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로 쏠리는 자금, '트럼프 트레이드'에 아시아 통화 동반 약세
입력
수정
원 ·달러 환율, '심리적 저지선'인 1,400원 넘어서 日 자민당 참패에 '엔케리 트레이드' 부활 가능성 '트럼프 트레이드' 길면 2026년까지 지속될 수도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지선인 1,400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의 환율 방어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관련 수혜주를 찾아 미국 증시로 투자금이 쏠리는 '트럼프 트레이드(Trump Trade)' 현상이 거세지면서 달러 강세가 심화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트레이드가 짧으면 내년 1분기, 길면 내후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원·달러 환율, 2거래일 연속 1,400원 웃돌아
14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이날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넘긴 1,405.1원에 마감했다. 원·달러 환율은 미국 대선 직전인 지난 5일 1,370원대에서 트럼프 당선 직후 연일 오름세를 기록하고 있다. 전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의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는 3.1원 오른 1,406.6원을 기록했다. 주간 거래 종가 기준으로 지난 2022년 11월4일(1,419.2원) 이후 2년 만에 가장 높았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전일 대비 0.19% 오른 106.68에 거래되며 연중 최고치 수준을 나타냈다.
이에 한은도 시장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 5일 한은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말 기준 4,156억9,000만 달러(약 584조7,500억원)로, 전월 말(4,199억7,000만 달러)보다 42억8,000만 달러 줄었다. 4개월 만에 감소세로 전환한 것인데, 달러 강세에 따른 외환 당국의 미세 조정 등 영향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환 딜러는 "한은이 변동성을 제한하기 위해 달러를 매도하는 등 환율 방어에 나선 가운데 수출 업체들도 차익 실현을 위해 보유 중인 달러를 풀고 있어 외환 시장에서 매도 가격이 촘촘하게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美 증시 연일 고공행진, 암호화폐도 90% 급등
미국 주식 등으로 자산이 쏠리는 트럼프 트레이드 현상이 거세지면서 미국 증시도 강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증시 3대 지수는 일제히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0.69%(304.14포인트) 오른 4만4,293.13에 거래를 마쳤다. 공화당의 레드 스위프(상·하원 장악) 가능성에 최고치를 쓴 지 3일 만에 다시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이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각각 6,001.35, 1만9,298.76에 마감했다.
대표적 트럼프 수혜 자산인 암호화폐 가격도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비트코인 가격은 10일 오후 9시 기준 8만147.40달러에 거래되며 사상 처음 8만 달러(약 1억1,250만원)를 넘어섰고 11일 오후 4시 25분 기준으로는 8만934.19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에 따르면 미국 대선 투표가 이뤄지던 6일 비트코인 거래 대금은 1조3,080억원에 달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가 띄운 도지코인도 최근 일주일 사이 90% 넘게 급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도 당분간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며 이미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진 성황에서 이번 주 최소 1,410원대에서 최대 1,450원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추산했다. 다만 아직 고환율 추이가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만큼 경제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만 환율이 올랐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아시아 통화 시장이 전반적으로 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엔화, 블랙먼데이 이후 2개월 만에 순매도 전환
일각에서는 청산됐던 엔캐리 트레이드가 부활한 가능성도 제기된다. 13일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달러·엔 환율은 지난달 27일 진행된 일본 중의원 선거와 이달 7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급등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환율(오전 8시 10분 기준)은 전일(151.66엔)보다 1.18엔 오른 152.84엔으로 집계됐고, 7일에는 154.39엔으로 급등했다가 11일 152.89엔으로 소폭 내렸다. 환율이 153엔을 넘어선 것은 지난 7월 30일(153.82엔) 이후 3개월 만이다.
엔화 약세는 일본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전체 465석의 과반인 233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중의원이 여소야대 구조로 재편되면서 금리 인상을 통한 금융 정상화를 추진해 온 이시바 시게루 내각이 '식물 내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예산안이나 법안 처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야당 협력을 얻어야 하는 상황인 데다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속도가 더뎌질 수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으면서 엔화 가치가 출렁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엔캐리 트레이드의 규모를 보여주는 투기적 목적의 엔화 순포지션(매수약정-매도약정)이 순매도로 돌아섰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엔화 순포지션은 지난 8월 13일 순매수로 돌아선 지 두 달여 만인 지난달 29일 순매도(2만4,000계약)로 전환됐다. 이는 엔화를 팔아 다른 통화를 매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뜻으로 엔캐리 트레이드가 되살아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지난 8월 블랙먼데이 사태 이후 엔캐리 트레이드가 상당폭 청산돼 단기간에 대폭 확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트럼프 트레이드 현상이 내년 1분기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취임 전까지는 공약이 구체화되기 어려운 데다, 취임하더라도 경제 정책이 바로 쏟아져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내후년이 돼야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구체화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2일 발표한 '2024년 하반기 경제전망'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장벽이 2026년에야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전망대로라면 트럼프의 공약이 구체화되는 내후년에야 트럼프 트레이드가 종료될 가능성이 있다.