도 한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이후 많은 청소년들이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소셜 미디어는 새로운 범죄의 창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최근 화두에 오른 청소년 딥페이크 문제를 비롯해 마약 유통, 범죄 과시 등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스마트폰 시대에 자녀에게 도사리는 위험은 물리적 환경보다 스마트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두고 슈카스 브래들리 교수는 “온라인 활동에는 적절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 위치추적을 통해 자녀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라며 위치추적의 실효성을 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치추적,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쓰여야

그럼에도 부모가 자녀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위치추적을 사용하기로 했다면, 자녀와 숨김없는 대화를 통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파멜라 위스니에브스키(Pamela Wisniewski) 청소년 온라인 안전 연구원이자 밴더빌트대 사회기술 상호작용 연구소(Socio-Technical Interaction Research Lab at Vanderbilt University) 책임자는 자녀와 위치추적 수준에 대해 정기적으로 열린 대화를 나눌 것을 강조했다. 부모와 자녀 간의 합의된 위치추적 수준이 생기면, 자녀도 부모에게 마냥 간섭당하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또한 슈카스 브래들리 교수는 위치추적은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예를 들어 자연재해나 학교 총격 사건과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했거나 자녀가 약속 장소에 없을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마지막으로 위치추적이 자녀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부모가 스스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원문의 저자는 시라 노박(Sara Novak) 설리번스 아일랜드에서 일하는 과학 작가입니다. 영어 원문은 How GPS Tracking of Teens 24/7 Impacts Parent-Child Relationships | Scientific American에 게재돼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전웅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흥미로운 데이터 사이언스 이야기를 정확한 분석과 함께 전하겠습니다.

[딥폴리시] 메디치가(Medici family) 사례가 보여주는 ‘자본-권력의 결탁과 부패’

[딥폴리시] 메디치가(Medici family) 사례가 보여주는 ‘자본-권력의 결탁과 부패’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수정

‘자본 독점, 파벌 형성, 재산 증식’ 과정 적나라하게 보여줘
부정부패 통해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심화
열린 민주 정치 체제하에서도 ‘동일한 역사’ 되풀이

더 이코노미(The Economy) 및 산하 전문지들의 [Deep] 섹션은 해외 유수의 금융/기술/정책 전문지들에서 전하는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본사인 글로벌AI협회(GIAI)에서 번역본에 대해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거의 3세기 동안 막대한 부를 통해 피렌체 공화국(Republic of Florence)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예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을 통해 피렌체를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예술 발전에 대한 기여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막대한 부를 동원해 정치 제도를 사유화하고 부를 축적한 ‘부패’의 역사였다. 메디치 가문이 공직(public office)을 개인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이용해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킨 과정은 오늘날의 정치 지형에서도 되풀이되는 주제로 되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The Medici’s quiet coup_PE_20241025
사진=CEPR

메디치가, 막대한 재력 이용해 공직자 선발 ‘사유화’

1433년 9월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는 공직자 선발 결과를 본인의 이익을 위해 조작하려 한 혐의로 시뇨리아(Signoria, 당시 피렌체 공화국 정부)에 소환되어 추방 위기를 맞았다. 코시모가 군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부각시키며 스스로가 공화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은 유명하다. “병사들에게 월급을 누구 돈으로 받았는지 물어보시오. 나는 정부에 돈을 갚으라고 재촉한 적도 없소.”

코시모가 추방에서 돌아오면서 메디치가의 피렌체 정치 지배의 막이 오른다. 재정적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권에 사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공공재를 유용하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공화국 시민의 신성한 의무로 여겨졌던 공직은 사재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오래된 역사적 사실이지만 아무리 열린 정치 체제라고 해도 독점 자본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한 이야기다.

12세기에 세워진 피렌체 공화국은 선거와 ‘트라테’(Tratte)라고 불린 제비뽑기를 결합한 통치 제도를 운용해 다수의 정치 참여를 촉진하고 명망가들 간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부패와 착취를 예방했다. 하지만 ‘롬바르디아 전쟁’(Lombardy Wars)으로 인한 군비 지출로 재정 위기가 찾아오며 코시모와 같은 재력가들에게 권력의 기회를 헌납하게 된다.

1420년대 초 메디치 가문은 시의 재정 궁핍 상황을 이용해 공화국의 주요 채권자로 자리매김하고 막강한 협상력으로 공직자 선출 과정을 사유화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공화국에 발행된 채권의 거의 절반이 메디치 가문과 파벌에서 나왔다고 하니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The Medici’s quiet coup_PE_Figure1_20241025
정치 집단별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채권 보유 규모(1427~1434년)
주: 채권 보유 비율(%)(좌측 Y축), 집단 구성원별 유동자산 보유액(1427년, 단위: 플로린)(Y축), 중도파(Split Loyalty), 메디치 반대파(Medici’s opponents), 메디치 가문 및 파벌(Medici’s faction), 1인당 정부 융자액(Per cap. loan, *집단 소속 개인이 정부로부터 빌릴 수 있었던 대출액), 플로린(fl.s, 당시 피렌체 공화국 화폐), 코시모 데 메디치 보유 채권(Cosimo de’ Medici)/출처=CEPR

‘정치적 파벌 형성’ 후 ‘개인 재산 축적’ 본격화

결국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공직자 선발 과정을 체계적으로 사유화해 반대파 인사들의 선출 가능성을 낮추고 본인 파벌에서 더 많은 당선자가 나오게 함으로써 키워졌다. 이에 대한 증거로 또 다른 연구 자료는 메디치 가문 득세 이후 정치적 소속과 공직 진출 간 뚜렷한 상관관계가 생겼음을 보여주는데, 반대 파벌의 정치 참여가 줄어드는 반면 메디치가 충성파들의 재임 기간은 상당히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Medici’s quiet coup_PE_Figure2_20241025
정치 집단별 구성원들의 기간별 공직 재임 빈도 비율(%)(5년 단위)
주: 연도(X축), 확인된 집단 비율(좌측 Y축), 미확인 집단 비율(우측 Y축), 메디치 반대파(청색), 메디치파(갈색), 중도파(연두), 미확인 집단(주황)/출처=CEPR

한편 메디치 가문 지배하에서 만들어진 이러한 정치 지형의 변화는 개인 재산의 축적과도 뚜렷한 연관 관계를 보여준다. 메디치 지배 이전에는 공직 진출과 축적 재산 간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없었으나 메디치 득세 이후 공직자들에게 주목할 만한 부의 증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공직 진출의 목적이 공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닌 개인적 치부로 변화했다는 증거다.

The Medici’s quiet coup_PE_Figure3_20241025
공직 재임 기간과 재산 축적 간 상관관계
주: 연도(X축), *1427: 메디치 득세 전인 1393~1426년 기간, *1457, 1480: 메디치 득세 후인 1427~1456년, 1457~1480년 기간, 상관계수(Y축), 95% 신뢰구간/출처=CEPR

'독점 자본'과 '정치권력' 만나는 곳에 '부정부패' 무르익어

메디치 가문과 파벌들이 정치 제도를 사유화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부의 불평등은 한층 심화하고, 여기에 더해 공공재 횡령과 후원자 네트워크(networks of patronage) 형성을 통해 메디치 편 공직자들이 유리한 조건의 융자와 계약을 독점하면서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은 더욱 공고화된다. 심지어 공화국이 지불하는 이자율까지 공직 재임 기간이 긴 가구에 더 높았다.

메디치가의 통치 시기는 예술과 문화 융성에 대한 기여로 칭송받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피렌체 공화국을 유럽의 문화, 경제, 정치 중심으로 만드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제도를 사유화하고 부당하게 부를 편취해 소득 불평등을 영속화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이 만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부패와 공권력 남용이 무르익을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디치가의 사례는 막대한 부의 편중이 정치 체제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는 오늘날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리 견제와 균형이 보장된 열린 민주 정치 체제라 해도 공권력이 독점 자본과 결탁하여 부정과 부패로 이어진 사례는 넘치고, 가능성 또한 상존하기 때문에 정치 체제가 도덕성을 유지해 소수의 부자들이 아닌 공중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한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원문의 저자는 마리안나 벨록(Marianna Belloc) 로마 사피엔자대학교(Sapienza University Of Rome) 교수 외 2명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The Medici’s quiet coup: How the wealthy bend politics without shifting institutions | CEPR에 게재돼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2 months 3 week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