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머 체제 흔드는 反이민 정서, 브렉시트 이후 딜레마에 빠진 영국 정치
스타머 체제 흔드는 反이민 정서, 브렉시트 이후 딜레마에 빠진 영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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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대패하자 당내 사퇴 요구 커져 해외 노동력 의존 심화가 키운 영국 정치 불안 노동력 부족 해결할 대대적인 시스템 개혁 필요

영국 지방선거에서 집권 노동당의 참패 이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에 대한 사임 압박이 거세다. 노동당 의원 70여 명이 스타머 총리의 사임을 공개 요구한 데 더해 내각에서도 퇴진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스타머 총리가 물러난다고 해도 노동당의 위기가 쉽게 해소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차기 총리 후보군이 거론되는 등 당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영국 사회 저변에 깔린 반(反)이민 정서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면 소모적 권력투쟁만 반복한 채 결국 정권을 내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스타머, 선거 참패 후 퇴진 압박
13일(이하 현지시간) 노동당 관련 전문 매체 레이버리스트는 79명의 노동당 의원이 스타머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거나, 그에게 사임 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노동당은 전체 650석인 하원에서 403석을 보유하고 있어, 노동당 의원 19%가량이 총리의 사임을 요구한 셈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내각에서도 스타머 총리에게 사임을 준비하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베트 쿠퍼 외무장관과 샤바나 마무드 내무장관은 11일 스타머 총리에게 “질서 있는 권력 이양을 책임져야 한다”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차기 지도부 구성을 위해 퇴진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런 발언은 스타머 총리가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지 몇 시간 만에 나왔다.
가디언은 최소 다른 2명의 내각 장관도 스타머 총리에게 “책임감 있고, 품위 있으며, 질서 있는 방식으로 대응해달라”며 사임 촉구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엔 스타머 총리의 측근인 데이비드 래미 부총리와 존 힐리 국방장관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한 내각 장관은 가디언에 “(스타머 총리가) 내일 내각회의 전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미 노동당 내부에서는 ‘스타머 퇴진론’이 확산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에드 밀리밴드 에너지 장관은 스타머 총리에게 사임 일정을 제시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지난 7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1,496석을 잃으며 1,068석(21.2%)을 얻는 데 그치자, 스타머 퇴진론에 불이 붙었다. 보건·환경·법무 등 정부 부처에서 일하던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정무 보좌 인사) 4명도 사임하며 스타머 총리의 퇴진을 촉구했다.

브렉시트 10년, 영국 노동시장 더 취약
노동당의 내홍이 짙어지자 차기 총리 주자 경쟁도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 앤디 번햄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 앤절라 레이너 전 부총리 등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스트리팅 장관은 노동당 내 중도·우파 계열 지지를 받는 인물이다. 토니 트래버스 런던정경대 정치학 교수는 타임지 인터뷰에서 “(스트리팅은) 스타머에게 없는 능력을 갖췄다”며 “보건장관으로서 자신의 성과를 대중이 이해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번햄 시장은 현재 가장 대중적 인기를 얻는 노동당 정치인으로 꼽힌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 조사에 따르면 그에 대한 호감도는 35%로 스타머 총리(19%)를 크게 앞섰다. 거의 10년간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을 맡아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레이너 전 부총리 역시 유력 후보군이다. 빈곤층 출신으로 간병인·노조 활동을 거쳐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노동당 좌파와 당원층에서 강한 지지를 받는다.
문제는 스타머 총리가 물러난다고 해도 노동당의 위기가 즉각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국 유권자의 핵심 관심사는 이미 경제와 이민으로 수렴돼 있다. 영국 사회 내부에서 폭발하고 있는 반노동당 정서는 사실상 반이민 정서와 결합돼 있다. 유고브 조사에서 올해 4월 기준 영국인이 꼽은 최우선 현안은 경제 54%, 이민 51%였다. 노동당 정부 국정 운영을 긍정 평가한 비율은 전체 15%, 노동당 지지층 내부에서도 33%에 그쳤다.
영국의 반이민 정서는 브렉시트 이후 한층 복잡해졌다.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유럽에서 밀려오는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EU를 탈퇴하면 이민자가 줄고 영국인들의 일자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영국 경제의 노동력 부족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보건·돌봄·물류·건설·숙박업 등 저임금 서비스 산업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영국 의회 보고서는 브렉시트 이후 숙박·외식업과 건설업을 중심으로 만성적인 인력 부족이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고, 옥스퍼드대 이민관측소(Migration Observatory)는 브렉시트 이후 저숙련 노동 공급 감소가 일부 산업에 직접적인 충격을 줬다고 평가했다.
결국 영국은 EU 노동력 의존을 줄이는 대신 비EU 이민 확대라는 우회 경로를 택했다. 실제로 최근 영국 이민 증가의 중심은 유럽이 아닌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권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 같은 비유럽 이민자 비중 확대는 영국 사회 내부 갈등을 키우는 새로운 요인이 됐다. 영국 보수 진영이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인들의 체감 현실에서는 국경 통제 회복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불만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최근 영국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개혁당(Reform UK)은 바로 이 정서를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개혁당의 확장을 “영국 정치 지형 자체를 흔드는 수준의 반이민 포퓰리즘 재편”이라고 평가했다.
이민 줄이면 노동비 폭등, 유지하면 정치 부담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영국 경제는 이민을 줄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와 돌봄 산업은 이미 해외 노동력 의존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진 상태다. 작년 말 기준 영국 성인 피고용자 중 이민자는 575만 명으로, 전체의 19%에 달했다. 보건·돌봄, 식품 제조, 물류, 숙박·외식 등 저임금·필수 서비스 부문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외국인 노동력 없이는 비용 상승과 공급 차질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노동력 수요도 여전히 높다. NHS는 현재 수십만 명 규모의 진료 대기 문제와 의료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 보건당국에 따르면 NHS 공석 규모는 한때 10만 개를 넘어섰으며, 돌봄 산업 역시 만성적 인력 부족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영국의 노동력 부족은 고령화, 낮은 생산성, 장기 경제활동 비참가 증가까지 맞물려 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정부는 “저임금 이민 경제에서 고임금·고숙련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영국 기업들은 인건비 상승과 인력 부족 압박 속에서 자동화·설비투자·생산성 혁신을 충분히 끌어올리지 못했고, 결국 부족한 노동력을 해외 이민으로 메우는 방식으로 회귀했다. 영국 인사개발협회(CIPD)는 "영국 정부의 이민·기술 정책이 노동시장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영국 정치가 마주한 딜레마는 명확하다. 반이민 정서를 따라가며 이민을 급격히 줄이면 노동비 상승과 인력난 악화가 불가피하다. 특히 NHS, 돌봄, 물류, 식품, 건설 같은 필수 산업 비용이 급등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이민을 유지하면 반이민 정당의 정치적 동력은 더욱 커진다. 개혁당은 최근 지방선거에서 노동당 핵심 지지 기반인 북부 산업지대까지 잠식하며 급격한 세 확장에 나섰다.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노동계층 표심이 반이민 정서를 매개로 다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렇듯 영국 정치는 지금 양쪽 모두에서 압박받고 있는 실정으로, 총리 얼굴만 바꾼다고 위기를 돌파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영국 이민자문위원회(MAC) 한 관계자는 "영국 유권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브렉시트 이후 무너진 노동시장과 이민 시스템을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라며 "그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정권은 소모적 권력 투쟁만 반복한 채 자리를 내줄 공산이 크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